<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1에서 계속>
1950년 :
(36세때) 6.25북한인민군의 남침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북한공산인민군의 수중에 함락되어, 공산주의자들이 살상을 자행되는 새벽, 창현 함태영은 가족 5인을 남겨 둔 채 먼저 한강을 도강하여 고향인 승주군외서면 장산리로 피신을 하였다.
이 때에 기독교인 및 친미파라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승주군(순천시) 외서면 소재 공산통치의 내무서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당시에는 한 번 체포되면 살아 남는 사람이 거의 없는 때인 데에도 옥중에서 찬송과 기도를 계속하였다..
이 때 아우인 태호의 부인인 제수는 옥에 면회를 갈 때마다 시숙인 창현 함태영의 기도하는 모습에 질색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기독교인이요" 하고 목숨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친인 송암(松庵 咸鳳表)을 비롯해서 모든 형제가 그 지역 사회에서 인심을 얻고 추앙 받는 형편이었으므로 죽임을 면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 밤중에 기적적으로 풀려 나와 은신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뒷산의 대나무 숲 동굴이나. 앞산의 숲 속에서 두문불출하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6.25남침전쟁 발발 3주 가까이 되어서 서울을 출발 천리 길을 도보로 더위와 공습과 굶주림 등 온갖 위험과 죽을 고비의 고초를 겪으며 승주군(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까지 피난하여 재회하였다.
장산리 본가에는 40~50여 명의 대소가(大.小家)의 대식구가 피란처로 모여들어 먹을 것, 입을 것 등 합심 협력으로 고통을 이기는 기나긴 날들이었다.
한 편 창현 함태영의 부인인 정용옥 여사는 역시 피난 중인 친정동생 정윤익 등 3남매를 찾아 승주군 해룡면에 갔다가 그 곳 내무서원의 검문에 걸려 꿈에도 그리던 동생들을 상면도 못한 채 내무서에 투옥되는 불운을 만났다.
공산당원의 심문에서 기독교인이며 공산주의를 배반하고 월남한 반동사상분자로 죄목이 씌워졌다. 왜냐하면 정여사는 평안도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삼팔선 이북의 출신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동생들에 대한 사항은 함구하였으므로 동생들은 안전하였다.
정여사는 내무서원들이 한눈을 파는 틈을 타서 만 하루가 지난 다음날 탈출하는 데에 성공하여 외서면 장산리로 돌아왔다. 이 어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랴?
인민군들은 창현 함태영의 집 소유의 앞산에 있는 밤나무를 베어 무쇠솥에 삶아 무명베옷에 물을 들여 군복으로 삼아 입었고 식량과 가축들을 무조건 약탈하여 현지서 조달하였다. 한마디로 병참보급로가 끊기고 군수물자가 없는 엉터리 군대였다.(지역 인민위원장을 앞세워 약탈할 물자가 있는 집들을 미리 알고 있었음)
그 해 9월초 공산주의자들은 벼이삭을 낱알과 벼 포기까지 세어 경지 면적당 생산량을 예측하여 농작물을 수탈하려고 계획을 세워 현지실사 계량을 하였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UN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므로 인민군들은 패잔병이 되어 4~5명 정도 식 떼를 지거나 흩어져 갈 수도 없는 북쪽을 향하여 가거나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
이 때 승주군(순천시) 외서면 장산리도 수복되었으나 공산군의 잔당들이 빨치산이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을 주민들은 물론 경찰서 등 관공서를 공격하여 공방전이 계속 되었고 빨치산들의 약탈 방화 살인(총살 도끼살인 죽창살인 등 흉악했음, 또는 약탈한 재물을 양민들의 등에 지게 하여 강제로 끌고 가 행방불명.)이 끊임없었다.
지방관공서인 경찰지서와 면사무소가 낮에는 대한민국 아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접수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경찰지서 등은 하다못하여 대나무를 죽창 식으로 깎아 2중3중으로 성곽을 쌓듯 울타리를 치고 경계하였다.
창현 함태영은 토굴과 밀림의 은신처를 빠져나가 안전지대인 부산으로 피신 1951년 2월 29일 기독교신보사가 주관이 되어 조직된 기독교선무원으로 발탁되어 국방부정훈국 산하에 파견되어 종군군목이 되었다. 전선에서는 계속 북진을 하며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군목으로서 군복장(軍服裝)을 한 채 승주군 외서면 본가에 잠시 다녀가는 야간 여행 중 벌교나루에서 빨치산들의 습격을 받고 발각되었는데 벌교지방 유지들이 다 떨며 끌려 나가는 중 창현 함태영은 혼자 군복차림으로 당당히 앉아있자 빨치산 대장이 나타나 "동무 수고합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선박 밑으로 숨는 등 어려운 피신 끝에 살아남게 되었다.

1951년2월9일 기독교신보사 선교원파견기념(국방부정훈국소속으로) 앞줄 右부터 2번째가 창현 함태영 목사
(수필)
6월은 밤꽃의 계절이다. 밤나무는 시골 어디를 가나 산언저리 동네주위 개천이나 강가에 많이 심겨져있다. 유실수로서 지방 곳곳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여 6월이면 절정인 밤꽃의 자욱함은 안개가 서린 듯 장관이다. 구수하다고나할까? 이상야릇한 밤꽃의 향이 코끝을 간지르는 계절은 고향을 생각케 하는 특유의 냄새이다. 어떤 이들은 밤꽃의 향을 남성이 발정하는 냄새라고도 한다. 남성이 발정을 한다함은 생식을 위한 단계가 아닌가. 생식은 곧 인간의 고향이다. 그러기에 밤꽃의 향기는 맡을수록 향수에 빠지게 하는 은근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의 고향, 순천 외서의 선산인 넓다란 안산에는 밤나무 단지가 무성하다. 너무나 넓은 밤나무단지인지라 해충방제를 할라치면 살충제를 헬리콥터로 공중살포 하여야한다. 농촌계몽가이신 나의 조부께서는 일찍이 1930년대부터 우량종 또는 개량종의 밤나무를 손수 접목번식하여 단지를 일구어 왔다. 조부께서 타계하신 이후 숙부께서 이어받아 경영하신다. 밤은 영양가가 높은 열매로 산골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간식거리이며 농촌에는 농가소득의 효자수(孝子樹)가 된다.
6월, 밤꽃의 계절이 오면 고향생각은 물론이려니와 조부님 생각이 간절하다. 항상 객지에 머물러 살던 나는 8․15 해방 무렵과 6․25전쟁 피란 중 약 2~3년 정도(4~7세 때 잠간씩과 11세 때) 짧은 기간이나마 조부님 슬하에 머문 적이 있다. 조부님은 나를 장손이라고 많은 관심으로 엄하게 훈육하시려고 애를 쓰셨다. 조부님 댁에는 사랑채와 칙간채를 사이에 두고 대문을 달아놓았는데, 대문 안쪽의 칙간은 가족용이고, 대문 밖쪽의 칙간은 손님이나 길손들의 용도였다. 1950년 겨울 어느 날 대문 밖쪽의 칙간문 기둥모서리에 기대어 개머리판 닮은 밤나무토막을 들고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탕, 탕, 탕” 소리를 질렀더니 마침 용변을 보시던 조부님께서 청천벽력의 고함과 함께 그만두라고 외치시더니 집 울타리의 낭창한 개나리 가지를 손자 손으로 직접 꺾어 가지고 사랑방으로 당장 오라고 호통치셨다. 여느 때에나 마찬가지로 나에게 잘못된 행실의 벌칙인 종아리 걷어올리고 목침 위에 올라서서 회초리 맞기 벌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찌나 고집이 세었던지 엄살도 없이 잘못하였다고 빌지도 않으니 매맞기 시간이 길어졌다. 종아리는 뱀이 휘어 감듯 피멍줄기가 수없이 많은 가닥으로 얽혀 있었다.
조부님께서는 구한말(舊韓末) 의병에 가담하시어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왜병들을 사살하였고, 수많은 의병들 역시 왜병들의 총칼에 의해 전사 희생되는 것을 보셨기에, 총으로 사람 죽이는 짓은 인간으로서 참아 못할 행위임에 치를 떠시는 것이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생명의 존귀함을 아셨기에 총 쏘는 흉내가 가없이 가슴 떨리는 죄악으로 보이셨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조부(송암 함봉표)께서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6․25 전쟁 중에 아래의 시를 남기셨다.
존폐와 합분이 각기 때가 있는 것이니
앞으로의 길흉을 어찌 알리요.
산간 폐옥은 밥지은 연기 끊어지고
야외의 벽촌에 사람, 개도 드물다.
남을 해친 너희 무리 빨리 가거라.
백성 건질 우리 님 언제 오려나
동서(우익과 좌익)에서 공작하느라 쉬는 땅이 없으니
언제나 벼개 높이고 편한 잠을 자리요.
[ 世感 ]
存廢合分各有時 존폐합분각유시
到頭吉凶豈人知 도두길흉기인지
山間廢屋炊烟絶 산간폐옥취연절
野外僻村人犬稀 야외벽촌인견희
害物爾徒去亦速 해물이도거역속
濟民我后來何遲 제민아후래하지
東西工作無休地 동서공작무휴지
何日安眠高枕支 하일안면고침지
(松庵 咸鳳表의 시 世感<이 세상은 -6․25를 겪으며> 전문)
그렇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존귀하고 고귀한 것이다. 산간벽촌까지 인적이 끊일 정도로 인명이 살상된 6․25 전쟁은 참으로 끔직하지 않은가. 고향을 생각케 하는 밤꽃의 계절 6월에는 「현충일」이 있고 「6․25전쟁기념일」이 있다. 이 두 기념일이 인간의 목숨이 희생된 것과 관련된 기념일이기에 그 날이 오면 심정이 더욱 숙연해진다.
지금도 고향에 들르면 조부님의 산소와 밤나무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조부님을 회상한다. 가을이면 사촌아우가 형님 맛보라고 햇 밤 한 박스를 택배로 부쳐온다.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내가 태어난 흙에서 난 밤이 제일 맛있다고 고향 자랑을 한다.
선영에 올라
할배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더디게 찾아 뵙는 참회의 묵념을 드린다
네 살 적 할배 수염 끄들어 잡으면
네 이놈! 하시곤
머리 쓰다듬던 할배
저만치 밤나무 한 그루
할배의 혼이 배었나
엣다, 또 끄들어 보아라
밤꽃은 할배의 수염이 되어
머리 위서 하늘거린다.
( 1994. 10. 1. 작 졸시 <밤꽃> 전문)
다시 밤꽃의 계절 6월이 왔다. 6월은 밤꽃으로 고향을 생각케도 하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숭고한 순국영령들과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으로 얼룩진 6․25 전쟁을 잊을 수 없게 하는 계절이기도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지붕 위로 굉음을 지르고 지나가는 비행기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생사를 건 6․25 전쟁 피난 중 폭격기의 공습에 놀란 가슴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이랴 푸른 하늘 흰 구름 사이로 비행기가 벗어 나와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 목숨은 거저 얻어 지니고 있는 목숨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남북교류는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이 아니라 신중을 기하면 좋겠다.
밤꽃의 계절에 고향과 조부를 생각하며, 개나리회초리의 엄하신 훈육의 덕으로 사람됨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는 지금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함동진의 수필 <밤꽃의 계절 6월이 오면> 전문)
1951년 :
(37세때) 3월, 창현 함태영이 전라남도 광주시 방림동의 서병렬(徐炳烈) 목사댁으로 옮겨 거주하는 동안 여러 친척 젊은이들도 배움에 불타 함께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감리교신학대학출신인 이신(李信)목사(후일 미국에 유학을 하여 신학박사가 됨)를 만나게 되며, 이신 목사가 그리스도의교회로 환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 학동에 제일 큰 교회당 건물이 있었는데 창문틀까지 축조된 상태에서 6.25전쟁을 만나 중단상태로 있었다. 여러 곳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이 함께 이곳에서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충북 부강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하는 김은석 목사를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하던 전라도지방교회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이들과 합치기에는 장소 등 문제가 많았었다. 5월에 이르러 창현 함태영의 부친 송암(松庵)공의 지원과 창현의 사재처분금과 영광의 임00 장로의 헌금으로 광주의 양림동(공원,방송국입구) 일본적산가옥인 큰 도로변에 위치한 대형 2층 건물을 매입, 그리스도의교회 신학교 간판을 제작(화가이기도 한 이신 목사가 일곱 촛대의 도안을 그려 넣어 직접 그려 넣어 제작하였다. 후일 이신 목사는 대전 한국성서신학교<지금의 연산 한성신학교의 전신>의 간판의 도안도 이와 같은 일곱촛대 문양을 넣어 제작함) 현판하고 여러 곳의 신학도들을 합병하여 신학강좌를 시작하게 되었고, 또한 이 건물에 신학교와 병행하여 광주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한 바 마치 오순절의 역사를 재현한 듯 큰 부흥의 불길이 일었다.
이 때에 김은석목사 집례로 함창현․이신․최요한․김재순․장주열 이 그리스도의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일심으로 협력하여 각자가 맡은 환원운동 신학교수(강좌)에 열심함으로 큰 성과를 올렸으며 많은 환원운동 전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환원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의교회는 비조직 비통치적이므로 새로운 전도자들을 붙들고 뒷밭침 할만한 재정이 없어 부득불 교파교회로 되돌아가 사역하는 일꾼이 많이 있어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직 6.25전쟁이 종결되지 못한 때라 큰 문제중의 하나가 젊은 청년 전도자들의 통행제한 문제가 있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종군당시 사귀었던 미8군 군목을 찾아가 통행증에 사인을 받아 환원운동전도자들의 통행에 불편이 없도록 하여 환원운동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이 때에 김은석 목사의 가족과 김태수 목사의 가족들도 광주 양림동의 같은 건물에 입주하였다.
한 편 의술을 지닌 창현 함태영 목사 의 셋째 아우인 태중(泰仲)이 자금과 식량 공급으로 신학교와 신학강좌운영에 경제적 후원을 하였다.
이 후 김은석 목사는 오순절성령운동을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으로 주장하며 예배에까지 도입하므로 잠시나마 동료 목사들로부터 지적을 받는 바가 되기도 하였었다.
이 해의 가을 창현 함태영 목사는 충청남도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로 이주하여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와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를 동시에 개척하여 시무하였다.
따라서 이 무렵 셋째 아우 태중, 넷째 아우 태욱(泰昱)과 이신 목사는 충남 부여군 합송면 난민촌으로 이동하고, 광주의 환원운동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동하고 감확실 여전도사와 정찬성 목사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환원운동신학공부를 하며 로고스(λογοζ )의 잡지를 제작 전국교회로 발송하였다.
이신 목사는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를 담임 시무하였고, 이신 목사․김은석 목사․창현 함태영 목사 등이 교수가 되어 합송리 환원운동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강좌에 열심하였다.

김은석 목사
(수필)
해마다 거듭되는 6․25 음식체험장에서 젊은 청소년들은 6․25 음식이 ‘먹을만하다’할 것이다. 아니면 ‘맛이 있다’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6․25 음식체험행사를 매년 소식을 접하고 목격면서 이질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때에 악식(惡食)을 하며 허기지고 긂주렸던 어지럼증이 되살아난다.
6․25남침전쟁 초기에는 식량이 조금은 남아 있어 급히 피난을 하거나 장거리 이동을 할 때에 주먹밥을 삼베보자기(도시락 그릇조차 귀하기에) 같은 것에 싸서 휴대하였다.
전투가 한창인 전장에서는 야전식품인 건빵, 씨 레숀 등이 개발되기 전에 취사가 불가능한 군인들에게 지급한 급식이 주먹밥이기도하다.
주먹밥은 전쟁시가 아니었더라도 평상시에 민가에서 장보러가기, 땔감나무 하러가기, 먼 밭에 농사 하러가기 등에서 활용되었다. 당시 주먹밥은 야외이동시 휴대하기에 편리한 상급식품上級食品었다.
6․25남침전쟁이 시일을 끌면서 식량은 고갈되고 양식을 구할 길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구황救荒을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6․25전쟁시에 주먹밥이나 민가의 밀가루수제비 음식 등은 누구나 상식한 것이 아니고 전장터의 군인들, 혹은 극히 일부 부유층이나 부농들이 취식하든 음식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전장의 폐허와 피난살이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나 끼니를 거르는 굶주림으로 지내야 하는 실정이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설상가상으로 3년 내내 가믐까지 겹치고 청장년들의 참전으로 농사를 그르쳐 식량부족과 굶주림은 극에 달하였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의 끝 무렵부터 U․N의 식량원조 곡물배급 덕분으로 그나마 풀죽을 쑤어 구황할 수 있었다.
매년 벌이고 있는 6․25 음식체험장에서의 주먹밥 또는 수제비등의 음식은 그때의 굶주림으로 인한 고통의 면모를 6․25후세대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기에는 적절치 않는 넉넉한 음식이며 고급?에 속한 음식들이다.
진정한 6․25음식들은 곡기(풀기) 없는 밀기울개떡, 쑥범벅 또는 쑥개떡, 칡죽, 소나무껍질밥, 콩잎죽, 무죽, 시래기죽, 김치우거지죽, 물말죽, 등 물과 다를 바 없는 멀겋고 거치른 죽 들이다. 이러한 음식들은 개에게 주어도 먹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매년 찾아오는 6․25 음식체험장에서의 맛을 보여주는 음식은, 실제 6․25전쟁시의 음식과는 거리가 먼 좋은 음식들인 것이다.
6․25 음식체험이라하여 먹을만하고 맛도 그런대로 좋은 음식을 체험시킴으로 허기지고 굶주리며 살아남기 위해 악식惡食을 하던 참상의 6․25전쟁을 자칫 가리거나 흐리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게 하고 있다.
6․25남침전쟁으로 인하여 폭탄과 포화로 산하가 초토화 됐고, 초근목피를 마구 벗기고 캐어내 이것으로 허기를 채워 연명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땔감으로 남벌하여 산과 들이 황토黃土로 변하고 말았었다. 오죽하면 헐벗은 산야에 ‘나무를 심자’는 노래를 교과서에서 가르치며 식목운동을 벌여왔겠는가.
일반인들도 굶주렸지만, 그때의 피난민생활을 하던 목회자 가정의 식생활은 더욱 혹독할 정도로 기아(飢餓)현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먹을 거리를 생산할 논 밭이 없었기에 더욱그러하였다.
6․25 음식체험음식들을 다시 고증하여 제대로 체험토록 하자는 바램이 크다. *(함동진의 수필 <6․25 음식체험의 허와 실> 全文)
1952년 :
(38세때) 11월 15일 6.25전쟁으로 어려워진 사회에 교육의 뜻을 두고 농촌발전을 위하여 또 배움에 굶주린 농촌 2세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논산군(논산시) 부적면 신교리에 공회당을 빌어 복음공민중학교를 설립인가를 득하였다.(후일 창현의 후배 겸 제자인 이춘식 목사께서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칭한 바 있음) 이때에 셋째 아우인 태중은 학교 재단운영과 교회운영의 후원자로 뒷밭침 하였고 막내아우인 태욱은 영어 강사로서 도왔다.(태욱은 후일 서울성서신학교를 거쳐 한국성서신학교를 나와 여러 교회에서 목회함) 그밖에도 부여의 환원운동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 신학도 여러 교사들이 태중․태욱 형제와 함께 신교리로 주거지를 옮겨 무보수(식사 대접만 받고) 교사로 교육에 헌신하였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사모 정용옥은 교사들의 식사제공과 세탁 등으로 헌신하였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여 성서로 돌아가자!" 고 외치며 "성서로 돌아가자!"는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은 맹렬히 타는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환원운동
성서적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基督敎 初代敎會로의 還元運動)
환원운동지침
1. 책은 성경만
2. 신조는 그리스도만
3. 명칭은 하나님의 것으로만
4. 주장은 복음만
5. 일체의 근거는 성경적으로만
6. 기본교리에는 통일을
7. 의견에는 자유를
8. 매사에는 사랑으로 한다
환원운동정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은 우리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조는 성경말씀의 가르침뿐이며
우리가 믿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우리의 신앙의 결정은 성경말씀의 가르침에만 의한다.
(딤후3:13~17. 벧후1:20,21. 히13:8. 히7:26~28. 마16:18. )
부여 귀암면 합송리에서 배운 젊은 신학도들은 서울이 수복된 후 서울성서신학교(현재 서울기독대학교와의 통합전 신학교의 명칭)로 옮겨 (그 밖의 다른 교단으로 가기도 함) 기독교환원운동가 전도자 목사로서 배출되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며 가족과 함께 기거하던 논산군(논산시) 부적면 충곡리는 논산의 황산벌을 기름지게 하는 수원지인 대단위 논산저수지를 마을 아래에 두고도 앞뒤로 황토가 흘러내리는 민둥산(6.25전쟁당시 땔감이 없어 나무뿌리 풀뿌리까지 모두 캐어다 땔감으로 쓴 결과) 골짜기에 위치하고있었다.
6.25 전쟁이 나던 1950~1952년은 가믐이 계속되어 이 지역은 밭곡식은 물론 얼마 안 되는 다락논들에서 곡식과 쌀이 생산되지 않아 그야말로 동리 사람들이 초근목피(草根木皮), 독새풀씨, 저수지의 물말이란 풀을 뜯어다 풀기(호糊=곡기)를 찾아 볼 수 없는 거친 것을 끓여 음식으로 삼아 연명하였다. 사람들이 먹어 탈만 안 나면 어떠한 풀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이런 음식과 먹거리는 개에게 주면 입도 안대는 거친 음식이었다.
온 마을이 전쟁의 불안과 기근으로 황폐화되다시피 하여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많이 나왔다. 하물며 땅 한 평이 없는 창현 함태영 목사의 가족은 오직하였으랴. 연거퍼 사흘씩 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전쟁의 시달림에서 가문과 기근의 시달림으로 이어져 시련의 세원을 보냈다. 그러나 기존의 신도들은 더욱 산앙심이 깊어져 밤낮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며 기도하였다.
그 때의 신도들의 피땀 나는 순교자적 눈물의 기도가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눈부신 성장을 낳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굶주리던 그때에 어떤 신도들은 창현 함태영 목사의 사택에 와서 초근목피로 끓인 죽 한 사발로 배를 채우는 이와 어린이도 있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서울에서 피난을 왔으므로 피난민으로 등록되어 유엔이 보내준 얼마 안 되는 피난민 구호 양곡인 통밀과 알랑미(또는 안남미라고도 함)를 배급받아 통째로 빻아 늘여 먹기 위하여 쑥, 모시잎, 물말, 콩닢 등과 철철이 나오는 야생초 나물과 혼합하여 풀기(가루기)가 거의 없이 버무려 개떡을 찌거나 죽을 쑤어 먹었다. 개떡의 경우 가루기가 너무나 희소하게 배합되어 뭉쳐지지 않고 부슬부슬 하였다. 이는 영양부족을 일으키는 음식들이었다.
이로 인하여 창현 함태영 목사의 사모인 정용옥 여사는 영양실조로 몸이 붓고 자주 앓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어디엔들 안 그랬을까마는 유독히 충곡리 지역은 기근이 극심했었다. 아마도 창현 함태영 목사가 이곳에서 개척교회를 시무하지 않았다면 정용옥 여사가 더 오랫동안 생존해서 더 많은 주님의 일을 해낼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하였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은 창현 함태영 목사의 바로 아래의 아우로서 쌍동이인 태호 태무(泰浩 泰武) 두 형제가 넓은 농토와 임야의 논과 밭농사, 과수 축산 등을 힘들게 해내면서도 극진히 봉양하였다. 이 두 형제는 한 없이 선량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께 순종하고 대대로 이어지는 여러 대의 선조들 제향을 올리면서, 참된 독농가로서 현지주민들의 모범과 선망이 되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자당 김월림 여사의 회갑(6.25남침전쟁 중이라 조촐한 床을 받음)
(수필)
흰눈이 깊이 쌓인 마을에 교회당이 있고 종탑이 우뚝 솟아 있는 그림의 성탄절 카드나 달력을 보면 평화로움이 느껴지며 교회의 종소리가 그리워진다.
종소리가 울려 퍼져 고요한 마을과 산천을 돌아 메아리로 이어져 올 때 아름다운 서정 속에 은혜로움으로 잠기며 마음이 온화하여졌던 시절이 생생하다.
8․15해방과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도시나 농촌을 불구하고 시계가 귀한 시시였다. 더구나 시각을 알리는 괘종시계는 부유하다고 인정되는 집 이외에는 그것을 소유한 가정이 매우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시각을 알리는 고마운 것이 있었으니 교회당의 새벽 종소리였다. 경우에 따라 정오의 종소리도 있었고 주일과 수요일에는 저녁 종소리도 있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이 종소리에 의하여 일과의 시작과 끝나는 시각을 가늠할 수 있었던 종소리였다.
1951년 가을 6․25전쟁 피난시절에 목사(창현 함태영)인 아버지를 따라 새로 개척한 목회지인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에 소재한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로 이사를 하였었다. 새로이 개척한 교회임으로 신도의 수도 적고 재정 또한 목사인 아버지의 개인 사비로 운영되었다. 자그마한 교회당이었음으로 종탑이 없었으며 또한 종이 달려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님은 교회에 부임하신지 얼마 안되어 학교종을 닮은 은색의 커다란 종 하나를 구입하여 오셨다. 종은 양은(알미늄)으로 주조하여 만들진 것이었으며, 동그란 쇠뭉치에 긴 줄을 매어 달아 타종을 하였다. 종탑이 없었음으로 교화 앞에 있는 큰 소나무의 높은 가지에 매어 달아놓고 있었다.
이 종의 종지기는 내가 담당하였다. 눈이오나 비가오나 새벽종을 타종하여 울렸고, 주일저녁 수요일 저녁에도 어김없이 타종하여 울렸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전시였음으로 물자가 귀한 탓으로 폐품의 불량한 알미늄으로 주조되었고 기술 또한 부족한 터이라 종에 금가 종소리가 곱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날이 갈수록 깨어진 종소리가 털털거림이 심하여지더니 그 깨어진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조각을 들여다보았더니 빵 속이나 스펀지처럼 기포가 들어있듯 엉성한 조직이었다. 종이 깨어져 나간 후 산골 마을의 곡곡으로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사라지게되어 아쉬웠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함동진의 수필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의 종소리> 전문)
(수필)
연일 맑은 날씨로 하늘은 파랑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였고, 구름 한 점 없는 그 하늘은 코발트빛으로 눈이 부시었다. 고개 숙인 벼이삭은 누릿누릿 황금물결로 일렁이기 시작하고 참새 떼들이 무리를 이루어 바쁘게 들판을 누비고 날아다녔다. 어찌 평화로운 풍경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전선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1952년의 가을이었다.
논산시 부적면 마구평리에 소재한 부적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잊은 채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남자아이들 가운데 런닝셔츠를 걸친 아이들은 몇 안 되고 검정 팬티, 흰 팬티만 입은 아이들이 맨발로 운동 연습에 열중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기다리던 운동회날이다. 모두들 총연습에 돌입했다. 머리에는 각각 흰색과 청색의 띠를 두르고 새 팬티를 입고, 새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그들 중에 운동화를 신지 못한 아이가 한 둘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나였다.
오늘은 기다리던 운동회날, 모든 아이들은 꽁보리밥 도시락, 울긴 감과 찐 고구마 몇 개, 과자, 눈깔사탕 등을 책보자기에 싸서 메고 신나게 학교로 향하였다. 그러나 나는 운동회에 나아가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나의 센 고집을 꺾을 수 없어 1학년인 여동생만을 데리고 운동회에 나가셨다.
아버지께서는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에 개설한 신학교 일로 늘 출타하시고 수요일과 주일에만 집에 계셨다. 6․25전쟁 피난살이 중 약 2년 남짓 보낸 곳이 충곡리교회였는데, 아버지께서 개척하신 교회였다.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란 곳은 백제 의자왕 19년(서기660년)에 당나라 소정방이 10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의 군대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를 침공하므로 계백장군이 결연한 의지로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최후 결전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충곡리 부근 구릉지대까지 퇴패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이곳에는 충곡서원이 있는데 계백장군을 비롯한 사육신 등 충신만을 배향하고 있는 특별한 서원이 있으며 또 가까이에는 그의 무덤이 있고, 백제군(百濟軍)들의 시체를 묻었다하여 시장동(屍葬洞)이란 지명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6․25전쟁 당시 2,3년은 한발이 극심하였다. 충곡리 그 고장이 한발을 가장 많이 겪은 곳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논밭과 민둥산들은 붉게 타 들어가 불모지(不毛地)로 변하여 갔었다. 충곡리 마을 아래로 지척인 곳에 그 당시로서는 한국 굴지의 논산저수지(수문은 탑정리에 있음)가 있었는데도 물 한 방울 끌어올려 쓸 수가 없었다. 전기며, 양수기며, 수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저수지가 바닥이 나도록 물을 끌어다 쓰는 논산벌, 연산벌(황산벌)은 한발을 모르는 기름진 땅이었다.
아버지께서 개척한 충곡리교회의 교인들은 전쟁과 한발 때문에 너무나 빈한한 생활을 하였다. 오히려 우리의 가족들이 서울 피난민으로 등록된 덕택에 배급받아 온 구호양곡인 안남미, 겉보리, 밀 등을 갈아 죽을 쑤어 교인들과 나누어 먹어야할 처지였다.
우리집은 돈 한 푼, 땅뙈기 한 평 없는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집안이었다. 그러므로 운동회날이 왔어도 운동화는커녕 검정고무신 한 켤레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부모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새 운동화 한 켤레 사 주실 것을 조르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운동회에 불참하고 만 것이다.
충곡리에서 부적초등학교가 소재한 마구평리까지는 20리 가량의 거리였다. 학교 가는 길의 절반가량은 대전-연산-논산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있는데 비포장 도로에 자갈을 깐 길이었다. 전쟁 중이어서 미군의 군용차들이 쉴새 없이 황토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곤 했다. 나는 이 길을 거의 맨발로 통학을 하였다.
물자 부족으로 질이 좋지 않은 검정고무신은 생고무 배합량이 적어 힘껏 잡아당기면 찢어지거나 구부리면 부러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통학길이 멀고 자갈길인 국도를 걷고 나면 몇 날이 못되어 검정고무신의 밑바닥은 해져서 마치 뜀박질하다가 지친 개의 길게 늘어진 혓바닥처럼 널름거렸다. 그러면 실을 여러 겹으로 꼬아 밀납을 문질러 먹인 후 검정고무신을 꿰매 신고 다녔지만 길이 험하여 곧 떨어져 너덜거렸다. 몇 차례 그렇게 하다가는 꿰매어 신기 싫어서 아예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다니곤 하였다. 그때에 새로이 등장한 신발이 있었으니, 페타이어를 얇게 켜 발에 맞게 재단하고 밀납 먹인 실로 꿰맨 신종 신발이었다.
고무는 질겼으나 실밥이 닳아 터지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신종 타이어 신발은 값싸고 질긴 반면에 발뒤꿈치를 갉아먹어 물집이 생기고, 허물이 벗겨지고 피가 흐르며 곪기까지 하여 신고 다니기 힘들었다. 차라리 아프라카의 부시맨처럼 맨발로 다니는 편이 더욱 편안하였다.
운동회가 있던 날은 더없이 맑고 좋은 날씨였다. 하늘은 파아란 보석처럼 빛났다. 동생을 데리고 운동회에 가시는 어머니께서는 고구마를 한 솥 씻어 안쳐 주시며 해질녘에 삶으라고 이르시고 가셨다. 저녁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땔감은 논두렁 밭두렁 야산 등지에서 베어 말린 풀을 갈퀴로 긁어모은 것이었다. 아궁이 앞에 지켜 앉아 한줌씩 타는 대로 연속 집어넣으며 부지깽이로 위로 아래로 젓기도 하고 밀어 넣기도 했다. 불장난을 하면 오줌을 싼다는 속담이 있던가? 아궁이 불에 쏘인 나의 얼굴과 몸뚱이는 화끈 달아오르고 느른해지더니 급하게 오줌이 마려웠다. 부엌밖에 나아가 무 배추 심은 밭두둑에 시원히 오줌을 누고 있는데 갑자기 등뒤가 뜨거워 오는 것이 아닌가. 뒤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불길이 부엌을 감싸고 맹렬히 치솟았다. 불이야! 불이야! 소리를 지르니 근처 논에서 일하던 ○○집사께서 논에 달린 둠벙(웅덩이)의 물을 물통에 담아왔으나 이미 부엌은 한줌의 재로 사그라진 후였다. 그 청명하고 파란 보석처럼 빛났던 하늘이 노오랗게 변하여 보였다. 타버린 부엌은 교회와 붙어있는 숙소의 밖에 있었는데 서까래용 나무 몇 개로 얼기설기 덮어 씌워만든 것이었다. 불은 아궁이 앞에 흐트러진 마른 풀더미를 타고 이엉에 삽시간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나는 운동회날 부엌을 태우고 어머니의 마음까지 태운 것이다. 어머니께서 개척교회의 목사 사모로 오지인 충청도 양반골(?충곡리)까지 따라오셔서 핍박과 기근과 싸우며 봉사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마음까지 태우신 것이다. 올갠도 없는 빈한한 교회에서 꾀꼬리같이 아름다운 천사의 음성으로 독창을 하시고 청소년들에게 손수 가르쳐 찬양대를 이끌어 가시더니, 그 다음 해 여름 부황(浮黃)으로 32세 젊은 나이로 요절하셨다. 계백장군이 구국의 일념으로 속을 태우면서 전사한 고장 충곡리를 뒤로하고 내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속을 태우시면서 순교하신 것이다.
지금도 '불이야' 소리만 들어도 어머니의 마음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고, 가을 운동회 철이 다가오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어 불효자 마음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때의 개척자들이 갖은 핍박과 헐벗음과 굶주림의 고난을 겪으면서 기도의 눈물과 함께 뿌린 복음의 밀알이 오늘날 천 배로, 만 배로 결실 하였다. 밤하늘의 뭇 별들처럼 반짝이는 교회의 종탑들이 이 땅위에 우뚝우뚝 무수히 솟아나 있지 않은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 (함동진의 수필 <어머니 마음을 태운 운동회날> 전문)
<수필>
한 인간이 심중을 예리하게 찌르고 남긴 상처가 반세기를 지나도록 아물지 못하고 아직도 골 깊게 남아 아린 상처로 작용하고 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잠시 짬을 얻어 TV 앞에 앉아 시청하다 보면, 느닷없는 함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와 자괴감을 느끼도록 섬칫해진다. 큰 경기장이 메어 터질 정도로 운집한 스포츠 애호가들의 발작에 가까운 몸짓과 괴성은 온통 나를 향하여 비수로, 화살로 꽂히고 창으로 쑤셔대며 조롱하고 희롱하고 멸시하는 것 같이 크로즈업 되어 덮쳐온다. 즉시 채널을 바꾸어 보지만 다른 곳도 역시 광란과 난장판 같은 소란스러움으로 한 술 더 떠셔 직격탄으로 몰려온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정구, 탁구 등의 경기가 동시 다발로 중계되고 있는 것이다. 뉴스 시간 말미에도 모든 채널이 동 시간대에 기관총을 소사 하듯 스포츠 뉴스를 경쟁적으로 내뱉는다. 이 정도면 재빨리 스위치를 끄고 뒤로 물러날 수 빢에 별도리가 없다. 정신조차 아찔하다.
1952년 봄, 6․25 한국전쟁은 극에 달하여 수많은 전상자를 내며 비극을 더하여 가고 있을 무렵, 우리 가족이 피난민으로 찾아든 고장인 충남 논산시의 시골 조그마한 B초등학교에서는 전쟁의 참화가 훑고 지나간 후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각 학년의 학급마다 빈자리가 채워지고 열악한 환경 가운데 UN의 원조로 박아 낸 교과서와 공책을 지급 받아 고마운 마음으로 아껴 쓰며 공부를 하였다. 전쟁 중이어서 거의 모든 학생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영양실조까지 겹쳐 허연 버짐이 낀 몰골로 꾀죄죄한 모습들이었다. 농사를 많이 짓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 모두들 점심을 굶는 처지였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한 사정으로는 학생들이 운동을 하거나 놀이할 기구와 도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학교측에서도 철봉대 하나마져도 제대로 세워주지 못하는 열악한 사정이었다. 돼지 오줌통에 바람을 불어넣어 공같이 만들거나 새끼줄을 둥글게 감아 공 모양으로 만들어 축구 시합을 하였고, 오재미를 만들어 던지기 놀이를 하거나, 나무 도막을 가지고 자치기를 하거나, 나무를 깎아 만든 팽이치기를 하거나, 기마놀이를 하는 것 등이 운동과 놀이의 전부였다.
어느 날 내가 속한 2반(1반과 2반이 있었는데 2반은 남녀 혼합반임)은 학급 회의를 열고, 학급생 전원이 공동 출자하여 축구공을 구입하기로 결의하였다. 구입총액과 모금 기일을 정하여 실행키로 하고 모금이 시작되었다. 나는 형편이 어려워 등하교길 10~20리를 맨발로 다니는 주제에 축구공(이 다 무엇이냐?) 분담금을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학급반 아이들은 ‘목사의 아들이 그 돈도 못 내느냐? 비아냥 조로 조롱하다시피 했고, 심지어는 담임 선생님도 같은 말로 거들었다. 더군다나 못 견딜 것은 여자아이들 앞에서 조롱 당하는 것이 어린 심정이었지만 더욱 창피하게만 느껴졌다.
어찌된 일인지 반장과 몇몇 아이들은 J라는 아이를 시켜 더욱 조롱 조로 욱박질렀다. J는 나보다 20cm는 더 컸고 잘 생긴 남자 아이였다. 평상시에는 별로 말도 없고 얌전한 아이였는데 분담금을 조를 때에는 나를 가난하고 제일 꾀죄죄한 여자아이에게 떠다밀며 수모를 주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주먹을 휘두르려다 참고 안정 자세를 취하자 반장과 몇몇 아이들이 J를 더욱 꼬드겨 나를 가만히 두지 않도록 유도했다. 결국에는 점심 휴식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격투하기로 결론을 내고 말았다. 12시가 되자 서부영화 「하이 눈」의 한 장면처럼 운동장의 복판에 나아가 많은 아이들이 둘러선 가운데 나와 J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결 상태에 들어갔다. 못된 녀석들은 당연히 J의 편이 되어 한방에 KO시키라고 응원하며 조롱하였다. 먼저 J의 주먹이 날아와 나의 안면에 꽂히며 눈 안에서 번개 불 같은 것이 번쩍 튀었다. ‘엣다, 나도 모르겠다.’ 주먹에 온 힘을 가하여 J의 면상 정면에 한 방 날렸다. 이게 웬일인가? J는 나가떨어지더니 코에서 시뻘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구경하던 악동들은 슬금슬금 물러섰고 나는 J를 일으켜 세워 종이로 코피를 닦아주었다. 나의 승리로 끝난 격투였다. 난생 처음의 격투요, 일생 일대의 마지막 결투였다.
나는 그 이후로 축구는 물론 모든 구기 경기를 싫어한다. 슬픈 날에는 둥근 해와 달조차도 축구공으로 보여져 싫어질 정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도 덩달아 싫어졌다. 많은 관중이 운집하여 편을 가르며 승부와 내기와 상금을 걸고 함성을 지르는 스포츠 경기가 싫어졌다. 따라서 스포츠를 다루는 스포츠 잡지나 스포츠 신문도 보기 싫고 그 기사를 읽고 있는 독자까지도 미워졌다.
물론 스포츠를 통하여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국제적으로 국위를 선양한다는 뜻이 있기는 하겠지만, 나로서는 색다른 견해와 안목으로 보게 된다. 88서울올림픽은 숙성되지 않은 샴페인을 터뜨린 것과 같은 모양새다.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이나 종료된 후에도 사치와 낭비와 퇴폐 등이 성행되도록 부추기고 조장되었으며, 먹기 문화와 놀이 문화만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성장만이 치달아 오르는 가운데 국민의 마음과 정신은 숙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진 올림픽 잔치인 까닭에 3D 기피 현상만이 만연하였고, 결과적으로 IMF로 가는 통로가 되어 나락에 이르는 쓴잔을 마시게 했다고 본다. 군사 독재 정권들이 국민의 눈을 한데로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의 정신적 성숙도나 경제적 기반의 형편을 무시하고 스포츠를 부추겼다. 밤낮없이 대형 운동장이나 체육관으로 몰려가 경기에 몰입 환호하며 열광을 하니(다수의 서민과 농민과 저임금의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생산적인 일은 누가 할 것인가? 정신적인 면으로는 이기적이고 승부욕에 치달아 양보와 양해심이 없어지고 육체만이 비육 되는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일확천금의 꿈으로 속은 곪고 겉으로만 화려하게 한 회칠한 무덤 식의 스포츠 왕국을 건설하였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벅찬 기대와 새 희망 속에 새천년이 도래했다. 새천년의 개시 원년인 2천년에는 시드니 오림픽이 있고, 2002년에는 이 땅 위에서, 주최국으로서 월드컵 축구경기를 치르게 되어 있다. 우리의 국토는 물론 지구촌 전체가 온통 열광하며 날이면 날마다 열병을 치를 것이다. 바라건 데 이러한 대형 스포츠 행사가 건전한 국민 정서와 도덕적 정신 함양에 큰 몫으로 기여하며, 생산적으로 기획되어 진행되기를 기대하여 본다.
그 날 이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 J는 어디에 있으며 스포츠를 어떻게 생각하며 보고 있을까? 새천년에는 축구공 하나에 얽힌 한이 풀리고 스포츠와 친근해지면 좋겠다.
해도 달도 이미 아름답게 떠있지 않은가. *(함동진의 수필<주먹한 방에-새 천년에는 한이 풀리려나>전문)
1953년 :
(39세때) 3월24일(음)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친이신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 志士)께서 세상을 뜨셨다.
평생을 10자녀를 위하여, 사회활동을 위하여, 안일할 날이 하루도 없이 수고롭기만 하시던 선친의 서거를 가슴 깊이 슬퍼하였다.
유교와 기독교의 갈림길(송암은 유림이었으며 창현은 기독교인임)에서 넘나들던 부자간의 정신적 갈등 속에서도 창현목사의 교육사업과 교회개척 설립 등 기독교환워운동에 있어서 없는 것 잇는 것 할 것 없이 털어서 뒷밭침 함으로 장자인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앞날을 축복하며 사랑으로 지원하였던 아량 넓으신 분을 사별하신 것이다.
6월 18일 0시를 기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측이 모르도록 극비리에 반공포로(북한인민군)들을 석방하였는데, 말이 석방이지 총격을 받으며 수용소의 철조망을 넘은 논산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은 야반도주의 신세와 다를 바 없었다. 흙탕에 범벅이 되어 찢긴 옷(P.W표 낙인이 된 군복)을 입고, 동이 트는 아침 일찍 보기에도 가련한 5인의 반공포로들이 창현 함태영 목사가 시무하는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에 찾아들었다. 겁과 두려움에 가득차고 허기진 그들은 정부의 조치가 있는 날까지 옷을 갈아 입히고 먹여 따뜻한 보살핌을 받다가 돌아갔다.
7월13일(음6.4) 불신자 청년, 방종하였던 창현 함태영 목사를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목사가 되기까지 그 많은 시련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늘 기쁨 속에서 찬송과 할렐루야 기도로서 봉사하며 목회의 반려자가 되었던 아내 정용옥 여사는 6.25전쟁과 가뭄 기근에 의한 찌든 가난과 굶주림 등에 의하여 영양실조와 병고로 충남 논산군(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농촌집 모퉁이 셋방에서 32세(1921~1953년)의 젊은 나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용옥 여사는 목회의 뒷바라지로 자신의 몸을 돌보고 추스릴 사이도 없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전도와 환원운동 신학강좌로 부여군 귀암면 합송리에 출장중이어서 사모인 정용옥 여사의 임종을 맞지 못하였다. 정여사는 장남 동진에게 " 내가 죽은 후에 동생들을 잘 돌보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셔라"고 유언으로 당부하였다. 남편인 창현 함태영 목사가 홀로되어 목회에 크게 지장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1살, 4살, 5살, 8살, 13살 되는 어린 자녀들을 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뜨고 천사들과 함께 찬송을 불렀다.(운명의 시간이라 아주 나즈막한 음성으로 고요히 불렀다. 그러나 천군천사의 대합창 속에 승천하는 듯 평화로웠다. 아래의 찬송가 가사는 운명시 그 순간 자녀들과 천사들과 함께 부른 찬송가)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합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 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인해함을 항상 찬송합니다
주의 도와주심 받아 이때까지 왔으니
이와 같이 천국에도 이르기를 바라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에 빠진 우리를
예수 구원하시려고 보혈 흘려주셨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맵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천사들의 찬송이 합창으로 들린다며 자녀들에게 천사들의 찬양을 들어보라고 하면서 또 함께 찬송을 부르면서 심장의 박동이 점점 멀어져 갔다.
천사들의 호위와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정용옥 여사의 운명 소식을 듣고 부여에서 신학강좌 도중 급히 달려 왔다.
평상시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낯빛 한 번 변함없었던 목회의 반려자 정용옥 여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니? 주일이면 아름다운 목소리(쏘프라노)로 찬양을 하여 신도들을 은혜롭게 하던 아내, 천사 같기만 하던 정용옥 여사를 떠올리며 두 눈에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다. 아니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저 어린것들을 어찌할꼬? 주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렇게 어려운 시험을 주시나이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와 충곡리그리스동의교회의 두 교회 교인들이 합심하여 꽃상여를 정성 것 만들어 출상을 하였다. 이 때 꽃상여 뒤에는 많은 교인들과 복음중학교학생 그리고 교직원들이 뒤를 따랐고,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모두들 흐느꼈다. 뒤에는 어린 자녀들 사랑하던 신도들, 아끼던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와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 그리고 복음중학교를 남겨두고 주님의 보좌 곁으로 떠나갔다.
정용옥 여사의 유해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3구 아개울방죽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용옥 여사의 장례식준비는 정여사의 운명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달려와 정여사의 눈을 감겨주었던 복음중학교 교감인 김00 목사와 교직원 학생들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의 현00 장로와 교인들,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의 최00 집사(형제 집사), 신00 집사와 교인들, 가족으로는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아우이며 복음중학교재단이사장 태중, 영어강사인 태욱, 여동생 옥기 등 여러분들이 수고를 하였다.
이때에 막내였던 동신(1살 젖먹이 유아)은 논산의 유아원(원장 노00 장로)에 맞겨졌다가 후일 충남 공주의 장로 신00씨 집안에 양자로 입양되어 신00으로 개명하고 장성한 후 충청남도 금산군 소재 금산고등학교 와 충청남도 장항읍의 장항공업고등학교의 지리교사로서 건실한 생활을 하고 있다(1983년 11월 현재).

저용옥 사모의 소천 수개월 전 사진
(시)
&n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