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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4-12 16:47
한민학교(한성신학교, 한국성서신학교) 약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520  

한민학교(한성신학교, 한국성서신학교) 약사
A Short History of Korean Bible Seminary, Hansung Theological College and Hanmin College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한민학교(한성신학교, 한국성서신학교, 이하 한민학교) 한국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과 제휴된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신양리에 위치한 교육부 4년제 대학학력인정교였으며, 1959년 12월 1일에 개교되어 54년만인 2013년 8월 31일에 폐교되었다.

한민학교(Hanmin College)는 ‘대전성서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힐 요한(John Hill) 선교사에 의해서 개교되었다. 첫 수업은 대전광역시 도마동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당 (당시 충남 대덕구 유천면 도마리 성화교회, 심영진 시무. 1958년에 신축된 20평 흙벽돌집)에서 20여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으며, <각주1. 교수진은 힐 요한 부부, 김은석, 심영진, 김태수(통역)이었다.> 이듬해인 1960년에 부산에서 이신이 교수진에 합류하면서 대전역에서 가까운 선화교회(고광석 시무)로 옮겼다가 1961년에 가장동으로 옮겼다. <각주2. 이신은 1959년과 60년 초에 부산문화방송에서 방송설교를 하였고, 67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힐은 1939년에 입국하여 이듬해인 1940년에 체이스 존(John T. Chase, 1936-40)의 선교사역을 인수받아 가을에 목회자양성소를 열었으나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같은 해 11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49년 2월 18일에 돌아와 이듬해에 필운동교회(성낙소 시무)에서 한국기독성서신학교(Korea Christian Bible Seminary)를 개교하였으나<각주3. 교수진은 힐 요한 부부, 성낙소, 최상현(공산군에 납치 후 행불), 백낙준(공산군에 피살)이었다.> 이듬해인 1950년에 발발한 6월 25동란으로 일본으로 피난했다가 서울수복 직후인 11월에 돌아와 장충동의 임대건물에서 신학교를 열었으나 전쟁의 악화로 한 달 만인 12월에 일본으로 다시 철수하였다. 포기를 모르던 힐은 이듬해 1951년 7월 3일에 돌아와 송월동 선교부에서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고, 이후 선교부에 제휴된 여러 고아원들<각주4. 1955년까지 인천의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 대전의 판암동보육원, 대구의 배성보육원, 1959년 이후 대전 선교부의 버지니아 보육원, 부산의 성광원, 논산(연무)의 에덴보육원>의 설립과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1955년에 가정문제로 후임자인 테일러 해롤드(Harold and Ada Taylor) 선교사 부부에게 새로 지은 신학교 건물을 포함한 송월동 선교부 재산을 모두 물려주고, 한국을 떠났던 힐은 중국, 미얀마, 일본, 한국에서 사역했던 제인 키넷트(Jane Kinnett)와 재혼 후 1959년 8월에 부산을 통해서 재입국하여 2개월을 지낸 후, 선교사가 없던 대전에 정착하였다. 1950년대 말까지 부강교회와 선화교회를 설립하는 등 충청과 전라권에서 목회자 육성과 교회개척에 힘을 쏟으며, 수십여 개 교회들을 자신의 영향권아래에 두었던 김은석 목사와 노봉욱 장로<각주5. 논산(연무) 에덴보육원 설립자>가 대전 정착에 큰 힘을 보탰다.

힐은 1961년에 가장동 유등천변의 큰 부지를 매입하여 천막교회를 시작하였고, 선교사 주택, 예배당, 학생숙소 등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은 근로 장학 명목으로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다. 가장동 캠퍼스시대가 열리면서 1962년 3월에 교명을 서울에서 쓰던 한국성서신학교(Korea Bible Seminary)로 바꿨고(당시 테일러가 송월동 선교부 재산을 모두 팔았고, 현 서울기독대학교 캠퍼스 부지와 건물을 매입할 때까지 수년 동안 신학교 운영이 중단되고 있었다.) 이 명칭은 20년간 사용되었다. 이로써 1940년대에 간헐적으로 운영되었던 신학교의 맥을 잇는 동시에 1950년대 기간에 김은석 목사(1963년 1월 21일 소천)의 신화신학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회 영향권 아래 있었던 충청 전라권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한국성서신학교와 힐 요한 선교사의 지도력아래 놓이게 되었다. <각주6. 이때의 교수들은 힐 요한과 제인, 김은석, 심영진, 김태수(통역), 이신, 최요열, 김찬영(통역), 소교민(통역), 래시 딕(Richard and Melba Lash), 김히영(통역), 임춘봉, 이은수, 김치연, 박태규(통역), 최용호, 김성철, 천명화, 프레드 호프만(Fred and Ellie Hoffman), 힐 버지니아(Virginia Hill) 등이었다.> 그의 지도력으로 1960년대에 90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교회를 개척하거나 기존교회들을 섬김으로써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고, 일부는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힐이 재임했던 60년대 기간에 가장동 캠퍼스에는 선교부와 선교사들을 위한 2층 저택과 단층 주택(소실), 학생들이 만든 시멘트블록 교회당과 기숙사와 몇 채의 작은 직원 숙소들 및 고아들을 위한 단층 벽돌슬래브주택이 있었다. 이 가운데 교회당은 교사가 건축될 때까지 60년대 전반기 동안 신학교 원룸강의실로 쓰였다. 힐은 1964년에 최초의 교사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현관이 딸린 사무실 2칸, 교실 2칸짜리 본관건물이었다. 선교사역 30년 주년이 되던 1969년 봄에 본관을 2층으로 올리는 증축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지연되다가 선교사 조 가맨(Joe Garman)과 김찬영의 도움으로 1972년 초여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6월에 힐과 그의 가족은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완전히 접고 모든 사역을 김찬영과 패츄리샤(Patricia) 선교사내외에게 위임하고 귀국하였다. 이때로부터 90년대 말까지 근 30년간 충청과 전라권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김은석과 힐 요한에 이어 김찬영의 지도력아래 놓이게 되었다.

조 가맨은 1967년 가을과 힐 가족의 안식년 기간이었던 1969-70년에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고, 큰 액수의 자금을 모금하여 본관증축공사에 도움을 주었다. 김찬영은 1959년부터 힐의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군에 입대하였고, 1965년 9월 5일에 도미하여 학업을 마치고 1970년 11월 15일 귀국하였으며, 1972년 1월 21일에 제2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김찬영은 힐이 시작한 본관2층의 완공공사뿐 아니라, 3층 증축을 시작으로 70년대와 80년대 내내 부지를 확장하고 교사를 건축하였으며, 그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80년대에는 등록학생 수가 수백 명에 달했고, 캠퍼스 이전과 대학개편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가 나날이 커졌다.

1981년 2월 16일에 학교법인 성령학원과 한성신학교(Hansun Theological College)란 교명으로 모집정원 70명(신학교 40명, 기독교육과 30명)의 4년제 각종학교로 인가(문교 1041.4-133)를 받았다. 교명을 ‘한국성서’의 줄임말인 ‘한성’으로 바꾼 이유는 서울 노원구에 이미 같은 이름의 4년제 각종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종학교 인가를 받기 이전부터 캠퍼스 내에서 보육원(1968년 설립)과 한성고등기술학교(1978년 설립) 및 한성유치원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1983년 10월 5일 교육부로부터 4년제 대학학력인정교로 인가(문교 1020-1646)와 모집정원 60명(야간부 신학교 30명, 기독교육과 30명)이 증원됨으로써 한성고등기술학교가 폐교되고, 유치원만 유지되었다. 1986년 말에 학과증원(주간부 종교음악과, 야간부 사회복지과)과 1987년 말에 모집인원증원으로 입학정원이 총 180명이 되었다. 1998년 9월 8일 이후부터는 고등교육법에 의해 졸업생들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하였다. 이 무렵 그리스도의 교회(총회) 소속 신학과 교수들로는 최용호, 장성우, 김상호, 조동호가 있었으며, 교단발전과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증원증과로 포화상태에 이른 한성신학교는 1986년 말에 충남 논산군 연산면 신양리에 12만평 교지를 확보하고, 1988년 4월 30일에 기공식예배를 드렸으며, 1989년 8월까지 본관 4층, 별관 4층, 기숙사 3층, 운동장 및 주차장을 갖춘 새 캠퍼스로 이전을 완료하였다. 공교롭게도 동년에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제54차 총회 때 불협화음이 있었고, 이듬해인 1990년 2월 한성교역자들의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가 발족되었다. 출신학교별 친목단체인 기목회와 한성교역자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었다. 동년 4월 3일에 협의회 심의위원회가 총회에 가입한 회원들을 제명하였고, 4월 30일 <환원>지가 분리를 발표함으로써 분열이 고착되었으며, 여러 번의 통합을 위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찬영 박사의 영향력아래서 30년간 배출된 수백 명의 졸업생들은 교회성장의 붐을 타고 교회를 개척하거나 기존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으며, 이들을 돕기 위해서 ‘교회개척후원회’가 김찬영, 조동호, 김상호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또 정부의 복지시책에 따라 충남권 최초로 배출된 수많은 사회복지사들이 공무원이 되거나 각 기관에 진출하였다. 음악학과 졸업생들 역시 각자의 지역에 음악학원을 개설하여 학원장으로서 미래의 꿈나무들을 양성하였다. 다수의 졸업생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몇 사람은 정규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각주7. 김찬영 박사 체제에서 교장을 역임한 인물들은 김진문(1982-84), 김찬영(1985-91), 문원섭(1991-94), 이충구(전 공주교육대 학장, 1994-95), 박영배(직무대리, 1995-96), 최찬규(직무대리, 1996-97), 백형린(1997-99) 순이었다.>

학교가 새 캠퍼스로 이전한 1990년대는 대학개편의 기회이자 위기였다. 캠퍼스 이전 초기 수년간은 입학정원 180명을 채우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캠퍼스가 대전권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데다가 무리하게 충원된 교수진과 교직원, 노조설립, 대학개편을 바라는 학생들의 잦은 시위, 대학개편에 필요한 재원부족, 무엇보다도 캠퍼스 이전직후에 터진 내부 갈등은 지루한 법정공방으로 이어져 20여개 이상의 각종대학들 가운데 대학개편 1순위로 꼽히던 학교를 수렁에 빠지게 하였고, 장로교 목사 조준상이 1999년 9월 30일 이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세기가 바뀐 2000년대는 2013년 8월 폐교 때까지 그리스도의 교회와 무관하게 운영되었다.

이로써 30여 년간 한민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았던 김찬영 박사 및 패츄리사 선교사 내외는 내부갈등이 빚은 법적제약으로 학교를 떠나야했고, 1998년 이후로 베트남과 중국 및 북한선교에 진력하였으며, 중국 훈춘에 특수교육학교, 희망외국어학교, 복음식품유한회사(장애자 제빵기술교육 및 간식용 제빵공장), 희망농목개발유한회사(장애아동 재활승마 목장, 가축 목장, 옥수수 콩 경작지)를 설립하였으며, 2014년에는 중국 양포에 장애인, 고아원 및 양노원을 개원하였다. 또한 북한 나진시에 진료소 3곳(신해, 유현, 비파)과 120명을 수용하는 나선고아원을 헌당하였으며(2006년 5월 17일), 선봉시에 빵공장을 건립하여 매일 수천 명의 아이들에게 빵과 콩우유를 공급하고 있으며, 신해 목장과 유치원 2곳 및 탁아소 2곳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도 부모 없는 북한 청소년수용기술학교와 비즈니스텔을 건설 중에 있다.

조준상 목사는 교장 내정자 원동연 박사(2000년 2월 14일 교장에 취임)와 더불어 1999년 10월 28일 이사장 취임식을 겸한 ‘가칭 한국대학교 설립 감사예배’와 여러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직후,<각주8. 이때 설립자 힐 요한, 재단법인 크리스챤밋숀 이사장 노봉욱도 초대되었다.> 기독교교육과를 폐과시켰고, 증과 및 증원을 통해 입학정원을 280명으로 늘리는 한편, 다수의 교수충원과 시설보수에 재원을 투입하였으나 대학개편자금이 없어 실패하였고, 원동원 박사는 직접 영입한 교수들과 함께 중도 사퇴하였다.<각주9. 원동연 박사는 교장 내정 직후 학과를 신설하고(국제관광학과 주간 40명, 야간 30명, 테크노경영정보학과 40명), 학생을 증원(국제사회복지학과 주간 10명, 신학과 야간 10명)하였으며. 이듬해 2월 14일 교장에 취임한 다음 멀티미디어학과와 생명식품공학부를 추가로 증과하였다.>

2000년 12월 21일 학교법인 성령학원 및 학교명 한성신학교가 각각 한민족학원 및 한민학교로 변경되면서 한성신학교로써 20년간 쌓아온 명성을 잃게 되었고, 학생수 감소와 부실운영 등으로 재정난은 날로 커져갔으며, 학과와 정원에 대한 재편이 불가피하였다.<각주10. 2001년 1월 4일에 국제사회복지학과를 사회복지학과로 다시 변경되었고, 2003년 6월 12일 레저스포츠경영학부가 신설되었으며, 2005년 10월 20일 레저스포츠경영학부 레저스포츠경영학전공이 스포츠경영학과로, 경찰경호행정학전공이 경찰행정학과로 변경되었다.> 이 와중에도 2004년 2월 27일자로 기관장 명칭이 교장에서 총장으로 바꿨다.

2001년에는 한민학교를 기반으로 세계사이버대학이 설립되었다. 이후 두 학교는 한민족 어린이 문화 축제, 한민족친선 문화축제 등에 동원되었다. 2006년 미국 LA에서 개최된 제1회 한민족 국제학술대회를 시작으로 전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초청된 가운데 2008년 10월 첫 주에 국제환경포럼, 국제평화포럼, 국제대학자선축구대회, 국제할렐루야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008년 12월 12일에는 황산벌전투 최후전적지비가 한민학교 평화의 동산 앞에 세워졌다. 2009년 제2회 한민족 평화포럼, 2010년 제7차 한민족 국제학술대회, 터키에서 제8차 한민족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고, 2010년 3월에 한글사랑 세계사랑본부가 출범되었다. 2010년 10월에는 제2회 한민세계신학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와 같은 학술대회들의 논문집 및 결과집들이 출판되었다.

한민학교는 야구부와 축구부가 운영되고 있었다. 국제할렐루야대회 준비와 때를 맞춰 캠퍼스 정비와 함께 운동장이 인조잔디구장으로 변모되었다. 건물은 낡은 채 처음 그대로였지만, 대강당과 본관 1층이 큰 행사들을 치르면서 리모델링되었고, 폐교 직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정돈되고 잘 가꿔진 넓은 캠퍼스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위한 내실이나 교육의 질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외행사에만 치중함으로써 극심한 경영난과 학생감소를 겪었고, 2011년 말에는 다시 한민문화예술학교로의 개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잦은 학과변동 속에서도 폐교 때까지 살아남은 학과들로는 신학과, 사회복지학과, 음악학과, 경찰행정학과, 스포츠경영학과, 태권도외교학과, 글로벌새마을학과, 한민족전통문화예술학과, 액션영화학과, 재활승마학과가 있었다. 뒤쪽의 네 개 학과는 폐교 직전에 증과된 것들이다.

2012년 한민학교에 대한 다각도의 종합감사가 이뤄졌고, 2013년 5월 29일 교육부는 학교법인 한민족학원이 신청한 한민학교 폐교신청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한민학교는 8월 31일 자로 폐교하였고, 재학생은 타 대학교 유사 학과에 특별 편입학하였다.<각주11. 조준상 체제에서 총장을 역임한 인문들로는 원동연(2000-01), 장성우(직무대리, 2001), 심태섭(2001-05), 최찬규(직무대리, 2005), 김병우(전 홀트아동복지회 회장, 2006-2008), 조준상(2008-12), 박영술(직무대리, 2013) 순이었다. 학교설립이후 재단법인 한국 크리스챤밋숀 이사장으로는 힐 요한(64-75년), 김 패츄리사(75-76년), 힐 요한(76-77년), 워릭 밥(78-81년), 김찬영(81-89년), 학교법인 이사장으로는 성완용, 김 패츄리사, 김찬영, 전영권, 조준상, 심정지(폐교 결정) 등이었다. 이 시절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교수로 남았던 조동호는 김병우 총장과 조준상 총장 재임 때 부총장으로 재직하다가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와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서 2008년 12월 말에 희망퇴직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는 한성신학교를 잃은 아픔을 딛고, 학교의 50년 전통과 뿌리를 잇고, 목회자 수급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미 법인과 교명이 변경된 때로부터 총회직영 한성신학교를 대전광역시 동구 용전동 총회회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총회 소속 수십 명의 목회자들이 이 총회직영 한성신학교를 통해서 배출되었다.

관련어: 한민학교(Hanmin College); 한성신학교(Hansung Theological College); 한국성서신학교(Korea Bible Seminary).

참고문헌: 노봉욱 편저. <힐 요한 선교사의 한국 선교> 재단법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유지재단, 2006 • 박대순 저. <간추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 오늘의문학사, 1998 • 조동호 지음. <힐 요한 선교사>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http://kccs.info),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