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기 목사
이난기(李蘭基) 목사는 1941년에 회갑이었고, 1949년에는 68세였으므로
1881년생이었을 것이다. 이난기는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1년 11월 29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남감리교회에 포교계가 계출되었고<조선총독부 관보, 제2525호 10면(大正10年 1月 14日)>, 1922년 11월 4일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에 포교자거주지이전계가 계출되었으며<조선총독부 관보, 제3080호 6면(大正11年 11月 16日)>, 1923년
11월 1일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 361번지에서 포교폐지계가 계출되었다<조선총독부 관보, 제3403호 7면(大正12年 12月
15日)>. 1923년에 이난기 목사의 포교폐지계가 계출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는
3·1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이고, 그 지역 사람 18명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곳이다. 그리고 1923년은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서 9월 1일부터 3-4주에 걸쳐서 재일조선인 수천여명이 억울하게 살육을 당한 해이다.
그러고 나서 이난기 목사를 위해서 포교계를 계출한 곳은 남감리교회가 아니라 ‘기독교회 조선선교회’였다. ‘기독교회 조선선교회’ 목회자들의
대다수가 성결교 출신이었던 만큼, 감리교 출신 목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교회(기독교회 조선선교회)에서 목회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이난기가 ‘기독교회 조선선교회’ 서울 제2교회를 개척한 때는 1923년 포교폐지를 당한 지 13년만인 1936년 곧 50대
중반 때였다. 1936년 말까지 서울에는 2개 교회만 있었다. 이난기는 개척교회를 위해 선교부의 지원 없이 건물을 구입하였고, 건물에 챙을
덧대어 사람들이 마당에까지 앉을 수 있도록 집회장소를 넓혔다<도쿄 그리스도인(1936년 5월호)>. 그의 포교계가 계출된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아현정 429의 4번지였고, 1937년 11월 13일이었다<조선총독부 관보, 제3019호 5면(소화12년 2월
9일)>. 그리고 1938년 8월 25일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구 염리정 3의 53번지로 포교담임자선정계가 계출되었다<조선총독부 관보,
제3567호 5면(소화13년 12월 8일)>.
1941년 4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된 새로운 종교법 때문에 선교후원이 불가능해지자 요츠야선교부는
이난기에게 9개월 치 임대료인 190엔을 한몫에 보내주었는데, 교회는 이 돈에 700엔을 보태 빚 890엔을 모두 갚고 예배당을 구입하였다. 또
회갑을 갓 넘긴 이난기 목사는 교회가 자신에게 사례비로 매월 20엔을 주고,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지만, 자신은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고맙다는 인사편지를 선교부에 보냈다. 이난기 목사는 이 약속을 굳건히 지켰다. 도쿄 요츠야선교부는 이난기의
목회사례를 매우 고무적인 본보기로 여겼다<도쿄 그리스도인(1941년 5월호)>.
그리고 1944년 9월 30일 염리정교회 포교담임자가 이난기에서 유지욱으로 바꿨다<조선총독부 관보, 제5353호 1면(소화19년
12월 7일)>. 이난기 목사가 또 다시 포교를 폐지당한 것이 1943년 9월 17일 ‘기독교회 조선선교회’ 제2대 포교관리자가 된
신신근(平山武雄)<조선총독부관보, 5020호, 14면(소화18년 10월 23일)>이 주도했을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난기 목사는 해방 후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고, 1948년에 이난기와 그의 용산교회가 존 T. 채이스(John T. Chase)의
‘기독교회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에 합류하였다<"The Year 1948," The Korean
Messenger(KM), March 1949: 1>. 채이스가 1948년 10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까지 한국에 체류할
당시에 이난기는 만 68세였고, 신약성경교회에 대한 신념도 확고하였다. 용산교회는 탄탄한 교회로서 불교사원으로 일본인이 건축한 건물에서 모였다.
정부로부터 임대하여 사용하였다. 채이스가 처음 방문해서 느낀 용산교회의 특징은 남녀가 구별된 자리에 앉았는데 한국의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여성신도 숫자보다도 남성 신도가 더 많다는 점이었다<“May I Introduce to You,” KM, March 194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