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삼 목사는 1928년 3월 23일(음력)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1933년 4월 여섯 살 때에 묘산면 관기리에 있는 교회를 어머니를 따라 간 것이 믿음생활의 시작이었다. <어머니가 병에 들었으나 약도 없고 나을 길이 없어 점쟁이를 찾았는데, "당신은 큰 신(神)을 믿어야 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하루는 꿈에 외국인이 나타났는데, 윗마을 교회에 찾아가서 보니, 강단 옆 벽에 걸린 예수님이 바로 꿈에 본 그분이었다. 그때부터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교회 가는 것이 즐거워서 8킬로미터나 떨어진 교회를 일 년을 열심히 다녔더니, 일 년 후 알게 모르게 병이 다 나아 버렸다. 한편 아버지가 큰 외삼촌의 보증을 섰다가 집안형편이 심히 어렵게 되었으나 어머니는 맥추헌금을 넉넉히 작정하였다.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겁도 없이 헌금을 많이 작정하였다고 비방하였다. 하루는 박점상 목사가 아버지가 만들어준 지개를 지고 어머니를 따라 산에 올라갔다가 싸리버섯을 발견하였는데, 두 번에 나눠서 가져와야할 만큼 양이 많았다. 장날에 내다 팔았더니 작정한 헌금을 내고도 돈이 남았다.>
1937년 2월 열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도(東京都) 아다지(足立區)에 위치한 큰 강 건너 꽤 먼 거리의 일본인 교회를 출석하였는데, 그 교회는 매주일 성만찬을 거행하는 교회였다. 일본에서는 교파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기리스도노 코오카이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통칭하고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침례와 매주 성찬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 누님 댁으로 이사를 들어갔다. 그런데 주변에 교회도 없고 큰 누님은 믿지 않는 분이라 핍박이 있어 주일마다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어머니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교회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하루는 김은석 목사(당시 조사)가 우연히 찾아와 도쿄에서 아주 먼 거리에 위치한 야마구찌현(山口) 도구야마시(德山) 가스가조(春一町) 8032번지를 소개해 주었다. 그곳으로 이사하여 갔더니, 몇 가구가 함께 사는 교회당이었는데, 마침 두 개의 빈 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정착하였다. 그곳 교인들이 예배당을 따로 짓기로 결정하고 건축을 시작하였는데, 박점상 목사의 모친은 소다제조회사에 다니며 돈을 모아 다른 성도들보다 훨씬 더 많은 벽돌을 헌납하였다.
이때부터 김은석 목사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이때의 김은석 목사의 이름은 일본말로 간다긴세기 신전 은석이었다. 별명은 합바지(무명 바지) 조사(전도사)였고, 시모노새끼(하관), 아사(김주일 전도사 거주), 덕산(박점상 거주), 동경지방 등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다.

<김은석 목사 가족(1958년 4월 15일)>
김은석 목사가 유명해지는 한편, 일본은 대동아 전쟁 때부터 교회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였고, 목사들을 미국의 스파이로 의심했던 일본당국은 요주의 인물로 김은석 목사를 꼽았다. 김은석 목사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예배 시작 전에 현인신(現人神)으로 믿는 일본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를 거부하였으므로 이 또한 문제가 되었다. 한번은 교회입구 통로에서 잡으러 온 왜경과 김은석 목사가 어깨를 서로 마주치고 지나친 적도 있었다. 이후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김은석 목사는 박점상 목사 가족과 함께 도쿄에 집을 얻어 이사하였다. 노동을 하면서 한 집에서 방 하나씩 차지하고서 김은석 목사, 박점상 목사 가족, 최창신 전도사와 그녀의 외손녀 히로코(홍자) 세 가족이 함께 살았다.

<김은석 목사와 함께>
박점상 목사는 김은석 목사가 한국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귀국하면서 헤어지게 되었고, 동경교회를 다니다가 18살에 해방이 되어 김은석 목사의 주소를 들고 서울로 나왔으나 혼잡한 기차에 오르면서 지갑(수첩)을 도난당하여 찾지 못하고 고향 합천으로 갔다가 다시 김은석 목사를 찾아 김제군 망경읍으로 갔다.
박점상 목사는 한국에 나오면서 김은석 목사가 맡겨둔 짐 가운데 무거운 것은 가져오지 못하고 코트와 의류만 챙겨왔다. 책은 왜경이 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남지 않았다. 박점상 목사는 망경읍에서 담임목사의 도움으로 주소는 모르지만 김은석 목사가 서울에서 300만 부흥운동의 부흥사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워 편지를 쓰고 받는 이의 주소를 무작정 "서울 김은석 목사님 귀하"라고만 써서 부쳤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몇 날이 못 되어(1946년) 김은석 목사로부터 망경읍에서 40여리 떨어진 마채본 집사의 딸집에서 동짓날 만나자는 답신이 왔다. 그러나 김은석 목사는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고 대신 다른 사람이 와서 김은석 목사의 소식을 전하였다.
김은석 목사 가족이 서울 북아현동에 있을 때 박점상 목사는 이웃에 방을 얻어 살았다. 김은석 목사가 아직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기 이전인지라 재건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들을 탐색하였는데, 자신의 신앙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1946년 박점상 목사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김은석 목사는 비록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운동에서는 자신과 뜻이 맞지 않지만, 침례와 성만찬 등의 교리가 성서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박점상 목사는 1947년 부강으로 내려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일하며 부강교회 건축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49년 4월 금강에서 침례를 받자마자, 정찬성 목사가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세운 외령교회(지철희 목사의 누님 집. 당시 지철희 목사는 12세 정도의 소년이었음. 후에 박점상 목사가 전남 평산 처가 마을의 정귀남 집사의 딸을 지철희 목사에게 소개함)를 개척하여 섬기다가 신탄진 교회로 옮겨가자, 박점상 목사가 외령교회 2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였고 후에 수룡교회를 개척하였다. 1950년 6.25 동란 때 고향 합천으로 피난하였다가 1950년 9.28 수복 후 외령교회로 돌아갔으며, 1951년 1.4 후퇴 때 다시 합천으로 피난하였으나 살길이 막막하여 합천 세무서에서 8월까지 일하다가 김은석 목사가 이동 중에 징집 당하지 않도록 힐 요한 선교사를 통해서 미 8군 종교담당자의 이름으로 통행증을 편지에 동봉하여 보내주었으므로 광주로 김은석 목사를 찾아가 그곳 성경연구회(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 함창현 목사 등이 운영)에서 공부하던 자매 정규님과 김은석 목사의 중매로 1951년 8월 13일(음력) 결혼하여 전남 평산리 처가에 신접살림을 꾸렸다.
한편 처가 근방에 있는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니던 10여명의 성도들이 평산리에 있었는데, 교회가 30여리나 떨어져 있다 보니까 교인들이 박점상 목사가 목회하다 온 줄로 알고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하여 힐 요한 선교사에게 개척자금을 요청하였더니, 얼마간의 돈을 보내주었다. 이에 박점상 목사는 신흥교회를 오가면서 눈여겨 보아둔 주포의 빈 집을 사서 그 재목을 배로 운반하여 처가가 내준 땅에 평산리 교회를 건축하여 개척하였다. 그 후 얼마 못되어 충북 청원군 강서면 송절리라는 곳에 이성화 장로가 교회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문암교회의 전신)로 환원하자 부임하여 섬기다가 다시 이성화 장로가 교회를 가지고 침례교회로 넘어감으로써 사임하였다. 얼마 있다가 1953년에 힐 요한 선교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 마중 나온 힐 요한 선교사의 차를 타고 도강증 없이 한강을 건너 장충동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을 공부하였다. 1956년에 대전 침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식구가 일곱 명이나 되었음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소개한 평택 서정리에 김은석 목사의 큰 동생 집에서 서정리 침례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온양 온천 침례교회를, 후에 장항교회를 1960년 졸업 때까지 섬겼다.

<박점상 목사의 대전 침례신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나서 (좌측부터 박점상 목사, 김은석 목사, 김완례 사모) 참고로 이 건물은 1957년 11월에 완공되었으며, 박점상 목사는 1956에 입학하여 1960년 초에 졸업하였다.>
침례신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이 많아 받아 주는 교회가 없고, 가족부양도 문제인데다가 목회하면서 생활에 얽매이면 삯꾼 목회자가 될 것이라 믿어 목회를 그만 두고 대전에서 기술자를 두고 시계방을 운영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습득하였고, 서울 남대문에서 노점상과 업자를 상대로 시계를 수리를 하던 중에 노동청이 시행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시계수리1급자격증을 받았으며, 1967년 성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신인 남산동 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고 (이때 김규상 목사 안수 받음) 재무로 시무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회를 조직하여 총무를 맡아 보았고, 1982년에는 생활의 기반을 잡은 후여서 지온어린이집의 부속 교회에서 장로로서 무보수로 목회를 하다가 1983년 1월 남부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홍제 그리스도의 교회의 어떤 교인이 구입했던 교회를 최윤권 목사가 재구입하여 교회를 지속되게 함, 후에 교회가 자금을 마련하여 최윤권 목사로부터 실비로 매입함)로 옮겼고, 1983년 3월 14일 목사 안수를 받고 이원로 목사와 함께 협동목사(이때 명목상의 담임목사는 최윤권 목사였음)로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담임하였으며, 원로목사로 섬기다가 2024년 1월 20일 별세하였다(모신 곳: 파주 크리스천 메모리얼 파크).
서울기독대학교 법인이사로 36년간 섬겼고, 동 대학교에서 2009년 8월 24일 선교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현재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 이사로 섬기고 있다. 사모 정규님과 더불어 혜숙 목사(전대웅 목사 사모, 방글라데시 선교사) 성희, 성숙, 혜자, 정숙, 정회, 남숙, 남희를 두었다.<2010년 10월 26일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에서 인터뷰>

<명예 선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앞에서 맏사위 정대웅 목사와 함께>
박점상 장로/목사(1928.03.23음력-2024.01.20) 박점삼은 1928년 3월 23일(음력)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1933년 4월 여섯 살 때에 묘산면 관기리에 있는 교회를 어머니를 따라 간 것이 믿음생활의 시작이었다. 어머니가 병에 들었으나 약도 없고 나을 길이 없어 점쟁이를 찾았는데, “당신은 큰 신(神)을 믿어야 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하루는 꿈에 외국인이 나타났는데, 윗마을 교회에 찾아가서 보니, 강단 옆 벽에 걸린 예수님이 바로 꿈에 본 그분이었다. 그때부터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교회 가는 것이 즐거워서 8킬로미터나 떨어진 교회를 일 년을 열심히 다녔더니, 일 년 후 알게 모르게 병이 다 나아 버렸다. 한편 아버지가 큰 외삼촌의 보증을 섰다가 집안형편이 심히 어렵게 되었으나 어머니는 맥추헌금을 넉넉히 작정하였다.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겁도 없이 헌금을 많이 작정하였다고 비방하였다. 하루는 박점상이 아버지가 만들어준 지개를 지고 어머니를 따라 산에 올라갔다가 싸리버섯을 발견하였는데, 두 번에 나눠서 가져와야할 만큼 양이 많았다. 장날에 내다 팔았더니 작정한 헌금을 내고도 돈이 남았다.
1937년 2월 열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도(東京都) 아다지(足立區)에 위치한 큰 강 건너 꽤 먼 거리의 일본인 교회를 출석하였는데, 그 교회는 매주일 성만찬을 거행하는 교회였다. 일본에서는 교파이름을 쓰지 않고 ‘기리스도노 코오카이’(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통칭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침례와 매주 성찬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 누님 댁으로 이사를 들어갔다. 그런데 주변에 교회도 없고 큰 누님은 믿지 않는 분이라 핍박이 있어 주일마다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어머니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교회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하루는 김은석 조사(전도사)가 우연히 찾아와 도쿄에서 아주 먼 거리에 위치한 야마구찌갱(山口峴) 도구야마시(德山) 가스가조(春一町) 8032번지를 소개해 주었다. 그곳으로 이사하여 갔더니, 몇 가구가 함께 사는 교회당이었는데, 마침 두 개의 빈 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정착하였다. 그곳 교인들이 예배당을 따로 짓기로 결정하고 건축을 시작하였을 때, 박점상의 모친은 소다제조회사에 다니며 모운 돈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벽돌을 헌납하였다. 이때부터 김은석 목사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이때의 김은석의 이름은 일본말로 간다긴세기 신전 은석이었다. 별명은 합바지(무명 바지) 조사(전도사)였고, 시모노세키(하관), 아사(김주일 거주), 덕산(박점상 거주), 동경지방 등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다. 김은석 목사가 유명해지는 한편, 일본은 대동아전쟁 때부터 교회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였고, 목사들을 미국의 스파이로 의심했던 일본당국은 요주의 인물로 김은석을 꼽았다. 김은석은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예배 시작 전에 현인신現人神으로 믿는 일본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를 거부하였으므로 문제가 되었다. 한번은 교회입구 통로에서 잡으러 온 왜경과 김은석이 어깨를 서로 마주치고 지나친 적도 있었다. 이후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김은석은 박점상 가족과 함께 도쿄에 집을 얻어 이사하였다. 노동을 하면서 한 집에서 방 하나씩 차지하고서 김은석, 박점상 가족, 최창신 전도사와 그녀의 외손녀 히로코(홍자) 세 가족이 함께 살았다. 박점상은 김은석이 한국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귀국하면서 헤어지게 되었고, 동경교회를 다니다가 18살에 해방이 되어 김은석의 주소를 들고 서울로 나왔으나 혼잡한 기차에 오르면서 지갑(수첩)을 도난당하여 찾지 못하고 고향 합천으로 갔다가 다시 김은석을 찾아 김제군 망경읍으로 갔다. 박점상은 한국에 나오면서 김은석이 맡겨둔 짐 가운데 무거운 것은 가져오지 못하고 코트와 의류만 챙겨왔다. 책은 왜경이 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남지 않았다. 1946년 박점상은 망경읍에서 담임목사의 도움으로 주소는 모르지만 김은석이 서울에서 300만 부흥운동의 부흥사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워 편지를 쓰고 받는 이의 주소를 무작정 “서울 김은석 목사님 귀하”라고만 써서 부쳤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몇 날이 못 되어 김은석으로부터 망경읍에서 40여리 떨어진 마채본 집사의 딸집에서 동짓날 만나자는 답신이 왔다. 그러나 김은석은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고 대신 다른 사람이 와서 김은석 목사의 소식을 전하였다. 김은석 목사 가족이 서울 북아현동에 있을 때 박점상은 이웃에 방을 얻어 살았다. 김은석이 아직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기 이전인지라 재건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들을 탐색하였는데, 자신의 신앙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1946년 박점상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김은석은 비록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운동에서는 자신의 뜻과 맞지 않지만, 침례와 성만찬 등의 교리가 성서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박점상은 1947년 부강으로 내려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일하며 부강교회 건축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49년 4월 금강에서 침례를 받자마자, 정찬성 목사가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세운 외령교회(지철휘 목사의 누님 집. 당시 지철휘는 12세 정도의 소년이었음. 후에 박점상이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처가 마을의 정귀남 집사의 딸을 지철휘에게 소개함)를 개척하여 섬기다가 신탄진 교회로 옮겨가자, 박점상이 외령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후에 수룡교회를 개척하였다. 1950년 6.25 동란 때 고향 합천으로 피난하였다가 9.28 수복 후 외령교회로 돌아갔으며, 1951년 1.4 후퇴 때 다시 합천으로 피난하였으나 살길이 막막하여 합천 세무서에서 8월까지 일하다가 김은석 목사가 이동 중에 징집 당하지 않도록 힐 요한 선교사를 통해서 미8군 종교담당자의 이름으로 통행증을 편지에 동봉하여 보내주었으므로 광주로 김은석을 찾아가 그곳 신화신학 성경연구회(김은석, 이신, 창현 함태영 등이 운영)에서 공부하던 자매 정규님과 김은석 목사의 중매로 1951년 8월 13일(음력) 결혼하여 전남 평산리 처가에 신접살림을 꾸렸다. 한편 처가 근방에 있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니던 10여명의 성도들이 평산리에 있었는데, 교회가 30여리나 떨어져 있다 보니까 교인들이 박점상이 목회하다 온 줄로 알고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하여 힐 요한 선교사에게 개척자금을 요청하였더니, 얼마간의 돈을 보내주었다. 이에 박점상은 신흥교회를 오가면서 눈여겨 보아둔 주포의 빈 집을 사서 그 재목을 배로 운반하여 처가가 내준 땅에 평산리교회를 건축하여 개척하였다. 그 후 얼마 못되어 충북 청원군 강서면 송절리라는 곳에 이성화 장로가 교회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문암교회의 전신)로 환원하자 부임하여 섬기다가 다시 이성화 장로가 교회를 가지고 침례교회로 넘어감으로써 사임하였다. 얼마 있다가 1953년에 힐 요한 선교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 마중 나온 힐 선교사의 차를 타고 도강증 없이 한강을 건너 장충동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을 공부하였다. 1956년에 대전침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식구가 일곱 명이나 되었음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소개한 평택 서정리에 김은석의 큰 동생 집에서 서정리침례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온양 온천침례교회를, 후에 장항교회를 1960년 졸업 때까지 섬겼다. 침례신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이 많아 받아 주는 교회가 없고, 가족부양도 문제인데다가 목회하면서 생활에 얽매이면 삯꾼 목회자가 될 것이라 믿어 목회를 그만 두었다. 그러고 나서 대전에서 기술자를 두고 시계방을 운영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습득하였고, 서울 남대문에서 노점상과 업자를 상대로 시계를 수리를 하던 중에 노동청이 시행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시계수리1급자격증을 받았다. 1967년 성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신인 남산동 교회에서 장로안수(이때 김규상 목사 안수 받음)를 받고 재무로 시무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회를 조직하여 총무를 맡아 보았다. 1982년에는 생활의 기반을 잡은 후여서 지온어린이집의 부속 교회에서 장로로서 무보수로 목회를 하다가 1983년 1월 남부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로 옮겼다. 남부중앙교회는 홍제 그리스도의 교회의 어떤 교인이 구입했던 것을 최윤권 목사가 재구입하여 교회가 지속되게 하였고, 후에 교회가 자금을 마련하여 최윤권 목사로부터 실비로 매입한 교회였다. 1983년 3월 14일 목사 안수를 받고 1950년대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한 이원노(로) 목사와 함께 협동목사로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담임하였다. 이때 명목상의 담임목사는 최윤권이었다.
박점상 목사는 서울기독대학교 법인이사로 36년간 섬겼고, 동 대학교에서 2009년 8월 24일 선교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현재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 이사로 섬기고 있다. 사모 정규님과 더불어 혜숙 목사(전대웅 목사 사모, 방글라데시 선교사) 성희, 성숙, 혜자, 정숙, 정회, 남숙, 남희를 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