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건 장로의 신앙체험기 - 자료모음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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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건 장로(1938.5.15- )
오재건 장로는 대전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그리스도의 교회, 대전교회와 성화교회의 창립멤버이자 공로자이다. 16살 때인 1953년 대전교회가 가정에서 시작될 무렵부터 출석하였다. 1952년 15살 때 부친을 여윈 14대 종손이었지만, 교회를 출석하면서부터는 제사를 거부하는 예수쟁이로 소문이 났고, 군에 입대해서도 온갖 핍박을 견디며 교회에 출석하여 목사라는 별명을 얻고,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섬겼다. 극심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주경야독하였고, 모친께 효도하며 동생들을 보살펴 노인회의 추천으로 효자 상을 받기도 하였다.
집안의 어른들이 14대 종손이 되어 제사를 거부하는 예수쟁이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심하게 핍박하였으나 포기하지 않고 전도하여 입교한지 9년 만에 모친을 시작으로 친인척들을 모두 구원시켰고, 집안에서 목회자와 교회의 중직들이 배출되게 하였다. 그는 입교한 날로부터 미신을 타파하고 철저하게 주일을 지켰으므로,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주일날에는 품을 팔러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물질의 복을 주셨고, 수많은 신앙체험들을 갖게 하셨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1999년에 작성한 신앙 체험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에 실려 있다.

오재건은 대전교회가 천막교회, 흙담교회, 20평 흙벽돌교회, 33평 시멘트블록교회로 바뀔 때마다 앞장서서 건축 일에 헌신하였고, 28년간 출석하는 동안 주일학교 교사, 구역예배 인도자, 네 번의 교회당 건축, 재무, 염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나 대전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회재산의 공동소유화 및 재정관리의 합리화를 건의하였다가 담임목사의 반발로 갈등을 빚던 중 1981년에 이미 9년 전에 대전교회를 떠났던 방봉권, 임춘자, 정삼규 등, 옛 교우들과 재결합하여 탁구장으로 사용했던 큰 도로가 사택 2층에 성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자를 모신 후 발전시켜 나갔다. 1983년 5월 20일에는 3층으로 확장하여 2층은 사택 20평 교육관 20평으로 쓰고 3층 40평을 본당으로 사용하다가 건평 약 250평을 새로 건축하여 1992년 6월 20일 헌당하였다.
이밖에도 오재건은 교파를 초월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국내의 여러 교회들과 미국,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키르기스스탄, 타지크스탄, 필리핀, 미얀마, 태국, 베트남, 대만, 중국 등 해외의 많은 나라들에서 ‘사랑의 터치’라 일컫는 일종의 의료봉사를 통해서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쳤으며, 200여개 교회들의 전도활동에 큰 유익을 끼쳤다. 그는 또 1977년 봄에 정일호 목사가 충주시 교현동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당시, 교현동 산등성이에 대지 60평, 건평 25평되는 건물을 매입할 수 있는 자금을 헌금하였고, 이 건물은 오랫동안 충주교회의 교육관으로 쓰였다. 동년에 부강교회에 남아있던 147평의 대지가 소송에 휘말려 빼앗기게 되었을 때 소송비를 부담하여 승소판결을 받게 하였고, 소유권자인 김태수 목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갈 당시 등기관리자로 있다가 연이어 부지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재단법인 크리스챤 밋숀에 넘겼다. 또 경북 영신 근처 상원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될 당시 200평대지 구입을 주선하였고, 성화교회의 일부 성도들과 함께 상원교회당과 사택의 벽을 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