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석(김주일) 목사(1906-) 김명석의 본명은 김주일이다. 그는 1931년 25살 때 일본에 건너가 부인 구봉림과 함께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가까운 바닷가 ‘야마구치갱(山口峴) 아사’라는 동리에서 살았다. 그는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26회 언급되었다. 그가 김은석을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30살 때인 어느 주일날 아침 일본 산구현(山口峴)교회에서였다. 그날 김은석은 초청강사였다. 이후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늘 붙어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해방 후 경남 밀양에 가까운 예림이란 곳에 자리를 잡았으나 김은석을 추종하였으므로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이 무렵 자녀를 갖지 못한 김은석에게 둘째 아들 김성철(1938.5.17-)을 1948년에 때 양자로 넘겼다.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고,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1955년 후반기에 경남 통영군 도산면 도선리 1구 그리스도의 교회를, 1957년에는 충북 청주 영운동 교회를 섬겼다.
본명은 김주일이다. 부인 구봉림씨와 함께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가까운 바닷가 야마구찌 갱, 아사라는 동리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김성철 목사가 태어났다. 김은석 목사의 성서메모에서는 김주일(1953년 8월 28일 전남 강진군 군동면 연화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과 김명석(1957년 7월 4일 청주 영운동 회당에서)이란 이름이 모두 발견되고 있다. 최용호 목사의 박정자 사모의 증언에 의하면, 김주일과 김명석은 동일인이며, 김은석 목사와 늘 함께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고 한다.
종가 집에서 태어난 김명석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20세 때였다. 종가 집의 종손이기는 하였어도 국문을 몰라 글을 터득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았다가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 때 교회에서 얻은 책이 신구약전서였는데, 열심히 그 책을 읽다가 보니 조금씩 글을 읽게 되었다.
김명석은 1931년 25살 때 돈을 벌기 위해서 일본에 건너가 광산과 노동판을 전전하였다. 1936년 나이 30살 때인 어느 주일날 아침에 산구현(山口峴) 교회란 곳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 아침에는 담임 목사가 설교하지 아니하고, 초청강사인 김은석 목사가 하였다. 그런데 김은석 목사의 말씀이 어찌나 은혜가 되던지 그를 놓칠 수가 없어서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복음의 일을 하겠다고 간청하여 함께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김명석이 5년 동안 번 돈으로 집을 사서 교회로 사용하였는데, 교인이 300명도 넘게 모였다.
이것을 안 일본 경찰이 김은석 조사를 잡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잡지 못하자, 대신 김명석을 잡아가 김은석이 숨은 곳을 불라며 고문하였다. 이 때 일본 경찰은 김은석이 보던 책들을 모두 집어가 버렸다. 그러던 중에 김은석은 한국에 계신 부모가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여 부강교회를 섬기게 되었고, 김명석도 뒤따라 나와 수리교회를 맡아 목회하면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던 중에 김은석이 늘 자녀가 없어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아들 김성철 목사를 12살 때에 양자로 주었다.
김명석이 김은석과 함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킨 교회들이 무려 80여 개에 이른다고 하였다.
김은석 목사가 침례와 성만찬을 겸한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는데 그 역사가 오순절의 역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하였다.
김은석 목사가 소천한 이후로는 특별히 하는 일없이 고향인 경남 밀양에 내려가 가족과 함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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