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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6-23 07:19
[re] 정히건 전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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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7,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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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히건 전도자
>http://kccs.pe.kr/rmp045.htm
운영자 조동호 목사님.
정희건 목사님에 관한 폐이지 아래에 댓글로 달고자 하였으나 댓글이 올려지지 않아 여기에 올립니다.
정희건 목사님께서 환원하실 무렵 같은 동리 같은 교회에 다니고 하였기에 참고가 될까하여 여기에 올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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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교회-환원운동)창현 함태영 목사와 정희건목사와 조우(遭遇)-(1)·(2)
[창현 함태영 목사와 정희건목사와 조우(遭遇)]-(1)
....함태영 목사 약력(함동진 撰) 중에서 .........前略..
◎1947년 (33세 때)
☞서울 마포 도화동으로 이주하여 38선을 넘어 월남한 정착촌 군용 천막에 임시기거함.
☞강순명 목사를 도와 월남난민촌 천막학교를 운영하며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주일이면 교회로 사용, 목회와 복음 전도에 힘씀.
(****# 같은 시기에 재건교회파 정희건 목사도(당시 전도사) 이곳에서 생활하며 환원하여 서울성서 신학교에 입교 신학을 함.****)
☞일본군의 고사포부대 지하 벙커로 옮겨 임시 기거함.
☞벙커의 임시거처를 월남민에게 양보하고 임차한 집으로 거소를 옮김.
☞도화동산 정상 마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대지를 마련, 점포가 달린 주택을 손수 건축하여 이주하고. 점포를 운영 생계를 유지하며 학비를 조달, 새벽마다 판매할 상품을 매입하랴 신학공부하랴 분주함.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2년 수료 후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 운동이 성서적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인 서울성서신학교(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로 학적을 옮김.
☞점포가 달린 주택이 완성되기까지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야간에 길거리에서 경찰의 곤봉을 맞아가며 빵을 구어 파는 행상과 임시 구멍가게운영으로 늦깎이 신학공부를 함.
☞본인이 다니고 있는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한국신학대학교교장인 함태영(咸台永-심계원 원장 후일 대한민국 부통령이됨)과 종친으로서 친분을 갖고 아현동 댁에 자주 들러 학문적인 도움을 받았으나 그분이 제의한 공직자리는 사양함.
....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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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현 함태영 목사와 정희건목사와 조우(遭遇)] -(2)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함동진 撰) 중에서 .........前略..
1947년 :
(33세때) 순천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함과 아울러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용산구 도원동과 접경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서울로 이주하자 심계원장인 함태영(咸台永/1873-1964-종교가․법조인․정치가 : 별주 참조)씨를 찾았는데 함 심계원장은 창현에게 지방국장(地方局長)자리를 권유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를 고집하였다.
그 후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인 한국신학대학(당시의 학장은 훗날 대한민국 부통령이 된 松岩 咸台永)에 입학하고 장신대(長神大) 등을 2년 수료 후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운동이 성서적인 신학이며 참 신앙적인 기독교교리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교회의 신학교인 서울성서신학교(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 당시의 학장은 미국인 선교사 죤․제이․힐 목사)로 전학하였다.
이 무렵 강순명 목사와 만나 같이 인연을 맺게되며, 함께 천막학교도 운영,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불우한 난민의 학동들을 교육하고, 겸하여 천막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창현 함태영과 그의 가족들은 자택의 집을 마련하기 위한 잠시동안은 북한에서 38선을 넘어 월남한 난민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麻浦區 桃花洞山))에 있는 일본군이 사용하다 버리고 간 대공포대 벙커 지하굴에서, 또는 임시 천막촌에서 기거하였다.
이 때에 북한에서 월남한 정희건, 김00씨(당시 전도사들)와 사귀었는데 이 두 분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재건교회파 신자로서. 함께 그리스도의교회로 환원하여 서울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의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정목사와 김목사는 신학공부를 위하여 주경야독을 하였는데 주간에는 나무 젓가락(일어로 와리바시)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사업을 하였다.
이곳에서 창현 함태영의 아우인 태무(泰武)도 동업을 시작으로 토목 건축 등의 사업을 하며 형인 창현과 함께 기거하였다.
창현 함태영은 같은 해에 손수 지은 자택의 건축이 완료되어 안주하게 되었고, 신축한 자택에는 방 2칸, 서재 1칸, 부엌 1, 점포 1개가 있어 상점을 경영하며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서재는 방과 겸용으로 사용했는데 이 서재에 마련하였던 장서들이 6.25전쟁 때에 모두 분실되거나 훼손되어 무엇보다도 애통해 하였다.
상점이 마련되기 전 까지는 용산역 등 시장거리와 도로변 등지에서 손수레에 풀빵틀을 싣고 다니면서 행상을 하였다. 이렇게 빵을 구워 판 수입으로 학비를 마련하고 가족의 생계를 어렵게 꾸려 나아갔다.
빵틀을 손수레에 끌고 행상을 할 때에는 자주 경찰관의 단속에 걸려 끌려가 경찰봉으로 구타당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창현의 내외가 새벽에 상품구입차 도매시장에 장보러 가며 숯불 풍로에 밥짓는 것을 장자인 동진에게 맡겨두고 나갔는데, 동진은 추위에 숯불 풍로를 끌어안고 쪼이다가 숯불에서 나오는 일신화 가스를 마시고 사경을 헤매다 12시간 후에야 간신히 깨어난 일도 있었다.
또한 차남인 성원은 뇌염질환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1년 이상을 누워 앓다가 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슬픔의 시험이 컸고 충격 또한 컸다. 새벽부터 낮 동안은 상품을 구입하고 장사를 하며,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의 세월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는 아현동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장 송암 함태영(松岩 咸台永) 목사댁에 가끔식 방문하여 사제지간으로서 또는 강능함씨의 일가로서 문안인사도 드리고 신학에 관한 의견이나 진로에 관한 조언을 듣기도 했는데 때로는 장자인 동진을 데리고 가 함씨 일가의 어른께 문안드리는 것을 이르기도 하였다.
그 후 송암 함태영(松岩 咸台永) 목사는 6.25전쟁 등으로 생활거처가 멀어지고, 부통령으로서 분주하였으므로, 창현 하태영 목사도 역시 자신의 목회일로 분주하기도하여 방문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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