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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0-15 18:28
김요한 목사(자료 추가)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333  

김요한 목사

김요한(金約輪) 목사는 ‘기독교회’ 선교부의 제1호 목사이자 한국인성경훈련원의 제1호 학생이었다. 또 ‘기독교회’의 제3대 포교관리자였다. 본명은 김흥범(金與範)이며, 동아일보에 따르면, 원산 출생이다. 김요한의 생년월일은,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1919년 6월 12일)에 따르면, 1896(명치29)년 2월 22일생이다. 그러나 동아일보에는 1893년생쯤으로 나타나있다. 호적나이와 실제나이의 차이로 볼 수 있다. 김요한은 오산고등보통학교(오산고제), 협성신학교, 밀샙스대학(Millsaps College, 수리학과),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ersity, B.D)에서 공부하였다.

김요한은 1919년 독립만세사건 당시 춘천감리교회의 목사였고, 테일러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였으며, 강원도 춘천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취지서’ 배포자로 검거되었다<‘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六’(문서철명), ‘騷擾事件ニ關スル民情彙報(第十六報)’(문서제목), ‘騷密第1731號;秘受5479號’(大正八年五月十二日 接受, 主管 政務局手決, 第二課印)>. 또 김요한은 춘천검찰국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병천, 김흥범, 원익상과 함께 1919년 6월 12일 조선총독부재판소 경성지방법원에서 판결을 받은바 있다. 이 판결문에 적힌 김요한의 직업은 “목사, 조선어 교사”였다<‘김흥범’; ‘독립운동사 제2권: 삼일운동사(상) - 2 인제군(麟蹄郡)의 운동’(공훈전자사료관, https://e-gonghun.mpva.go.kr/diquest/Search.do#;)>.

다음의 인용문은 1919년 5월 12일 김요한(흥범) 목사 검거문건(춘천검찰국) 가운데 726-727쪽의 일부이다[<독립운동사자료집 6: 삼일운동사자료집-4. 기독교도>(https://e-gonghun.mpva.go.kr/diquest/Search.do#;); ‘2. 강원지역의 3?1독립운동,’ <강원도사 제8권 일제강점기>(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13): 200-202)],

4월 23일 경성 세브란스전문학교 졸업생 이병천(李炳天)이라는 자가 경성으로부터 임시정부 선포문을 다수 가지고 와서 이것을 춘천(春川)에 있는 미국 선교사 테일러의 조선어 교사 김흥범(金興範)에게 교부하여 널리 관민에 반포·주지시키도록 위탁하였다. 김(金)은 당시 전도사 회의를 위해 춘천에 와있던 홍천(洪川)교회당의 전도사 원익상(元翊常)에게 사정을 말하고 이를 교부하였던 바, 원(元)은 그 날로 춘천에 거주하는 조선인 관리 수 명에 대하여 이를 보이고, 4월 15일 마침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문제가 상정되어 토의되는 당일이므로 이날을 기하여 조선인 관공리는 일제히 사직을 결행하고, 인민은 다시 맹렬히 독립운동을 할 계획을 말하며 찬성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모두 거절당하자, 다시 다른 지방으로 널리 선전 유포하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착수 중에 있었다. 이 사실을 탐지하였으므로 관계자를 전부 검거하여 전술(前述)한 불온 문서 수백 장을 미국인 선교사 테일러의 집돼지 우리 안의 흙 속에 숨겨 둔 것을 발견, 압수하였다.... [중략] 선교사 스토오크스는 4월 중에 임시로 경성에 소집되어, 귀가 후 선교사 테일러의 조선어 교사 김흥범(金興範)에게 임시정부선포문 및 불온 문서 1매를 아무 말 없이 교부한 사실이 있었음을 김흥범이 공술(供述)하였다. 그 후 재조사할 때 동인(同人)은 전에 했던 공술을 취소하고 부인하였는데 약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이후 김요한(흥범)의 포교계(경기도 가평군 내면 읍내리 503번지)가 남감리교회로부터 계출된 것은 1921년 10월 25일이었고<조선총독부관보 제2786호 2면(대정 10년 11월 25일)>, 포교폐지계가 계출된 것은 1923월 3월 12일이었다<조선총독부관보 제3197호 8면(대정 12년 4월 11일)>. 미국 유학을 위해서 목회를 그만 둔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출국을 위해서 춘천 집을 떠난 것은 1923년 10월 18일이었다. 이 사실이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김흥범씨외유, 강원 춘천군 남감리교회 전도사 김흥범씨는 미국에 유람코자 10월 18일에 경성을 향하야 출발하였더라(춘천)”<동아일보, 1923년 11월 2일자>. 김요한이 밀샙스대학(Millsaps College)의 수리학과를 졸업한 후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ersity)에서 B.D.(오늘날의 M.Div)를 받고 귀국하자 다시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그의 귀국 소식을 전하였다.

미국에 부급한 김흥범씨 귀향. 입즉 오산고등보통학교(오산고제)를 졸업하고 다년간 교육계에 종사하든, 김흥범씨(38)는 지난 1924년 미국에 건너가서 ?미쓰쓰피? 주 ?밀샙스?대학(Millsaps College?에서 수리학과를 마치고 다시 1928년 ?조지아? 주 ?엠오리?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야 작년 8월 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신학사의 학위를 어더가지고 이번 귀국하얏는데 동씨는 원산(元山) 출생이며 장차 교육계를 위하야 진력하리라고 한다<동아일보, 1931년 1월 17일자>.

이와 같은 자료들을 근거로 유추해볼 때, 김요한은 대략 1893년에 출생하였고, 춘천검찰국에 검거된 1919년은 대략 26세 때였다. 그리고 30살 무렵에 미국에 건너가 학부와 대학원의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때가 38세였고, 1937년에 존 T.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를 만난 때는 4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기독교회선교부’의 제2호 목사였던 최상현이 1891년생이고, 제3호 목사였던 성낙소가 1890년생이다. 이들은 1905년생이었던 채이스보다 대체로 10-15살 더 많았다.

김요한은 1937년에 채이스의 한국어 가정교사로 채용되었다가 ‘기독교회’ 곧 그리스도(인)의교회로 환원하였다. 김요한은 춘천감리교회 목사 때인 20대 초중반 때 테일러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경력자였다. 40대 초반에 이르러서 김요한은 비로소 신약성경교회를 만나게 되었다. 채이스와 매일 만나서 성경을 공부하던 중에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침례를 베푸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 김요한은 채이스에게 자신도 내시처럼 침례를 받고 싶다고 피력하였고, 채이스는 김요한 목사 부부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채이스는 기독교회선교부 건물 지하실에 한국인성경훈련원(The 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을 개설하였는데, 김요한은 이 학교의 제1호 학생이 되어 4년간 그리스도(인)의교회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리고 김요한은 채이스가 한국 그리스도(인)의교회에 제1호 교재로 소개한 소책자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교회들/그리스도의교회들(Christian Churches and Churches of Christ)의 저명한 목사 P. H. 웰시머(Welshimer)가 저술한 20쪽짜리 전도용으로써 제목이 <신약성경교회에 관한 사실들>(Facts Concerning the New Testament Church)이다.

1937년 2월에 서울시 안에 인구 3만여 명이 살지만 교회가 없는 곳에 가정집을 임대하였고, 김요한 목사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그 집에서 3월 첫 주부터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채이스의 제1교회가 ‘기독교회 신당정교회’였다. 채이스는 1937년 6월 23일 포교규칙 제2조에 의거 김요한(경기도 경성부 신당정 236의 62번지 거주)의 포교계를, 포교규칙 제9조에 의거 기독교회 신당정교회(경기도 경성부 신당정 236의 62번지)의 포교소설치계를 계출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3178호 10-11면(소화 12년 8월 18일)>.

1940년 6월초에 채이스 가족이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들어가고, 존 J. 힐(John J. Hill) 가족마저 미국정부의 철수 명령으로 그해 11월 16일 귀국함으로써 선교사가 없는 상황에서 채이스는 선교부 재산을 보호하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돕기 위해서 이듬해인 1941년 2월 24일 서울에 도착하여 3월 23일까지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핍박아래 한 달간 체류한바가 있다. 채이스는 이때 기독교회 포교관리자를 존 T. 채이스에서 김요한(경기도 경성부 신당정 236의 62번지)으로 포교관리자변경계를 계출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4256호 13면(소화 16년 4월 2일)>. 아쉽게도 관보에는 포교관리자변경계가 계출된 날짜(月日)가 누락되었다.

1941년 4월 1일 새로운 종교법의 효력이 발생함으로써 선교사들은 입국활동이나 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그해 12월 7일 아침에 일본이 미국 하와이 주의 오아후 섬 진주만에 있는 미군 기지에 기습 공격을 가함으로써 태평양전쟁(1941-45년까지 연합국과 일본과의 전쟁)까지 발발하였다. 게다가 해방 때까지 일제의 발악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신사참배는 말할 것 없고, 행사 때마다 국가 합창(일본국가 기미가요), 동방요배(일왕이 사는 곳을 향한 궁성요배), 전사 장병 묵도, 황국신민서사 낭독,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강요하였다. 심지어 예배당 안에 일장기를 매달게 하였고, 1942년 이후에는 예배 시작 전에 천황 사진을 앞에 놓고 동방요배까지 강요하였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회’ 제3대 포교관리자 김요한은 세 차례나 투옥되었다. 채이스의 협력으로 1937-40년 사이에 세워진 다섯 개의 교회들 곧 신당정교회(김요한), 돈암정교회(최상현), 내수정교회(성낙소), 산돈암정교회(김문화) 및 청량리교회(박판조)가 모두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였고, 동시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김요한은 1944년 6월 26일 포교관리자폐지계 계출을, 6월 30일에는 이들 교회들의 포교자 및 포교소 폐지계를 계출당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4256호 13면(소화 16년 4월 2일); 제5387호 3면(소화 20년 1월 23일); 제5352호 5면(소화 19년 12월 6일); 제5306호 1면(소화 19년 10월 10일); John T. Chase, "Workers Contacted,” CS, May 1947: 9>.

채이스 선교사는 1947년 1-2월 중 어느 몹시 추운 날 서울거리를 걷고 있다가 우연히 김요한 목사를 만났다. 김요한은 채이스에게 해방 전에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른 후 자신은 목회사역을 쉬고 있다고 말했다<‘예전 사역자들과의 접촉’(Workers Contacted), KM, 1947년 5월호>. 안타깝게도 김요한 목사의 50대 중반이후의 소식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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