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과 월터 스콧(Walter Scott)은 1800년대 전반기에 미국에서 활동한 개혁(환원) 운동가들로서 심하게 탁월성을 다퉜으나 두 사람은 끝까지 갈라서지 않고 상호 존중하며 협력하였다. 그들은 1821년 말에 로버트 리처드슨(Robert Richardson)의 부모의 집에서 처음 만난 이후 캠벨의 개혁(환원)운동의 형성과 확장을 위해서 긴밀히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는 자신이 그 운동을 성공시킨 주요 촉매자란 것을 부각시키려 하였다. 캠벨은 부친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 목사가 1809년에 시작한 개혁(일치)운동에 동조하여 1811년에 ‘Brush Run Church’를 세웠고, 1812년에 가족이 침수세례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개혁(환원)운동을 시작했으며, 그 운동을 책임진 자로서 자신의 명성을 보호하고자 했다. 캠벨은 1820년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와의 토론 중에 침례와 죄 사함 사이의 연관성을 처음 이해하기 시작하여 1823년 윌리엄 맥칼라(William Maccalla)를 상대한 토론 때 ‘사도시대의 관례’(ancient order)를 제시함으로써 침례의 참뜻과 설계가 미국에서 처음 선포되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반면에 스콧은 헨리 에렛(Henry Errett)이 발행한 ‘죄 사함을 위한 침례’에 관한 팸플릿을 1821년 말에 캠벨에게 소개했고, 1827년 ‘Mahoning Baptist Association’으로부터 전도자로 임명을 받아 활동하며 구원의 계획(과정)에 관한 설명으로 ‘다섯 손가락 운동’(five-finger exercise)을 도입하였다. 스콧이 도입한 ‘다섯 손가락 운동’은 ‘믿음’, ‘회개’, ‘고백’, ‘죄 사함을 위한 침례’, ‘성령을 선물로 받음’이었다. 스콧은 자신의 1836년 저서 <회복된 복음>(The Gospel Restored)의 서문과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1827년에 참된 복음이 회복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스콧이 그 해부터 처음으로 믿고 회개한 사람들이 죄 사함을 위해 침례를 받음으로써 복음에 즉시 응답할 수 있다고 설교했고, 죄 사함을 위해서 명시적으로 침례를 베풀기 시작했음을 말한 것이었다. 따라서 캠벨은 스콧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원시 그리스도교 복음이 회복되었다(primitive Gospel restored)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질책하곤 하였다. 캠벨은 1823년이나 1827년에 복음이 회복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복음을 회복했다는 주장은 복음을 상실했고 또 심지어 교회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암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였다. 또 개혁(환원) 운동가들은 사도시대의 본래적 질서(관례)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것이 아직 성취되었는지 여부는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캠벨은 그들의 운동을 지칭(指稱)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들’(Disciples of Christ)로 불리기를 원했다. 반면에 스콧과 발톤 스톤(Barton W. Stone)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란 이름에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을 선호하였다. 캠벨은 1840년대 초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의 견해들을 반영한 스콧의 천년왕국설을 비판했다. 스콧은 밀러의 전천년설을 지지하면서 동료 제자들에게 1842년 10월에 “그들이 예언의 말씀에 무지하다”며 꾸짖었다. 그러자 캠벨은 1843년 1월에 “지성과 영향력이 남다른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이 밀러의 사색에 빨려 들었다.”고 탄식하였다. 밀러의 휴거설에 대한 1차 예언(1843년 3월 21일)과 2차 예언(1844년 10월 22일)이 모두 빗나가자, 스콧은 캠벨보다 한층 더 후천년설의 지지자가 되었다. 1830년에 시작한 <새천년시대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지에서 보듯이, 캠벨은 개혁(환원)운동이 새천년시대를 이 땅에 개방하는 사역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새천년시대의 선구자>란 정기간행물의 제호는 캠벨의 후천년설적인 역사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캠벨과 스콧 사이의 관계는 1849년부터 좋아지기 시작하여 스콧의 별세 때까지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캠벨은 1849년 4월 스콧의 아내가 사망하기 얼마 전까지 피츠버그에 있는 스콧의 집에 머물렀고, 5월에는 그녀에 대한 친절하고 동정적인 부고 기사를 게재했다. 두 사람 모두 동년 10월에 창립된 (캠벨은 창립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미주 그리스도인 선교사회’(American Christian Missionary Society)에서 활동했으며 종종 연례 회의에 함께 참석 하였다. 1851년 8월, 두 사람은 우연히 오하이오 주에서 함께 여행하게 되었고, 캠벨의 보고에 따르면 며칠 동안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했다. 1853년에 캠벨은 스콧을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현존하는 설교자들 중 한 명”이라고 불렀고, 그 다음 해에 캠벨은 켄터키 주 코빙턴(Covington)에서의 스콧의 여성 연구소 사역을 강력히 지지하며, 그의 “천재성, 학식과 경건... 강단에서의 능변, 그리고... 놀라운 재능의 교수법”을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감탄했다고 기술하였다. 또 캠벨과 그의 가족은 1855년에 스콧이 베다니를 방문했을 때 스콧에게 진심어린 최고의 친절과 환대를 베풀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개혁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언급할 때, 그들은 두 사람 모두를 그 개혁운동의 “창시자”로 간주하였다. 스콧의 전기 작가 윌리엄 벡스터(William Baxter)는 캠벨의 설교 스타일이 지적인 어조였던 반면, 스콧의 설교 스타일은 보다 더 감정적인 어조였다고 했다. 이후 환원운동권의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캠벨과 스콧의 충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주역들과 다른 이슈들로 인해 그들의 영적 계승자들은 이후 2세기 동안 여러 차례 그러한 갈등을 재현하였다. [참고서적: Foster, Douglas A. A Life of Alexander Campbell. Eerdman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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