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가셨나요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내드리며
고운 정 미운 정이 무르무르 익으며
주고도 못다 주었는 양 깊어지는 인생에 참 사랑을 의지하며
찬송과 기도로 호흡 맞춰 살아온 믿음의 반려자여
28년 동안 곱게 정들인 잉꼬부부의 사랑이었건만
하늘이 계획하신 경륜이 때가 다 되어 오라 부르시니
기쁨의 삶 고통의 삶 소리 없이 다 등 지우시고
당신이 늘 하시던 말 ‘내 당신을 혼자 두고 갈 수가 없구려’ 하시드니
애틋하게 사랑하시던 아내와 식구들을 앞에 놓고
천성문이 열리며 천사가 수종을 드니 아니 갈 수가 없었던가 보구려.
보고파도 보이지 않는 두 눈가에는 어느새
평안한 모습으로 변하시어 하염없이 흘리시던 뜨거운 눈물을 떨리는 손으로 애절하게 닦아 드리며 우리 모두가 가야 하는 곳 당신이 먼저 가시는 것뿐이라오.
평안히 가세요. 나도 훗날 부르시면 곧 뒤따라 가리이다.
그때에 일랑 나를 제일 먼저 알아보아 맞으셔야 해요.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가 쉴 맘 있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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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광 찬란해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우렁찬 찬송소리와 기도로 무장되어 오른손 높이 들고 천성문을 향해 들어가시는데
<마지막 아내의 애절한 인사>
당신은 훌륭하게 인생 길 잘 마치시고 이제 주님 계신 낙원으로 가시는군요.
사랑해요.
참아 나를 볼 수 없어 눈이 흐리시고 혀가 굳어지셨구려.
60평생 그리고 그리던 그 주님이 “내 사랑하는 아들아”
친히 안아주시고 위로하시고 사랑하실 터이니 기뻐하세요.
기다리신 양 사랑하는 자의 인사를 다 들으시고
희고 뽀얀 얼굴로 오른손 가슴에 얹으시며
두 눈을 감으신 당신의 모습
내 온 육체는 부서지는 고통이구려
긴 세월을 고통과 괴로움과 고난의 모든 삶을 승리로 끝맺은 모습이셨기에
이제 슬픔도 아픔도 그리움도 뼈 깎는 고통도 참고 견디리이다.
“소망이 있기에”
마지막 주신 함박웃음 가슴에 안고서
사랑하는 아내 이(광숙)권사 드림.
*이광숙 권사 : 고 李成恩 장로의 부인
<고 이성은 장로의 유족>
부 인 : 이광숙 李光淑 권사
딸 : 이혜란 李惠蘭 헬렌 HELEN
아 들 : 이현기 李賢基 폴 PAUL
딸 : 이혜경 李惠慶 한나 HANNAH
맏사위 : 金晟浩 송 SONG(이혜란의 부군)
손녀 : 김혜성 김慧盛 로렌 LAUREN
손자 : 김경일 金慶日 구렌트 GURENT
맏 형 : 이중은 목사 <前 서울성서신학교(현,서울기독대학교와 합병 전 명칭)의 교무담당교수 역임>, 현L/A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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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追慕辭)
이성은 장로님
그리도 주님의 나라에 가시기가 바쁘셨습니까?
장로님과 저는 1966년 역촌동신학교(서울성서신학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지금은 역촌동 그 자리가 신사동으로 동명이 바뀌었지요. 그 때에 학생들 간에는 역촌동신학교, 용산신학교(효창동에 있는 대한기독교신학교), 등촌동신학교(그리스도신학교), 대전 한성신학교 이렇게 부르면 다 통하였습니다. 이들이 다 그리스도의교회교단 신학교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불광동에서 수색까지 펼쳐져 있는 논밭들을 응암동에서 가로질러 다리도 없는 불광천을 건너기 위해 물에 빠지기도 하면서 역촌동 서울성서신학교에 드나들었습니다. 자동차들도 그렇게 건넜습니다.
장로님과 저는 근로장학생으로 재학하면서, 장로님은 신학교의 정원과 캠퍼스 구석구석을 돌보았지요. 정원의 화단을 얼마나 잘 가꾸셨는지 정원수(庭園樹)와 화초들은 싱싱하고 온갖 색깔로 꽃을 피워 화사하고 향기로웠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연구실>이라는 표지판을 달고 있는 강의실 공간 전체를 부여받아, 거기에서 한국그리스도의교회선교회를 후원하는 미국의 스폰서들에게 보내어져 매각될 크리스마스 카드를 수채화로 열심히 그리고, 신학교 전반의 교재. 시험지. 문서. 교회주보 등을 필경 또는 타자하여 프린트 인쇄를 하는 일을 맡아 하였습니다. 저의 여동생 함정자 역시 같은 실내에서 근로장학생으로 한국고전 인형들을 만들어 미국의 스폰서들에게 보내져 매각되어 한국선교후원기금으로 보내져 왔습니다.
장로님의 장형이 되시는 이중은 목사께서 서울성서신학교의 교무담당교수로 재직 중이셨는데도 티를 내지 않아 형제간인지를 감지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언제나 미소를 간직한 체 일상을 보냈으며 말씀이 별로 없는 편으로 묵묵히 맡은 일에 열중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는 신학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미국에 가기 위한 방편으로 입학한 후 미국선교사들만(테일러 선교사와 패튼 선교사)을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사이비신학생 행동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지요. 영어 콘사이스를 항시 손에 들고 다니면서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 겨울에는 난로 가에서 머물면서 봉사적이거나 공적인 일에는 손 하나 까딱 아니하는 그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환원교회(그리스도의교회)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 일반대학을 나와 영어통역을 한다고 교수로 임용하여 통역을 시키니 환원운동에 관한 성경절구 문구 통역해석이 영 엉망이었지요. 거기에 한 수 더하여 미국선교사들에게 밀착되어 하는 모습이 체면에 맞지 않는 거취였습니다. 또한 신학교의 잡역을 맡은 용원 또한 그러하였지요. 이들은 지나쳐 아첨이라고 할까요, 학생들의 온갖 사소한 것까지 선교사들에게 고자질하여 필요치 않는 마찰과 볼성사나운 반목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은 첫째로 성서로 돌아가기 위하여 하나가(교회일치)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가 되자"는 기치를 내세우고 환원운동을 하겠다면 우선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서대문구와 용산구는 경계를 인접하고 있음)에 두 개의 신학교를 두고 분열된 모습 같은 것을 외부에 보이며 "환원운동을 하자", "하나가되어 성서로 돌아가자" 외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두 신학교가 합치되 않는 문제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을 에워싸고 있는 아첨적인 사람들의 방해가 크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 명의 학생들은 참다 못하여 궐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성서 신학교와 용산신학교는 통합하여 단일화하라. 이를 방해하는 선교사 주위의 아첨적인 인물들은 물러가라. 이도 안되겠다 하면 선교사들도 신학교에서 손을 떼고 본국으로 돌아가라. 는 구호를 외치고 프랑카드를 걸면서 까지 촉구하였지요. 한편 통합요청 외침 모임에 용산신학교학생회와 전국교회에들에서 원정 응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내기도 하였는데 용산신학교의 학생들이 대거 방문하여 학교주위의 언덕 등에서 에워싸다시피 하고 응원하고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는 교장인 테일러 선교사로부터 퇴교명령을 받고 물러났습니다. 이때에 기숙사에서 기거하며 숙식을 해결하던 저로서는 오갈데 없는 사고무친의 형편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 아니었습니까? 장로님께서는 서울성서신학교 재학시에 저와는 그렇게 깊은 대화도 없이 마음으로만 통하였지요. 그러나 금새 저의 처지를 알아차리고는 즉시 수락산 자락 밑 노원들판의 깊은 곳에 자리한 장로님의 댁으로 인도되어 며칠을 침식을 하며 친절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장로님의 양친께서 기거하시는 곳이었지요. 대문 밖에는 장로님께서 손수 지어 놓은 온실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동양란 용설란 그밖에 여러 가지 화초들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정원의 화초들을 잘 가꾸는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중에는 신학교에서 주말이면 댁에서 꽃을 가꾸는 아름다운 생활을 하시었습니다. 저는 뜻하지 않게 장로님 댁에서 머물며 약 1주일 정도 신세를 지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신학교에서 동학을 하던 천호식씨와 오승록씨가 신학교 인근에 협동으로 세들어 있는 셋방으로 오라 하여 그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함께 기거하였습니다. 때는 엄동인 12월 중순쯤이었습니다. 두 분은 저에게 신학교에서 그리던 성탄카드를 여기에서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려진 성탄카드는 두 분이 들고 나가 여기저기 발 품을 들여 팔아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이 크리스머스카드의 매각대금으로 라면을 사들여 연명하였지요. 참으로 은혜를 베풀어준 동학도(同學徒)들이었습니다. 두 분은 차마 본가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집으로 바로 귀가하기에는 부모님께 면목이 없었고 거북스러운 처지라 방학동안에도 귀향하지 않고 셋방에 더 머물러 있게 된 사연이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그만 둔 뒤에는 곧 이어 겨울방학의 종료와 더불어 이 두분들, 그리고 장로님, 또 다른 여러 동학들이 신학교에서 자진 물러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분들 모두가 일심으로 학교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인물들을 잃게 되는 사건이었고, 서울성서신학교와 대한기독교신학교가 통합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로 감추어진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사건의 당시 뒷전에서 콘사이스만 끼고 돌던 학도들이나 교수직에 있던 분 중에는 뜻한 바대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귀국하지 않고 있는 분이 더 많이 있기도 합니다.
두 분이 셋방을 비움으로 저는 역촌동에서 응암동으로 건너가 당시 동학이었던 박연웅목사 사모의 소개로 친절한 학동의 학부형을 만났습니다. 자기의 큰아들(정문주 -초등학교 초학년)을 지도하여 주는 대신에 큰 방 하나를 세 얻어 주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동리의 아이들을 모아 과외를 지도 하였습니다. 잘 가르친다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를 기회로 그 방에서 김용우 목사와 함께 봉사하던 개척교회인 응암동그리스도의교회(박연웅 목사 댁에서)를 이리로 옮겨와 제가 후임으로 예배(성인예배와 주일학교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김용우 목사는 서울성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대한기독신학교로 옮겨 4학년에 편입학하고 대학교회에서 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회사에 취업을 함과 아울러 거주지를 홍제동으로 옮기게 됨에 따라 일부 신자와 함께 홍제중앙그리스도의교회(조충연 목사 시무)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장로님은 서울 을지로에 있는 한국자동차기술학원 부원장으로 취업을 하였고, 저는 일신제강주식회사(현재의 동국제강주식회사)에 취업을 함과 아울러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양가정(兩家庭)은 자녀를 두게되었습니다. 양가는 서로 왕래를 하며 친목을 돈독히 하였지요.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두 가정이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하고 수속을 하였습니다. 장로님 가족은 미국 이민수속이 빨리 끝나 한국의 가산을 정리하고, 이민 안내자들의 안내에 따라 이민 길을 떠나셨지요. 저의 아내는 미국에 취업이민을 위해 서울 홍제동에서 양장점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이민수속을 위하여 국가기술자격(2급 의상디자인 양재기술자격)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민신청구비서류 중의 중요서류였지요. 장로님 가족이 미국에 도착하니 안내와는 달리 소개된 직장이 허위로 사기를 당하게 되어 주유소 주유원 등 여러곳의 막노동을 하다가 결국에는 소질에 맞는 정원관리와 공사를 하는 사업을 시작함으로 안정된 길을 찾으셨습니다. 저는 장로님의 미국이민수속내용에 있어서 현지취업이 사기로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민에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지요.
장로님은 이광숙 권사, 혜란, 현기, 한나 가족을 거느리시고 깊은 신앙으로 L/A 현지교회의 장로직분으로 봉직하시며 은혜로운 생활을 하시었습니다. 자녀들이 잘 성장하여 주고 생활에 안정을 찾아 노후를 준비하는 시기에 뜻하지 않게 환우를 얻어 투병을 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니 이세상의 삶이 전광석화 같이 빨리 지나고 있음을 가슴깊이 느끼어 집니다.
그렇게 생활에 성실하시고 신실하신 신앙생활로 온화하신 성품을 저희들에게 끼쳐주신 지난날들이 감사하기만 합니다.
이역만리라는 핑계로 영결식에도 불참한 몰염치…… 용서하소서.
남아있는 저희들도 신실한 신앙생활로 장로님의 모범을 따라 주님의 나라 하늘에 이르러 다시 뵈옵기를 소망하면서 그날을 기다립니다. 아멘.
함동진 삼가올림
깊은산골(長山) 함동진
http://hamdongjin.kll.co.kr/
http://cafe.daum.net/hamdj

신학교 입구의 간판

1966년 김용우. 임상규 졸업식에서 함께. 뒷줄 맨좌측이 이성은

1966.11.15 뒷줄 좌측부터 두번째 옅은 색 점퍼차림(나무 옆 좌측)이 이성은.

1966.11.15 용산신학교의 학생들이 대거 방문하여 학교주위의 언덕 등에서 에워싸다시피 하고 응원하고 격려하여 주었다.

1967년 봄. 응암동그리스도의교회 개척당시 교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