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광석 목사 고광석 목사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김은석 목사의 제자와 동역자로 활동하였고, 힐 요한 선교사가 대전에 정착한 1959년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60년대 내내 힐 선교사의 사역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9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광석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학생이었다. 고광석은 1955년 충북 괴산군 소수면 소수교회에서 진행된 백일집중공부에 참여하였다. 김은석은 이때 이미 그를 전도사로 호칭하였다. 1955년 5월 27일자 메모에 의하면, 이날 남녀 합하여 18명이 공부하였는데, “소수교회당에서 백 일간에 공부하는 중에 공부함. 김재순 목사 서울 가심. 고광석 전도사님은 권영수, 전도희 두 분과 전도 가심.”이라고 적었다. 둘째, 고광석은 바울의 디모데처럼 김은석의 충실한 제자였다. 김은석이 가는 곳에 바늘과 실처럼 동행하였다. 1955년 6월 18일(토) 오후에 김은석, 김완례 부부와 동행하였고, 7월 8일에는 김은석과 함께 청주에서 소수교회로 향하였다. 또 12월 21일(수) 아침에는 김은석과 함께 서울성서신학교 숙사에서 지냈다. 1957년 4월 27일(토)에는 고광석이 김은석, 김규상 등과 함께 전남 해남군 마산면 장성리에 머물렀다. 김은석 목사의 병문안 또는 부름을 받고 자택을 방문한 기록이 1958년 1월 27일까지 몇 차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고광석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들을 근거로 볼 때,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출신이었거나 충북 청주시 영운동이 거주지였거나, 1956년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영운동에 개척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은석 목사는 1956년 6월 23일(토) 아침에 청주역에서 기차타고 소수교회로 가기 위해서 강신규 자매와 함께 영운동 고광석 전도사 집에서 나온 것으로 기록하였고, 8월 17일(금)자 기록에 의하면, 김은석이 김은영, 고광석, 노의수와 함께 충북 청주시 영운동 교회당에 머문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영운동 그리스도의 교회는 김은석의 주소록에 남아있지만, 힐 요한의 주소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넷째, 고광석은 병약하였다. 1955년 7월 19일 아침에 김은석이 대전 자택에서 부강으로 향하였는데, 부강에 도착해 보니, 고광석 형제가 병중이어서 수리교회에 가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1955년 8월 16일 김은석은 사모 김완례와 김옥여, 이원노, 강신규와 더불어 병원에 입원한 고광석 전도사를 병문안하고, 대전 판암동 그리스도의 교회 애생원(愛生園)을 방문하였다. 고광석 목사는 1960년대 힐 요한 선교사의 선교사역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힐 요한 선교사는 가족과 함께 1959년 8월에 부산을 통해서 입국하여 대전에 정착하였다. 1959년 12월 1일 심영진 목사가 시무하는 충남 대덕구 유천면 도마리, 성화교회에서 신학교를 개교하고 예배당 앞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에 고광석이 힐 요한 부부, 김은석, 심영진, 김태수, 오재건, 고재윤, 김찬영 등과 함께하였고, 수업시간 혹은 개강예배에도 참석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듬해 1960년에는 고광석이 시무하던 선화동교회로 옮겨 수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1960년대 중반에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에 참석하였고, 힐 선교사가 남긴 사진들에서 그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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