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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01 10:35
장성우 목사 자전적 에세이(서문,1-5)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025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 은총의 순례길, 신앙과 문학의 삶

서문: 은총의 순례길 -자전적 에세이를 쓰며-

어떤 흔적 남았는지
발자국 찍힌
선명한 깊이, 크기를 재고
살아온 길을 시처럼 쓰고자 한다.
돌아보니
발자국 선명하게 남아있다.

젊은 날에 장성우 목사

우리가 살면서 하는 일마다 잘되고 잘 나가다가 갑자기 무너지면, 그 후에는 모든 생각이 달라진다. 그리고 궁지에 몰려서 이 세상에서 쓸모가 없는 폐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바쁜 삶이 멈추는 순간이 되고, 멈추어 서서 인생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하페 케르케링’는 독일에서 잘 나가는 코미디언으로, 정신없이 바삐 살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담낭에 문제가 생겨 쓰러졌고, 그 일로 인해 자신을 되돌아보며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결국 800Km에 달하는 순례의 길, 야고보의 길을 떠났다. 몸 자체가 굴러 갈듯이 통통한 그가 11kg이나 되는 배낭을 메고 42일 동안 산과 들, 언덕과 계곡을 지나 인적도 드문 중세의 도시 야고보의 길을 찾아갔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다. 그는 순례에서 느낀 것을 일기처럼 정리했지만, 단순한 일기장은 아니다. 개인의 느낌은 물론이고, ‘야고보의 길’의 모습,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의 생각, 순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인생의 참 의미 등 우리가 평소 느끼고, 또 느끼지 못한 다양한 것들을 전해 준다. 그는 여행을 통해 몇 가지 소중한 것을 얻었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고, 또 하나는 변치 않는 친구로 ‘신’을 만났다고 했다. 여기서 ‘신’은 자신의 존재와 연결된 절대적인 무엇이며,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내가 어제 경험한 일에 대해 나는 말할 수도 적을 수도 없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포도밭 한가운데 서서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지쳐서? 기뻐서?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서? 포도밭에서 운다고?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나서 그 일이 일어났다! 나는 ‘신’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했다."

그가 순례여행을 하면서 고통으로 내뱉은 말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그처럼 험난한 여행길에 오른 적은 없지만, 마음이 울적하면 배낭 하나 메고 걷기도 하고….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복잡한 세상을 떠나 오직 걷기만 하면 된다는 것, 푸른 하늘을 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한가로이 길가에 주저앉아 물 한 모금 마셔도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힘들다’, ‘목마르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아! 시원하다’, ‘정말 상쾌하다’ 와 같은 극히 단초적인 생각만 했다.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또 뭐가 생각나겠는가. 내일은 뭘 먹고 살지, 등의 잡생각들은 어느 순간인지 내 곁을 떠났다. 그저 걷고, 쉬고, 먹고, 자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느껴본 해방감이었다.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감정은 뭔지 모르게 복잡해 졌다. 내가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하페 케르케링이 거의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일행 중 한명이었던 ‘앤’이 갑자기 순례 길에 있는 집을 한 채 사겠다고 했다. 부동산 투자용이었던가? 그러나 이 말을 들은 그는 이를 말리며 그녀에게 외친다. "앤, 너는 집을 사고 싶은 게 아니야. 단지 순례 길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싫은 거야. 너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내 여행은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도 목적지가 가까워지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이제 다시 예전의 복잡한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이제 다시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해야 한다는 답답함, 아무 것도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안타까움과 같은 복잡한 생각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단 하나, 여행 중에 느꼈던 삶의 충만함이 계속 나를 이끌어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무릎과 발바닥의 통증을 이기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던 의지,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단순함,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오로지 내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었던 여유로움 같은 것이다. 험난한 순례의 길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 속에서 싹 트는 우정이 부러웠다. 알 수 없는 미래는 잊어버리고 오늘 이 순간만을 생각하는 단순함 그 자체로 되돌아가고 싶다. 어차피 삶이란 알 수 없는 곳을 걸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한 사명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것 아니겠는가.

"순례 길은 나의 인생여정을 보여준다. 시작은 실제의 내 삶처럼 난산이었다. 여행 초창기와 어린 시절의 나는 내 속도를 찾기 힘들었다. 인생의 길 중간까지는 그때까지 쌓아 온 긍정적인 경험과 함께 오류와 혼돈이 공존했고, 가끔 길 밖에 나앉기도 했다. 그러나 반쯤 왔을 때부터는 목적지까지 기쁜 마음으로 행진했다. 이 순례길이 친절하게도 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이는 듯하다. 담담함을 지닐 것, 무관심과 냉담함이 아닌 긍정적인 의미의 담담함. 그러면서 유쾌함을 견지할 것… 이 길은 힘들지만 놀라운 길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며 초대이다. 이 길은 당신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비워버린다. 그리고 다시 당신을 세운다. 기초부터 단단하게… 당신은 이 길을 홀로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비밀을 보여주지 않는다… 길은 하나가 아니라 수천가지의 길이 존재한다. 그러나 길은 각자에게 한 가지 질문만을 던진다. ‘당신은 누구인가?"

지난날을 돌아보면 모두가 은총으로 얻은 순례의 길었다. 혼자 걷기 힘들어 넘어질 때 두 손을 꼭 쥐고 다시 넘어질세라, 보살피면서 이끌어 주신 주님이 항상 옆에 계셨다. 좌절하고 고통으로 인해 상처로 입어서 아픔이 있을 때 주님은 십자가로 위로를 주시고 고비고비 험난한 세월을 넘어서 삶을 풍요롭게 하셨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발자취를 기록하게 된 것은 나의 출생 고향의 동인지인 충청문학사에서 ‘인생 순례길’ 자전적 에세이 요청이 있어서 나의 발자국을 49편으로 나누어서 정리하게 되었다.

더듬거리며 목적지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여행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목회자의 길이란 방황하면서 찾아가는 길었기에 돌이켜보면 부끄러움이 많다. 주님 따라 가는 길에서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다. 감사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면서 가는 여정이 축복이었다. 예정보다 늦게 불빛 희미한 시골길. 초행길을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야만 했다. 때로는 선배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가고 안내판을 보고 찾아가야 했다. 안전장치 없어 자칫 개울로 빠질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위험한 길이 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하나님, 길을 찾지 못하는 나를 도우소서’ 기도하며 위험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계속 가는데, 자꾸만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금 더 가보니 길이 없는 듯 보였고, 순간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왔던 길로 돌아서 한참을 갔다. 5분이면 가는 길을 몇 시간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다. ‘하나님!, 순례하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기도하면서 찾아온 길이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셨다.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1):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하다

마침내 감격스럽게 1978년 12월 10일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믿음의 첫사랑을 쏟은 개척교회의 시작인지라 이슬비처럼 촉촉이 내리는 은혜가 새벽예배를 감동으로 이끌었고,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감사함으로 복음을 전파했는데,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어렵던 시절 말씀을 전할 때마다 초대교회처럼 온 회중 위에 하늘의 기쁨이 충만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모였다. 주일아침에는 주일학교를 인도했고 장년예배의 설교를 아침과 저녁으로 하였다.

개척목회는 순조로웠다. 김종현 전도사 가족과 우리 가정이 같이 교회를 시작했는데 개척당시, 교회는 가난했고 풍요롭지 않았지만, 교회와 성도들은 모이기에 힘쓰며 어려운 여건이지만 감사함으로 뜨겁게 기도했다. 당시 삼각산은 금요일 밤이면 봉고차에 교인을 태우고 가서 산 속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사람으로 하얗게 덮였고, 늦게 가면 자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서 밤새워 기도소리가 쩌렁쩌렁 서울시내에 울려 퍼졌다. 삼각산에는 연일 계속되는 집회로 발 들여 놓을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수많은 목회자들도 산 기도에서 응답을 받았다. 산에 모인 무리들은 목청이 터지도록 소나무 뿌리가 뽑히도록 외치며 끈질기게 기도했다. 기도는 위기를 극복했고 한국교회는 전무후무한 대부흥을 이루었다.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이주해온 변두리지역 신월동, 목회 관심은 성도들이 주일을 잘 지키며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가르치는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일지라도 강한 바람이 몰아치면 뿌리째 뽑히고 가지가 찢어지고 부러진다. 그래서 목사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너무나 중요하다. 자신의 열심과 결심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동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기성교회에서 사역을 포기하고 교회개척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모범적이고 건강한 목회를 꿈꾸며 서울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개척교회는 허허벌판 같은 개척지에서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셨다. 나는 축복받은 목회자이다. 전라남도 해남동리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여 바로 서울로 상경하여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는 ‘성경 이외의 어떤 인위적인 교리나 신조도 거부한다.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교파주의를 배격한다. 매주 성만찬을 갖는다. 침례가 옳은 세례이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그려온 이상적 교회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믿음의 확고부동한 자세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상향의 교회를 찾는다. 그러나 이상향의 교회는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교회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이상향의 교회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사모하는 교회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이다. 이 교회는 개척교회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란 이런 곳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2:43-47절)

1978년 12월 10일. 내 생애에 획을 긋는 날이었다. 서울 강서구 신월동 2층에서 강남제일교회를 개척해서 첫 예배를 드렸다. 창립예배는 1979년 2월 11에 드렸는데, 감격스럽게 시작된 이날 예배에는 30평 규모의 예배당에 1백여 명에 가까운 축하객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뤘다. 나는 이렇게 인사했다. "이렇게까지 많은 분들이 찾아주실 줄 몰랐습니다"며 감사를 전하고 비전을 설명했다. “교회는 사람이지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도구적 역할을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씨앗이 심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강남제일교회는 건물에 중점을 두지 않겠습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제자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진정한 제자가 세워지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했다.

축사를 한 최윤권 목사는 "교회에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놀라운 축복과 결실을 주실 것입니다. 세워지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땅 끝까지 전해지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범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했다. 성만찬을 베풀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감격적인 예배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개척한 교회는 부흥하여 사방에 소문이 나고, 후에 나는 한국기독교교역자협의회의 교단대표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길, 주의 길

평생을 걸어도
후회하지 않는 삶
고뇌와 슬픔이 통곡처럼 밀려와도

모든 아픔 가슴에 안고
순례의 길 떠나네
구름이 둥둥 떠 있는 하늘을 향해
설레는 가슴에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 손길 찾아 나 떠나네

적자처럼, 눈동자처럼
사랑의 손 놓지 않는 아버지시여

영원으로 향하는 천국 문에서
찬송소리 신기한 나라 내 어이 잊으리

나, 이 땅에서 더 머무는 날 동안
그곳을 증거 하리
눈물을 씻기시며 애통이 없는 나라
곡하는 것이나 아픔이 없는 나라

이 세상 끝날 까지 그 복음 전하리
영원히 사는 나라 생명의 나라
찬송의 주가 되시는 내 아버지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2): 개척교회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강남제일교회 개척당시 장성우 목사 부부사진

내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해남 동리교회를 그만두고 새롭게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하려고 했을 때 개척할 수 있는 돈이 없었다. 제수씨에게 개척에 대하여 상의를 하였더니 교회 임대 계약금을 주어서 교회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생은 사우디아라비아 동아건설 현장소장으로 해외에 나가 있었는데, 제수씨가 동생과 상의도 없이 혼자서 결단을 내려서 개척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제수씨는 그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는데, 지금은 서울 광림교회에 다니는 임활란 집사이다. 어려운 시절에 교회를 개척하는 주춧돌이 되었다.

호주에서 전화가 왔다. 멜본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역을 하는 오세황 목사다. 그는 내가 서울기독대학교에 추천을 해서 신학과에 입학을 하여 졸업 후에 목사가 된 우리교회 출신 목사이다. 그는 개척 당시에 우리 교회에 두 번째로 나온 김경희와 결혼을 해서 호주에서 청각장애인 한국선교 대표를 맡고 있다. 슬하에 자녀로 3명의 딸을 두고 있는데 벌써 세 명 대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같이 신학교에 추천한 김춘기 목사는 인천에서 성결교회를 섬기고 있다. 참 감격스럽다. 당시에 충성스럽던 반현구전도사는 청주에서 성결교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어려운 개척 당시 올망졸망한 3자녀를 데리고 생활하기 어려웠다. 쌀이 떨어져서 아이들에게 밥을 먹일 수 없는 상황이 왔다. 개척을 하면서 누구에게 이야기 할 수도 없고 기도만 했다. 부엌에 있는 쌀독에 쌀이 채워졌다. 어쩐 일인가. 놀랍다. 알아보니 시장에서 지물포를 경영하는 김대양 집사가 다른 교회에 다니는데,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쌀독을 열어보고 비워 있어서 채워 넣었다는 것이다. 까마귀의 기적은 멀리 있지 않고 나의 주변에 있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여호와가 까마귀를 시켜 조석 식물을 날라다 주게 했다’(왕상17:2)

딸 장지은의 선생인 최성수 선생이 교회에 와서 주일학생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선생이 주일학교 선생이 되니 주변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엄문용 장로는 우리 집사람의 고등학교 선생이었다. 개척교회를 엄 장로 집 가까이 신월동에서 세워진 것을 알고 설교도 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셨다.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셨다. 잊을 수 없는 사람 중에 하나는 임정규 집사 가정이다. 우리 교회 온 집안이 출석했는데, 후에 내가 한성신학교에 편입시켜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교회를 하다가 내외가 미얀마에서 선교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경주에서 올라오신 송도숙 여자장로님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시기 전까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목회하며 생명의 놀라운 기쁨과 환희를 현의 떨림처럼 온몸으로 체험하며, 가르치고, 글을 써온 것을 감사한다. 주변의 아픔을 가슴앓이로 간직하고 모순된 현실과 맞서 구원의 세상을 열기 위해 말씀을 대언했다.

장성우목사가 강남제일교회 개척시에 심방을 마치고

나그네,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등, 소외된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다. 고난과 가난 속에 하늘의 소리를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며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식사를 거르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있는 곳,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쪽방촌, 낮은 자의 삶과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의 아픔에 깊숙이 동참했다. 산에 토굴을 파고 사는 정재수라는 분이 찾아 왔다. 목욕을 하지 않아서 땀 냄새와 찌든 때로 교회 안에 진동했다. 교인들이 목욕도 시키고 옷을 바꿔 입히고 이발도 시켜 주었다. 나중에는 껌을 팔면서 자립하도록 했다.

개척할 때 후원을 해주신 잊을 수 없는 분들이 있다. 미국에서 돌아오신 김진문 목사님이다. 김진문 목사님은 평남 용강에서 출생 했는데, 반공포로 출신으로 석방되어 숭전대학교 영문과를 줄업하고, 유학해서 Immanual School of Religion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신설동교회를 개척했는데,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서 안타깝다. 정말 훌륭한 목회자이고 인격적인 분이었다. 개척교회를 도와주신 한분은 현재 중국 훈춘에서 장애인 학교를 운영하며 북한 선교에 주력하시는 김찬영 목사님인데, 신시내티신학대학교를 수학한 후, 부인 패츄리사 김과 귀국했다. 후에 한양대학교에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한성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운영자가 되었다.

곽노첨 장로님은 부천에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300평을 교회 건축대지로 희사하기로 했는데, 내가 신학교교수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교회 건축이 무산되었다. 귀한 후원자가 있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다. 특별히 개척 초창기에 교회에 헌신하신 분들은 김성숙 권사, 이효순 권사, 이상돈 집사, 강영자 집사, 박주자 집사, 김용혜 집사, 등과 지금은 목회를 하는 당시 장로님이던 김종기 목사와 전도사였던 김종현 목사가 있다. 이외에도 헤아리기 어렵게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

서울성서신학교와 한길사를 운영하는 미국인 선교사 배도은(Gorden & Sharon Patten) 선교사님과의 인연이다. ‘사도행전’과 ‘반석 위에’ 라는 책을 번역하였고, 전도지를 50만장 찍어 교도소 전도용으로 활용하거나 교회로 보냈다. 1974년에 선교부 책임자로 선임되었고, 신학교 교장으로 일을 하였다. 배도은 선교사님이 교회를 찾아 왔고, 1982년 3월 5일에 태광출판사에서 ‘일곱촛대의 비밀’ 설교집을 냈다. 이 설교집은 개척해서 3년간 설교한 것을 모아서 출판을 했는데 당시는 설교집이 많지 않아서 목회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재판을 냈다. 이렇게 시작한 개척교회는 교인이 서서히 늘었고 특별히 우리 교회에는 신학생들이 많이 와서 청년이 늘어났고, 어렵게 살던 신월동 동네 주위에서 관심을 끌었다. 외국교회와도 유대관계를 맺으며 성장하게 되었다.

길은 어디에

당신이 인생에 어느 길을 주셨기에
미로처럼 헤매는 수많은 사람이
퍼즐처럼 어렵게 맞추고 헐고 수없이 되풀이하게 하나이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미로의 길을 찾아

오늘도 저들은 장승의 모습을 하고,
산모퉁이 아무도 없는 길에서 손을 벌리고 서있다
길이 어디에 있기에 가도 가도 끝없는 고갯길을 걸어야 하고
해가 넘어간 인적도 끊긴 고갯길을 넘어야 합니까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마지막인지도 모르는 미로에서
누가 이곳에 길을 만들고 장승처럼 서있게 만들었는지
넘어야 할 산은 골고다인데 모두가 아우성치는 성터에서
오늘도 사탄의 자식이 소리쳐 붙잡고 있다

너를 가만두지 않고 오늘도 미로에서 미로로
허무에서 허무로 미치게 하고 있다
하늘엔 어둠이 짖은 밤인 것을
모두가 지쳐있는 나그네로 걸어가고 있다

외로운 산길에 초가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거기에 안식처가 있기에
나는 어두운 밤길에 빛을 찾고 있다

그래도 유일한 광명의 길이기에
구원의 길이기에, 허망한 사람을 잡고 말벗 삼아 걷고 있다
외로운 나그네의 동무가 되어
외롭게 걷는 너와 함께하기 위하여
오늘도 나는 홀로 이 길을 가고 있다.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3): 어린 시절 -신앙의 빛을 찾아서-

청주에서 어린시절 어머님과 같이
뒤에는 일본 신사에 올라가는 층계가 보인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지금은 “잠에서 깨어야 할 때”라면서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다. 빛의 갑옷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에 바울은 즉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라”(롬13:14)라고 말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방황하던 나를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사역의 길은 뒤돌아보면 내가 선택하여 온 길이 아니고 주님이 강권적으로 이끌어 주셔서 걸어온 길이다) 지난날을 생각하며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에 진정 진실한 목회자로서의 사명과 아름다움이 무엇이며, 신앙의 참 가치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인생이 무엇이고. 사람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얼 먹고 살 것인가. 누굴 의지하고 살아야 하나. 이 무거운 짐을 어찌할 것인가. 젊은 날에 방황했던 것을 경험으로 삼아서 신학교에서 고민하는 신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방향을 잡아 주고자 노력했다.

내가 인생에서 방황하던 날 청주제일교회에 탁구를 치려고 갔다가 만난 하나님은 나의 일생에 큰 변화를 시켜 주었다. 중학교 2학년에 교회에 발을 들여 놨다. 믿음을 알게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나의 손에는 성경과 찬송가가 들려졌다. 예수를 믿게 되었고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삶에 긍정적 변화가 왔다. 당시는 가족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후에 부친도 돌아가시기 전에 교회에 출석했고, 어머님은 권사로 생활했다), 나만은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세례도 받고 학생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했다. 신앙은 젊은 날, 나를 붙잡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나침반이었다.

그해의 성탄절은 나에게 꿈만 같았고 천상의 음율 같은 것은 젊은 시절의 남달리 아름다운 추억 때문이다. 잊지 못할 추억의 학생 시절이다. 새하얀 눈길을 뽀드득 뽀드득 밟으며 성탄절 새벽에 집집을 방문하며 찬송했던 고운 추억이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을 찾아오신 성탄절이었다. 그때는 어찌 그리 눈이 많이 내렸던지, 지금도 기억 속에서의 성탄절 이미지는 아득한 눈발과 새벽하늘에 외롭게 뜬 별로 그려져 있다. 나는 깨닫게 되고 내안에 어둡고 힘들게 했던 그 문제의 정답을 찾은 그 순간 밝고 강열한 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성균관대학교 교복을 입고, 가족사진

‘너는 내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인생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하며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지를 한 번도 고민해 본적이 없다. 내가 사는 이유, 나의 존재의 이유를 너무나 분명히 알았기에... 기도 중에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걱정 마라. 평생에 너와 함께 하리라.’ 사도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만남이었다.

나의 삶은 새로운 빛을 보았다. 상함과 폐함이 없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는, 불의에서 하나님의 의로 가는 은혜의 길을 찾았다. 주님이 준비하여 펼치신 계획에 감격하고, 평생 누리며, 쓰임 받는 견고한 성이었다. 후회함 없는 주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셨다. “나와 함께 가자.” 세태에 현혹되거나 풍파로 되돌아보고, 후회하지 않는 길을 택한 것이다.진리요 생명인 주님이 감격의 만찬에 귀빈으로 초대해 주셨다. 주님과 그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구원의 강렬한 빛을 보았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의 길을 정하게 되었다.

일본인의 유명한 전자 공학자였던 후쿠시게 다카시상은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신했던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약한 자가 되었지만 천하보다 귀한 천국을 소유했음에 눈물 흘리며 감격했다. 스키장에서 뇌경색으로 쓰러져 21일간의 혼수상태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예수님을 만나 기적적으로 회생되었다. "당신 누구세요?" 라고 묻자 ‘나사렛 예수’ 라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다카시상 눈앞에 서 계셨다. 물 좀 달라고 하자 하늘색의 아름답고 빛이 나는 물을 손으로 세 번 부어 주셨다. 물을 받아 마실 때 등줄기를 타고 온 몸에 힘이 생기며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거센 거대한 강 앞에 서 있고 무서운 물결에 온갖 것이 떠내려가는데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강을 건너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손을 잡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졌다. 다카시상의 간증처럼 내가 살던 시기를 가만히 돌아보니 수 없는 정변을 건넜다.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로부터 어려운 과정을 고비마다 지나 왔다.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라’(눅21장 19절)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같이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내를 기술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 기술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잘 견디어내는 사람은 항상 이기기 마련이다. 참아낼 줄 아는 사람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모럴리스트 보브나르그)

◇장성우 목사 누구인가

△1939년 청주 출생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대학원, 동아대학교대학원졸, △미국 훼이스대 목회학박사, 대전대 행정학박사 △한민대 교수역임 △강남제일교회, 중부교회개척 △그리스도의교회총회장역임 △2006년 크리스챤문학으로 시인등단, 한국문인협회회원, 국제펜크럽한국지회회원, 시집 ‘카이로스의 만남에서’ 출간

외로운 밤에 고해

그 밤에 나는 울었습니다
사랑한다고 주님 앞에 고백했던 나를
어두움은 배신의 밤으로 이끌고 가는 그 밤은
닭의 울음소리에서 깨어날 때
살고 싶은 욕망에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외로운 밤 고독한
연약한 내가 고해로 지새우며
하늘을 보며 울었습니다
그 밤은 모두가 떠난 텅 빈 껍질만 있는
아무도 나의 몸부림에 대답이 없는 밤이었습니다

사죄해도 은총이 없는 밤
그 밤은 어두움이 깔린 하늘이 저주를 내린 밤이었습니다
찬 서리가 나리는 밤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밤에 나를 잃고 하늘을 보는

그 밤은 고해로 얼굴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훔치면서
소리 내어 울던 밤 사랑을 배신한 자신을 저주한 밤이었습니다
처절한 고뇌로 사투 벌린 어둡고 외로운 밤
나의 고해가 아직도 남아 있는 외로운 밤이었습니다.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4): 나의 대학생활과 신학공부

대한기독교신학교 6회 장성우 졸업식 사진
김묘암권사, 김순옥, 장성우, 최윤권, 김정인

1959년, 나의 생에 전환기를 가져 온 해이다. 서울을 한 번도 올라 간 적이 없다.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충청북도를 떠난 적이 없다. 정말로 촌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에도 대학교가 있었지만, 서울에서 공부를 하려고 친구를 통하여 성균관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상경하여 입학시험을 보았다. 다행히 합격이 되었다. 서울에서 대학생 생활을 하게 되었다. ‘금요회’라는 청량리를 중심으로 한 각 대학의 대학생 서클에 참여하면서 각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제함으로써 행복한 학생시절을 보냈다.

종로4가 명륜동에는 성균관대학교가 있는데 대학생 시절에 이곳을 오갔는데, 성균관대학교 안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높이 26m, 가슴높이 둘레 12.09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로서 성균관대학교 명륜당 경내에 서 있는데, 임진왜란(1592)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아침에 등교할 때 전차 값이 없어서 걸어서 학교에 가면서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그래도 열심히 다녔다. 아침저녁으로 대학교교문 앞에 서있는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면서...

서울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지나는 하루하루는 등록금이 없어서 숱한 역경을 딛고 살아온 수난의 기간이었다. 아픔은 고통과 슬픔이 응어리진 ‘눈물의 꽃’이었다. 삶의 길속에 모진 추위 속에도 제 몸의 체온으로 쌓인 눈과 언 땅을 녹이는 노오란 얼음새꽃, 시련을 뚫고 나오는 얼음새의 강인한 기개를 키우는 시기였다. 얼음새꽃은 추위 속에도 그만이 지닌 향기를 잃지 않는다. 무모한 상경생활로 고통의 하루하루를 지내며 갈 곳이 없으면 총총히 떠있는 별을 헤이면서 파고다공원 벤취의자에서 새우잠을 잤다. 등록금을 벌기위해서 밤을 새워 중앙산업에서 큰 벽돌을 밤새도록 옮기는 일도 했다. 그래도 을지로 6가 동물병원을 하는 집에서 초등학생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때가 안정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청량리에서 답십리 쪽으로 가다가 길거리에서 각혈을 하게 되어 부흥회를 하는 교회에 들어갔다가 강한 말씀의 은혜를 받고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전인적인 치유가 이루어졌다. 영의 치유는 인간이 성령의 감화 감동을 통해 거듭남으로 죄와 사망의 질병에 놓여 있던 나를 폐병에서 치료해 주셨다. 성령으로 치유되어 하나님을 똑바로 알게 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사랑을 드리는 존재로 변화되었다. 치유 받은 후에는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변화가 일어났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치료가 불가능하던 병에서 놓임을 받았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결핵을 앓으면 죽음의 길이었는데, 치유의 은혜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기적적 은사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여 목회자로, 교수로 뜨거운 삶을 사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너무나 필연인 이름, ‘장성우 張聖愚’를 지어주신 부모님, 베풀 장, 성스러울 성, 어리석을 우, ‘베풀면서 성스럽지만 어리석게 살아라’는 ‘바보처럼 어리석게 사는 것이 성스럽게 사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손해를 보면서 사는 삶을 교훈처럼 생각했다. 이름을 지어줄 때에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시지 않았는데 성스럽게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어주셨으리라. 기도하면서 일생을 베풀며 이름을 지어 주신 것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온 것은 큰 은혜였다.

사선을 넘어 죽음처럼 아프게 살았던 대학생활의 삶은 그 후에도 항상 마음을 강하게 하며 살았던 임전태세에 삶을 살게 만들었다. 항상 ‘저쪽에서 오는 구름처럼’ 목마름의 영혼에게 비를 뿌리고 지나고, 마음속에 푸른 꽃으로 응어리진 통한을 여과 없이 흘러 보내고, 그 눈물의 향기가 온 세상으로 널리 퍼져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며 살았다.고통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분이 누구인가. 사람을 창조한 분이 누구인가. 죽음 후에는 어떤 세상이 존재하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였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신학을 공부하자.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이 최고의 삶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학교 3학년에 편입을 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아, 내가 기대하고 배우기를 바랐던 학문이 바로 이것이구나.’ 했다. 신학을 조직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대학에서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지만, 신학은 지적호기심에 도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신학을 재미있게 공부하였다.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죽음! 나에게 다가왔던 죽음에 이르는 병은 실존을 찾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가르쳐 준 최고의 스승이었다. 신학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대학생 시절을 생각하며, 후배들에게 ‘인생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인생은 어릴 때부터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다.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손으로 빚으시면서 쓰실 만한 그릇들로 만들어 가신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성숙 과정에서 실패하는 일도 있고 깨지는 일도 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과정도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생이 탄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다.

나는 부족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 사랑하고 도우면서 한평생을 살아오게 된 것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손과 성자 예수님의 구속의 손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으로 이끌어주셨기 때문이고, 어릴 때부터 나를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길로 인도해주신 손길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한평생 동안 부족한 나를 손으로 다시 빚어주시고 새롭게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사랑의 길에 대하여 나는 최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았던 벨기에 태생의 엠마뉘엘 수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가 81세부터 96세가 되기까지 썼던 책 <<아듀>>에 나오는 한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엠마뉘엘은 중증 정신 장애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한 병원에 갔다. 한 여성의 안내로 병원을 둘러보던 그는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의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그의 모습은 흉측했고 비뚤어진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안내자는 두 팔을 덜렁거리고 있는 그 환자의 긴 몸뚱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두 팔로 안아 일으켜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 위에 간신히 걸쳐 있는 그 남자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고 환한 미소를 보냈다. 어느 순간 초점 없이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두 눈동자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때였다. 뭔가 생명의 섬광 같은 것이 그의 둔한 얼굴선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안내자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머!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지금 느꼈나 봐요!”

그녀는 품에 안은 남자의 몸을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주면서 오랫동안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남자의 표정이 차츰 밝아졌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부드럽게 속삭였다. “세상에! 이제 잘생긴 귀공자가 되었네!” 잠시 후 그 안내자는 엠마뉘엘에게 말했다. “난 내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모두가 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입을 벌리고 있는 남자는 빛을 흘리고 있었다. 엠마뉘엘은 그 광경은 세상을 초월한 장면이었다고 말한다. 그 장면이 오랫동안 엠마뉘엘의 삶을 비추는 빛이 된 것이다. (엠마뉘엘, <아듀>, 오래된 미래, 355-7)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기에

그리스도가 가신 골고다의 길이기에 당신은 가야 합니다
모두가 버리고 떠난 땅이기에 당신은 가야 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사명의 길이기에 당신은 가야 합니다
모두가 버려 버린 헐벗은 저들이 있기에 당신은 가야 합니다.

후렴

슬프고 고독하고 외로워도 주님이가셨기에
자유와 평화를 찾아 당신은 가야 합니다.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5): 필운동그리스도의교회 출석과 성낙소 목사

신문을 보고 전화를 했단다. 너무나 반가웠다. 필운동교회에 다닐 때 나는 집사였고, 학생이었던 박헌철군이 감리교목사로 충북진천제일교회를 시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여명이 모이는데 교회를 짓고 부흥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충북 진천에 찾아가서 즐거운 상면을 했다. 중후해진 중진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사역하는 박헌철 목사가 대견했고, 아름다운 교회에 귀한 성도들의 행복한 모습은 너무 좋았다.

인천고아원에서 그리스도의교회 수련회중에
인천 해변에서, 김진문목사, 이종만목사, 최순운목사, 장혁,
김순옥사모, 장성우, 김문태장로

필운동교회에 성낙소 목사가 시무하실 때, 장모 김묘암 권사의 온 가족 김종기 목사(만목교회시무), 김종부 장로(예수사랑교회), 김순옥 사모(장성우목사 사모는 주일학교부터 필운동교회를 다녔고, 숭의여고를 나온 후에 대한기독교신학교가 세워질 때 초창기 1회 졸업생이다), 김정인 목사(한성신학교 교수역임, 재미), 김종현 목사(강남제일교회 후임)가 출석해서 섬긴 교회였다.

성낙소 목사가 돌아가신 후에 후임으로 김진문 목사, 최순국 목사, 박시래 목사, 유봉현 목사, 김규상 목사, 오수강 목사가 시무했다. 필운동그리스도의교회는 훌륭한 목회자와 신앙인을 많이 배출했다. 이 교회 출신 목회자로는 조충연 목사(홍제동교회), 이강평 목사(2016년그리스도의교회세계대회회장), 김탁기 목사(협의회총회장), 송경언 목사(충주에서 목회), 김종기 목사, 김정인 목사(재미), 김종현 목사, 이동주 교수 등이다. 조충연 목사는 당시 전도사로 있었는데 홍제동교회를 개척했다.

이강평 목사는 서울 종로구 무악동에 장모님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장모이신 김묘암권사님이 그 부친을 전도를 해서 온 가족이 필운동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 당시 이강평은 학생이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이동주 교수는 필운동 교회에서 반주를 하는 이대를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다가 국비장학생으로 독일에 유학을 가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와서 협성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저명한 사회 인사들이 필운동교회 출신이 많이 있다.

장로장립식 후에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 중앙에 담임 김규상목사

필운동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최초의 교회(유악기)이기에 그리스도의 교회 정신이 투철했다. 성낙소 목사(1937~1964)는 1930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동경에서 선교하던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 커닝햄(Cunningham) 목사및 체이스(Chase) 목사와 연결되어 1931년에 귀국하여 1932에 서울 종로구 내수정 106-1번지에 '내수정 기독지교회'를 개척하였고, 1937년에 서울 종로구 필운동 289번지에 대지 42평의 초가를 매입하여 '필운동 기독지교회'를 시작한 것이 필운동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이다.

성낙소 목사는 환원운동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했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교회 외는 다른 교회를 세우신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매주 성만찬을 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 성낙소 목사는 한방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어려운 시절에 병원에 갈 수 없는 아픈 사람이 오면 손수 한방치료를 해 주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침례를 하지 않는 약식세례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고,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작은 키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예배시간에는 설교시간에도, 성만찬에도, 광고시간에도 ‘오직 그리스도’, ‘성만찬’, ‘침례’를 강조했다. 초기에는 많이 모이지는 않았어도 알찬 교인이 교리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뜨겁게 모였다.

1968년 대한기독교신학교(서울기독대학교)에 편입한 나는 신학교 6회 동기인 박시래 목사가 필운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할 때, 1969년 필운동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침례가 성서적인 것임을 깨닫고 1970년 년초에 최윤권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1971년에는 성낙소 목사의 아들 성수경 목사의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요강’을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1970년에는 오래된 필운동 단층 교회를 3층 교회로 개축하였다. 교회를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릴 때 정말 감격이었다.

대한기독교신학교 초창기 용산임시교사 앞에서
맨 앞에 앉은 사람 김순옥사모. 여자 다음에, 김진문목사, 성수경목사, 최윤권목사, 김규상목사

1975년에는 필운동교회에서 집사안수를 받았고(나는 25세부터 총각집사로 있었다. 결혼할 때도 총각집사였다), 교회재정부장으로 임명되어 봉사하던 중에 1975년에 한국그리스도의 교회총회 회계로 선출되었으며, 이때부터 총회와 관련을 맺고 계속 총회임원을 맡는 계기가 되었다. 1976년 2월 15일에는 필운동교회에서 김종기, 김종부, 김문태와 함께 4명이 장로안수를 받았다. (후에 김종기 장로는 한성신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염광교회, 수룡교회, 만목교회를 시무하고, 김종부장로는 이강평목사와 함께 영동에서 예수사랑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여 장로로 시무하고, 현재 협의회부총회장으로 있고, 아들 김재영 교수도 영동교회(예수사랑교회)장로로 있다. 김문태장로는 고추장을 만드는 회사를 차려 성공해서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업가로서 교회들을 돕고 있다, 나는 장로로 안수 받고 사업을 하던 이때는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강남에서 하던 사업의 실패로, 1976년 해남 동리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1978년 12월 10일에 강남제일그리스도의교회를 서울에서 개척했고, 1979년 12월 13일에는 홍제동교회당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총회 주관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첫째, 교회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교회’이어야 한다.
둘째, 교파교회의 명칭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넷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몸의 지체이다.
여섯째, 교파적 신앙과 주의를 경계하여야 한다.
일곱째, 모든 교파는 신약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여덟째, 교파분열은 비성경적이다.
아홉째, “신앙하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를 수(受)하고, 신자가되면 주일성찬으로 예배하는 신약 중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일(唯一) 교회이다.

 

장로장립식에서 김태수목사가 까운을 입혀주고 있다. 김태수 목사는 후에 도미하여 미국 워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닌데,
구름 너머
먼 길로 떠나갔네요.

후일을 기약하며
죽고자 하는 자
한 알 밀알 썩어 가기에,

그냥
붙잡지 못했습니다
찰나에, 잃고 말았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안녕하며,
뒷모습으로 조용히 떠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