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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02 10:51
장성우 목사 자전적 에세이(11-1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332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11): 소명을 받고 신학자의 길을 가다

한성신학교 교수 시절에 졸업식에 참석하여

요즘이야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면 홍수처럼 쏟아지는 각종 정보를 만날 수 있지만, 정보가 없던 시절에 동도교회 최훈 목사님은 나의 삶에 방향을 정해주신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다. 최훈 목사님은 동도교회를 은퇴 후에 동도교회가 세운 천마산 기도원에서 노년에 보내셨는데, 합동측 총회장을 역임하신 모두가 존경하는 훌륭하신 목회자였다. 내가 만난 목회자 중에 잊을 수 없는 훌륭한 목회자 중의 한사람이다.

서울에서 개척교회로 시작한 강남제일교회가 30평에서 100평 교회로 옮기고 교회가 부흥되고 있을 때 나는 서울성서신학교와 한성신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을 했다. 그때 대전 한성신학교에서 전임으로 청빙이 와서 목회를 할 것이냐, 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것이냐 선택을 놓고 갈등하던 중, 최훈 목사님에게 고민을 털어 놓고 상담을 했다.

최훈 목사님은 자신이 젊었을 때 강원도의 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청빙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선택을 놓고 갈등이 되어 천마산기슭에서 모포를 쓰고 비닐을 쳐놓고 깊이 기도를 하였단다. 월요일부터 시작한 기도가 목요일이 되어도 응답이 없어 초조하게 지내다가 금요일 마지막 밤에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고 있는 그곳으로 예수님이 자박자박 낙엽을 밟으며 산길을 걸어 오셨다,

“최훈아, 최훈아, 네가 무엇을 고민 하느냐?” “예, 예수님, 강원도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청빙이 들어 왔는데 목회를 할까, 대학교 교목으로 갈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도교회는 개척교회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할런지 고민입니다.”

신학교교수로 가도록 조언해 주신 최훈 목사님과 함께
천마산기도원에서

그 때 예수님이 최훈 목사를 천천히 바라보시며 “내가 이세상의 모든 것은 말(언어)로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만은 내 피로 세웠느니라.” 하시기에 “예수님, 예수님”하고 부르다가 눈을 뜨니 비몽사몽간에 꿈이었다.

“나는 그래서 응답을 받고 교회를 선택하여 동도교회를 1000명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었는데, 장 목사는 신문에 칼럼을 쓰는 것을 보던지, 책을 내는 것을 볼 때 목회보다는 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더 취향에 맞을 것이야” 하고 조언을 해 주셨다. 갈등하며 고민 속에 방황할 때 결정적 교훈을 주신 것이다. 이 만남의 조언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 목사, 신학교로 가라. 후진들을 잘 가르쳐서 훌륭한 목회자로 키우도록 하게.’ ‘개교회를 부흥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학생을 잘 가르쳐서 목회자로 키우는 사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내 가슴 속에 신학자로 사명을 심어주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장 5∼6절)

꿈을 갖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면 할수록 신학교로 가는 꿈이 선명해졌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바로 기도의 응답이었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이었다. 오랜 갈등 끝에 마음은 벌써 신학교 강단으로 가 있었다.

한민대학교 표지판

서울의 강남제일교회는 전도사로 있던 김종현 목사에게 후임을 맡기고, 나는 학문의 길을 가시로 결심을 했다. ‘가자, 신학교 교수로 가자.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셨다.’ 신학교 교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신학교에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다. 나만 대전에 셋집을 얻어서 살고 가족은 서울에 거주하다가 서울 집을 팔고 대전에 모두가 내려와 상주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예수 없는 인생, 예수 없는 젊음은 얼마나 허허로운가. 신앙을 가진 것이 축복이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이 원격조종하고 계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두려움 없는 도전이었다. 그 이후 신학교교수 생활은 삶의 목적을 바꾸어 놓았다.

복수초 즉 얼음새꽃, 겨울이 왔을 때 좌절하지 않고, 푸른 용기로 몸에서 발생하는 열을 품고 겨울을 보낸다.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맞아들이는 새봄을 한층 성숙하게 만들었다.

나는 항상 배우기를 즐겨한다. 그래서 계속 공부했다. 가르치는 것은 내가 알아야 하기에, 나는 가르치면서 평생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많은 선생을 만났고 많은 학교를 만났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내가 가르친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스승이 되기를 바랐다. 학교 강단에 설 때 강의가 저들의 장래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랐다. 그들의 사역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가르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졸업하고 목회자가 된 제자가 와서 “교수님, 신학교에 들어 올 때에는 부모님의 권유에 못 이겨서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교수님의 강의가 내가 목회자가 되도록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때는 고맙고 감사하며 오랜 시간 저들을 가르친 보람을 느낀다.

온갖 역경을 이겨 가는 노오란 얼음새꽃, 은은한 향기를 내면에 감춘 채 살아가는 속 깊은 꽃, 칼바람과 살점을 얼리는 눈발도 얼음새 꽃은 몸에서 열을 발하여 주위의 얼음을 촉촉이 녹이며, 노오랗게 아름답게 피고 있다.

내 생명 촛불이 되리라

하얀 눈물을 흘리며 촛불이 되리라
받은 생명 태우다가 지우리라

고통 속에 신음하며 길을 잃은
너를 위하여 사랑하며,
애끓는 정을 촛불처럼 비치리라

하늘을 보고 땅을 보는 사람아.
시뻘겋게 고뇌하는 넌, 불처럼 사는 사람,

잠들 수 없는 밤에도
나는 가슴에 촛불을 켜고
어둠 속에 오는 새벽을 기다리며
희망을 덧칠을 하고,

슬프게 울고 가는 너의 모습에.
나는 촛불로 타다가 흘러서 농이 되어
너의 영혼으로 가리라

외롭고 고달픈 길에서
만난 사람아,

혼자서 외롭게 되어
서편 하늘을 보며 서 있는 너에게
오늘도 울어 주리라.

내 한 몸, 녹여 보답이 된다면,
폭포처럼 흘러 애끓게 흐르는 눈물로
너의 마음을 열고.

갈 곳을 잃은 새벽녘 역 앞에서
서성이는 너를 위하여,
내가 함께 몸을 사르며
거기 있을 것이다.

모두 가버린 아스팔트 싸늘한 길 위에서
쩔뚝이며 가는 너를 위하여
종말처럼 다가온 오늘의 자리에서
촛불이 되어 태우고 있으리라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12): 4.19의거와 흥국직업소년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과 재학중 사진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학생들이 약속했던 계획에 따라 총궐기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학생들은 더 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 없으며 정의와 민주수호를 위해 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과대표로 있었다. 우리 과에서도 데모에 참가하여 중앙청으로 향하였다. 이때거리에는 많은 고등학생들이 데모에 참가하였다. 3.15 부정선거와 제1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4.19 학생의거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 발견된 김주열의 바다에서 발견된 시신으로 인한 제 2차 마산의거, 4.18고려대 시위를 비롯하여 4.25교수단 시위 등 민주항쟁이 그것이다. 4·19 후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사망자 약 100명에 부상자 약 450명에 달한 희생을 가져온 데모는 계엄군의 진주로 다음날부터 일단 멈췄다.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로 끝이 났다. 장면정권이 들어섰다. 이때 우리는 청량리 창녀촌에서 일하는「펨프」소년, 소녀들을 위해서 흥국직업소년학교를 열었다. 서울의 각 대학교 학생들이 와서 무료로 선생으로 봉사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많은 신문에 보도되면서 후원자들이 도왔다.(이때 동아일보를 비롯해서 많은 신문 사회면에 크게 보도 되었다)

직업학교는 청량리 ’금요회‘라는 대학생 써클이 주관하여 청량리동사무소로 전에 쓰던 낡은 건물을 빌려서 세웠다. 대학시절에는 형제 같은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행복한 시절이었다. 안영기, 이기곤, 최상희, 강덕모, 정현우, 변해룡, 문기석, 김한구, 등 귀한 동지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학생시절은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많은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학생 300여명을 모아서 남녀 대학생들이 가르쳤다. 여자선생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많이 왔다. 나는 그때 청량리 588지역에서 헌책방을 운영하였는데, 고향에 다니러 간 사이 서점 난로에서 화재가 나서 청량리역 곡식창고가 타버리고 서점이 잿더미가 되었다. 답십리로 가는 청량리굴다리에 밥퍼 최일도 목사가 무료급식소는 감회를 새롭게 한다.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

장면 정권의 혼란이 계속되는 정국에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 주도로 쿠데타 세력은 한강을 건너 수도의 국가권력을 장악해나갔다. 5·16군사정변은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나는 흥국직업소년학교 교무실에서 군복을 입은 혁명군에 의하여 동대문경찰서에 잡혀들어 갔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조건 경찰서에 들어가자 말자 군화로 엉덩이를 차면서 “너 빨갱이지”하며 엎드려 ‘뻣쳐’하고 “네가 서울운동장에서 아리랑을 부를 테니 평양운동장에서 아리랑을 부르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지, 너 누구의 지령을 받은 거야” 하며 자술서를 쓰란다. 서슬이 퍼런 저들이 하라는 대로 썼더니 구치소에 잡아넣었다. 구치소에는 고대생을 비롯하여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잡혀와 있었다. 고대총학생회장 이세기, 후에 국회의원, 통일부장관이 되었고,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된 유근일 등이 잡혀와 있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세균학 교수로 일하였는데,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만세 현장의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으며,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4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대기 책의 제목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일본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며,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은 고아와 과부, 병자, 빈자를 돌보는 선교사로서의 희생정신을 보여준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박사(석호필)를 후원자로 만났는데, 스코필드 자서전 책에 나오는 내용 중 하나처럼 1959년에 한국에 영구 귀국하여 흥국직업소년학교를 열심히 도왔다. 1970년 4월 12일에 돌아가셔서 외국인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한국-캐나다 두 나라 관계의 역사에 있어 중심이 되는 분이다. 이때 한하운 시인도 만났다.

성균관대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나의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내가 방황할 때도
지비로운 눈빛으로 조용히 보시며
긴 침묵으로 기다리셨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할 때도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끝없는 기도로도
나의 허물이 제하여지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주님은 용서해 주신다고
조용히 대답하십니다

살면서 내가 배신으로 아파할 때도
주님은 내 손을 잡으시며
내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슬프고 아픈 배신을 맛보았노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것이 배신의 아픈 가슴을 안고
살아있는 나의 몫이라면,  

눈물을 삼키며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우리의 슬픈 영혼을 바라보시며
한없는 용서를 하시며

외롭고 고달픈 삶에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자비의 손길을 펴시겠지요

이 땅과 저 세계로 이어지는 영원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승리하며 살겠지요.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13): 사회과학에 접목 신학논문을 쓰다

한가한 시간에 사진을 찍고 있다

영국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변장을 하고 시골 여행을 했다. 한 동네에서 채플린 흉내 내기대회가 열려 참가했는데,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1등이 아닌 3등이었다. 찰리 채플린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그를 흉내 내고 1등을 차지한 것이다. 그 동네에선 가짜가 진짜를 밀어내고 가짜가 진짜가 된 셈이다.

서글픈 현실은 그 동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동네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동네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 안에도 가짜가 판을 치고 있어서 진짜 그리스도의교회가 들어갈 틈이 도무지 없다. 성장만을 추구하는 성장주의가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도 자라기 위해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교회도 성장을 위해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성장을 위한 단순한 성장통 수준을 넘어 성장주의로 인한 최악의 병리 현상을 겪고 있다. 한국교회는 균형에 중심이 무너져 버렸다. 교회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개교회 성장만을 위한 전도용 프로그램들로 도배되어 있다.

정년을 앞둔 내 인생은 최고의 완숙기에 접어들었다. 무엇인가의 마무리를 완숙하게 하기 위한 것이면 설사 칼날일지라도 움켜잡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혼 속에 안일하게 하루하루를 지낼 수 없다는 아우성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획기적인 방향을 설정했다. 환갑이 되면 대다수 교수는 논총을 내는데, 나는 학위에 도전하여 논문을 쓰기로 작정하고 대전대학교대학원에 박사과정에 도전하기로 했다.

행정학박사과정이 신설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입학을 위하여 행정학부장인 박정택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 나는 현직 신학대학 교수로 있는데, 실천신학분야에서 교회행정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하여 박사과정에 입학하고자 합니다. 입학원서를 접수해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박 교수님은 ”이번에는 대전대학교에 처음으로 행정학박사과정이 신설되어 지원자가 많아서 어려울 것입니다. 차후에 응시 하시지요“라고 했다. 접수만 해달라고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실천신학에 공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좋은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나님, 믿습니다.’하고 기도했다.

대전대학교행정학박사학위수여식에서

믿음으로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박 교수는 “정말 기적이예요. 다른 학과 티오를 가져와서 합격을 했어요. 축하해요” 한다. “나는 목사입니다. 여기에 들어 온 목적이 좋은 논문을 쓰는 것이니 잘 지도해 주셔서 3년 만에 논문 통과가 되도록 해주세요”하고 부탁했다.

박 교수님은 “새로 신설된 박사과정인데, 1회 졸업생을 어떻게 3년 만에 논문을 통과시킬 수 있겠습니까. 열심히 해보세요.” 했다. 그래서 입학과 동시에 박 교수에게 논문지도를 받았다. 하나님은 기대와 소망을 뛰어넘는 크고 비밀한 것을 감추어 놓으셨다. 재학생들과 교수들이 최초로 생긴 행정학과에서 1호 졸업생 논문을 3년 만에 통과 시킬 수 있는가 반대했지만, 심사를 거쳐 3년 만에 기적으로 논문을 통과했다. 큰 은총이었다. 논문을 도와준 동료교수인 조동호 교수와 팽필원 교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2012년 1월15일에 논문을「韓國敎會 分析과 展望 -體制理論的 接近-」책으로 엮었는데, 체제이론을 교회체제에 적용시켜서 한국교회 분석을 했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면서 한국사회는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가정문화가 해체되면서 수직구조 문화가 수평구조 문화로, 단일민족에서 다민족사회로, 신세대들의 출산기피, 초고령화 사회진입, 경제구조의 세계화로 변하고 있다. 실천신학을 강의하면서 신학과 행정학을 접목하여 한국교회를 분석하는 책을 펴내게 되었다.

책 표지

삶이 힘들 때

삶이
무척 힘들 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행운인 것을 알게 되지요

봄이 지나간
자리에도 꽃이 진 나무에도
지나온 많은 날이
더욱 새로운 것을

삶이 힘들 때
그 중심에서 소리치는 음성은
사랑하는 것이기에  

하늘에서 해맑은 햇살이 쪼이고
땅에서 생명이 자라고
오늘, 내일이 나에게 오고 있으니

삶의 근심을 다 내려놓고
깊은 숲, 바람 이는 한적한 곳을 찾아서
새로운 생명을 찾아서
앞으로 한 발자국
그리고 두 발자국

그대가 숲 속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하루를 만들고,

 

장성우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14): '보이지 않는 손' -섭리와 계획-

처녀시절에 김순옥사모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컴퓨터보다 치밀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된다.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하나님은 헤아리신다.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였다. 선택하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스라엘을 예정하시고 점찍으셨다. 그 후에, 이 역시 영원 안에서이지만, 모든 것을 예정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특정한 택함을 통하여 그 삶을 전폭적으로 주관하시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심지어 하나님 자신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창세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를 예정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장 1절-5절)

제대하고 30살이 되었는데, 가정을 꾸밀 자신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체신부 공무원으로 있었다. 공무원 봉급으로 도저히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출근하는 아침에 또 동생이 먼저 결혼을 해야 하는데,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어머니가 성화이시다. 그래서 귀찮아서 지나는 말로 "어머니, 나는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예요, 신학교를 졸업한 여자가 있으면 몰라도, 결혼은 안할거예요."하고 출근했다. 이 말 한마디가 섭리 속에서 한 여인을 만나는 계기가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대한기독교신학교 제1회 졸업사진

서울 종로구 무악동에 살았는데, 어머니가 조카를 데리고 뒷산에 올라갔는데, 옆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도 아이를 데리고 그늘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장가를 안가는데 신학교를 졸업한 규수가 있으면 장가를 간다고 하니 찾을 수도 없어서 걱정이예요.” 했더니, “우리 딸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28살인데, 신랑감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하고 이야기가 되어서 두 어머니는 앨범에 있는 사진을 교환했다. 인연이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다. 한집 건너에 살고 있었는데, 다니는 길이 달라서 옆에 살았지만, 알지 못하고 지냈던 것이다.

나도 며느리를 찾고 있었다. 아들이 서울사당동 남성교회전도사로 있었는데 28살이 되었다. 아들이 목회를 할 것인데, 좋은 사모가 필요하여 ‘하나님, 목회는 목사뿐 아니라 사모가 중요합니다. 아들이 목회를 해야 하는데 좋은 사모감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 카이스트에서 교수수련회가 있었는데, 교육부에 전화를 걸 일이 있어서 카이스트교회에 갔다가 교회간사로 있는 박금안을 만났다. 침신대 성악과 졸업반이었다. “우리 아들이 전도사로 있는데, 사모가 되어 주지 않겠소” 하고 물어보았다. “예” 하고 대답했다. 인연이 되어서 결혼을 하였다. 내가 첫 목회를 시작했던 해남출신인데 8남매 중 4째이다. 아버지가 장로님이시다. 좋은 사모가 되어서 훌륭하게 목회를 하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내가 목회자가 된 것도 장모님이신 김묘암 권사님의 영향이 컸다. 목회를 권하시며 “세상에서 깡통 차고 밥을 빌어먹으면 거지이지만, 성경을 끼고 밥을 얻어먹으면 대우를 받는 것이야, 세상에서 굶어죽으면 객사한 것이지만, 목회하다가 굶어죽으면 순교하는 것이지.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망하는 것 같아도 망하지 않는 축복 받은 길이지” 했다. 장모님은 91세에 돌아가시기까지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하셨던 기도의 어머니시다.

내가 목회를 하고 자녀들이 전도사, 목사가 된 것도 장모님의 영향이다. 아내는 숭의여고를 졸업하고 서울기독대학교(대한기독교신학교) 1회 졸업생이다. 서로 만나며 신뢰를 쌓아갔다. 김순옥. 아내의 이름이다. 큰 오빠는 만목교회를 시무하시는 김종기 목사다. 둘째 오빠는 영동교회에 시무하는 김종부 장로이고, 동생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김정인 목사, 막내는 김종현 목사다. 장모님은 4남 1녀 모두를 신학교에 보냈다. 자녀 3형제가 목사가 되고, 1명은 장로안수를 받고 딸은 나와 결혼하여 사모가 되어서 사역을 한다.

결혼식 사진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원대한 꿈을 이루는 기회를 주옵소서. 지식을 쌓아서 조국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만남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되게 하소서." 내 나이 서른이었다. 하나님은 필요를 미리 아시고, 기도한 대로 신앙의 가정에서 좋은 배필을 예비해두신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한복음 14장 1절). 서울 시민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늘이 내린 사랑

깊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지키는 사랑

내가 영혼 속에 넣어두고
수없이 꺼내보는
나의 삶, 생의 전부가 되는 사랑은
그렇게 홀연히 찾아 왔는데

지난 세월 내 기억 속에
파릇한 마음으로
지울 수 없는 생명을 만들어 주었다

내 사랑은
천국에서 깨어 날 사랑이 되어
긴 기도가 되어버린 너의 목소리
날 향해 오늘도 몸부림치는 사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