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15-10-14 21:22
독립투사 오현팔(吳鉉八, 1895-1972) 목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170  

독립투사 오현팔(吳鉉八, 1895-1972) 목사

신약성경교회를 표방하는 한국 그리스도(인)의교회들과 그리스도의교회들의 초기 목회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하였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였다. 몇 분 되지 않은 목회자들 가운데 동석기, 김요한, 최상현, 성낙소, 김문화, 오현팔, 최춘선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있었고, 존 J. 채이스 선교사의 협력으로 1937-40년 사이에 세워진 다섯 개의 교회들<신당정교회(김요한 목사, 미국 에모리 대학교 목회학석사 출신), 돈암정교회(최상현 목사, 연희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 내수정교회(성낙소 목사, 한의사), 산돈암정교회(김문화 목사) 및 청량리교회(박판조 목사)>은 모두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였고, 동시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서 1940-45년 사이에 성낙소 목사를 필두로 이들 목회자들은 일경에 불려가 모진 매를 맞았고, 김요한 목사는 세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김문화 목사는 옥고를 치렀다. 1941년 후반기에는 다섯 개의 교회가 모두 폐쇄조치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암정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상현 목사와 내수정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낙소 목사는 비밀리에 주일을 성수하면서 주의 만찬예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채이스 선교사는 이 사실을 1941년 초와 1947년 초에 단기간 입국하여 직접 확인한바가 있다.

한때 <신학세계>의 편집인이었던 최상현 목사는 해방 후 미군정 때 연락관으로 활동하면서 교회를 지켜냈고, 애국지사였던 최춘선 목사는 김포지역에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거부였으나 6.25동란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데 전 재산을 사용하였다. 그는 별세하기 직전 몇 년간 세상에 ‘맨발의 천사’로 알려졌다. 한의사(무면허)였던 성낙소 목사는 일제의 핍박에 굴하지 않고 한약방을 열어 생계유지를 하면서 교회를 지켜냈다. 더불어 성낙소 목사의 필운동(46년에 개명)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의 일군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독립투사 오현팔 목사의 후손들이 필운동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오현팔 목사의 손자인 오수강 목사는 성낙소 목사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온전히 교회를 위해 바친 김은석 목사와 연락하고 지낸 사이였고, 미국 일리노이 주 소재 링컨기독대학 출신과 재학생들이 합심하여 서울기독교대학교의 전신인 대한기독신학교를 설립할 당시 설립상임위원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오현팔(吳鉉八, 1895-1972) 목사는 자가 여경(呂卿)이며, 호는 호암(虎巖)인데, 본적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이며, 1895년(명치 28년) 9월 3일생이다. 연희전문학교를 1919년 3월에 졸업한 최상현 목사보다 4년 늦은 1923년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9년 2월에 교회를 영양읍 서부동에 창립하였다. 조선야소교장로회는 1921년 2월 25일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오현팔 목사(경북 영양군 영양면 현동)의 포교계를 계출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제2686호 1면(대정10년 7월 23일)>. 1922년 영양경찰서는 오현팔 목사에게 매약행상허가증(賣藥行商許可證)과 함께 매약행상기록부를 발급해주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약사들에게 약품의 처방명, 제조국, 제조자명, 매약업자명, 매약허가사항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보관하도록 하였다.

오현팔은 1913년 9월부터 의성인 김원교, 청송인 윤용암 등과 항일모의 군사훈련을 시작하였고, 1915년 2월에 광복단 본부 밀사로부터 경북도책 간부 및 영양군책에 임명되어 민족정신 고취 밀명을 받아 활약하였으며, 1919년 3월에 독립만세운동 밀령을 받아 영양읍 현동 앞 시골에서 시위하였고, 이후 월남 이상재, 민세 안재홍 등 재경인사와 남정석 등과 항일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영양군 청기면 및 영양읍 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영양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1919년 10월 광복단 밀사이자 상해임정 밀사인 영해사람 이겸호 등과 연락하여 극비리에 소총 등 50여점을 들여왔으며, 본군 석보면 포산리에서 만세운동 중에 군중에게 발포하던 왜경 및 헌병들에게 호암 오현팔 목사의 매부인 안성룡 외 2명이 전사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구금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특히 1930년 1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에 민족단결과 항일애국운동에 관한 시론(詩論) 논문을 게재하여 그 필화(筆禍)로 경상북도 경찰부에 체포 구금된 일이 있었다. 그 후 굴원동지회라고도 하는 오오회(五五會)를 권국찬(權國燦), 이철호(李喆浩), 주원술(朱元述), 조훈석(趙薰錫)과 함께 조직하였고, 오오회를 일방만우회(一方晩友會)로 확대하여 항일독립에 노력하는 한편, 국산품 장려운동과 일제의 농지매입을 반대하는 연사로 활약하면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오현팔은, 1927년 8월 27일자 ‘조선일보’ 보도자료에 따르면, 권국찬 등과 함께 1927년 신간회 영양지부를 설립하였고, 지역 주민들에게 일본상품 불매 및 항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영양교회는 1940년 4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였다. 1942년에는 서울 영등포 경찰서에서 `동양의 간디'라는 죄목으로 장기 구금되기도 했다.

오현팔 목사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지역분할 정책도 비판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영양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1919년에 개척한 장로교회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된 것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것이었다.

오현팔 목사는 “지금까지는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독립 쟁취를 위해 싸웠으나 이제 나라를 찾고 국권을 회복했으니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 각 정당의 초대와 국회의원 공천 등의 유혹을 일체 거절하였다. 더욱이 가족들에게 자신의 항일투쟁사나 그간의 고통과 압박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함구하도록 하는 등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는 결코 나서지 않았다.

오현팔 목사는 자신의 설교문에서 말하기를, “모리적(謀利的) 신앙가와 사대적(事大的) 신앙가들에게 속지 말고 성경대로 살려고 힘써야 할 것 아닌가. 하나님 앞에 통일교니 감리교니 천주교니 성결교니 장로교니 안식교니 하는 교파가 곧 당파가 용인될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교회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이자. 이것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뜻일 것이다.”고 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또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되심으로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순종하려는 교회다. 성경을 이탈해 규칙을 만들어 교인을 구속하고 마취시키는 수단과 방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어그러진 시대에서 예수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풍요로웠던 재산을 독립을 위해 모두 사용하고 남은 것이 별로 없었을 때에도 오현팔 목사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신앙의 본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목회자이면서 한의사로서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의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약을 3첩 이상 짓지 않았고 심지어 돈을 받지 않을 때도 많았다.

주일이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보리갱죽을 해놓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전도자로 삼아 월급을 줘가면서 함께 살았다. 오현팔 목사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고 성도의 모임이라는 것과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삶과 신앙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1963년 3월 1일 영양군수로부터 항일독립운동 공적표창을 받았고, 1971년 7월 경상북도지사로부터 항일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표창을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항일독립운동 및 사회유공자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여받았다. 독립투사 호암 오현팔 목사의 추모비가 경북 영양군 영양읍에 1982년 10월 9일 제막되었다. 오현팔 목사는 1972년에 별세하였다[디지털 영양군지(https://www.yyg.go.kr/yyggunji) <상권: 지리와 역사>: 442-444, 483; <중권: 인물과 자랑>: 60, 221, 474-5; <하권: 민속과 문예>: 393; 최성주 기자, “하나님의 사람은 민족, 사회, 이웃에 책임 있는 모습이어야,” <들소리신문>(입력 2010.08.25.), http://www.ingn.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