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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1-04 22:09
김동수 목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020  

김동수 목사

테일러 선교사는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FCK) 1957년 6월호에서 김동수 목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김동수 형제는 나이가 67세이다. 육신은 날로 쇠하여가지만, 그의 신념만큼은 더욱 새로워지고 강해지고 있다. 그는 이미 9년간 선교부의 통역과 교수로 섬겼으며, 부인이 병약하여 간호에도 힘쓰고 있다. 또 김동수는 행방불명된 네 아들들의 아이들(손주들)을 돌보고 있다<Harold Taylor, “Bro. Kim Dong Soo--,” FCK, 1957년 6월호>.

김동수 목사를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년도는 대략 1952년에서부터 60년경까지이다. 테일러 선교사가 언급한 9년은 햇수로 9년이고, 실제로는 만 8년을 의미한다. 그렇더라고 이 수치는 김동수 목사가 힐 요한 선교사가 해방 후 재입국한 1949년 초창기부터 힐과 함께 사역했다는 의미가 된다. 존 J. 힐 가족은 1949년 2월 18일에 재입국하였다. 힐 선교사를 도왔던 김동수 목사는 최순국이 군에 입대하면서 다시 테일러 선교사를 돕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동수 목사는 해남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테일러 선교사가 영문으로 소개한 김동수 목사의 간증이다.

 

나는 내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내 모든 죄악에서 건져 주셨는가를 생각할 때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밖에는 달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나는 한 때 큰 죄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죄악에서 빠져나올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우셨고 능히 나를 죄의 나락에서 건져 올리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나는 영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일 년 되던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술을 끊지 못했고, 중독이 되도록 마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힘으로는 그 중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구세군에서 예수 그리스도님을 만날 때까지는 술을 끊어보려는 나의 노력이 번번이 허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굴복했을 때 그분은 나에게 술을 거부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하신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 개인의 구세주로 발견하였고, 그분이 내 대신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 구세군에서는 결코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지 않고, 또 그들에게 가르치지 않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나는 어떤 만족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구세군 사역에 오랜 기간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략 9년 전에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존 J. 힐 선교사를 만났고, 그분이 나에게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침례를 베풀어주었습니다. 비로소 나는 마음에 만족을 얻었고, 그로부터 나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교회 사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 해 동안 나를 인도하시고 온전한 구원을 얻게 해주신 주님께 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6.25동란이 터지자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모일 모시에 서울이 폭격을 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난길에 나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오고 있었고, 그들이 말하기를 더 이상 어느 곳에도 숨을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살던 집으로 가지 않고 아들네 집으로 갔습니다. 곧바로 공산군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군들이 우리가 살았던 곳 근처에까지 와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후 3-4시까지 총질을 해댔습니다. 나중에 내가 나가봤을 때 나는 우리가 살았던 곳이 포탄을 맞아 박살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무슨 목적을 갖고 계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뜻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순종하겠습니다.” 내가 전에 살던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은 정말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내게 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때가 1951년 1월 4일 공산군들이 두 번째 남침한 때였습니다. 이것은 내 삶의 많은 체험들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나는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네 명의 아들의 일을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것은 정말 비극이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테일러 선교사는 첨언하기를, “그렇습니다. 김 형제는 슬픔을 아는 사람입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