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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0-26 16:22
성수경 목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409  

성수경 목사

성수경 목사는 성낙소 목사의 아들이다. 1937년 12월 24일 아침에 아버지가 일본 요츠야선교부에서 존 채이스(John T. Chase)로부터 건네받은 명함을 들고 채이스를 찾아갔다. 성수경은 그 때부터 한국인성경훈련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1월경에 촬영된 한국인성경훈련원 학생들의 단체 사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Korean Mustard Seeds,” Korean Messenger(KM), February 1938>.

채이스는 <한국인 전령> 1949년 3월호에서 성수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성수경은 성낙소의 아들로서 29살이며,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다년간 한국인 중학교 교사였으나 현재는 서울(서울에 있는)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고, 장차 자신의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 계획하고 있다. 그는 유능한 일꾼이며, 그리스도(인)의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필운동교회와 위동교회 사이를 아버지와 교대로 오가며 정기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년을 일곱 혹은 여덟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May I Introduce to You,” KM, March 1949: 2>.

채이스가 성수경을 처음 만난 것은 1937년 12월 24일이었고, 1949년 3월에 29살이었으므로 채이스가 성수경을 처음 만났을 때 성수경의 나이는 17살 혹은 18살 때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년을 일곱 혹은 여덟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우리는 이 소년을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로 이해될 수 있다.  

필운동교회는 성낙소 목사가 일제강점기 말엽 한약방(무면허)을 운영하여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중 1943년에 매입한 종로구 필운동 289번지의 42평 초가로써 8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채이스가 1947년에 방문했을 때 필운동교회는 엷은 흙벽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었으나 1948년 말과 1949년 초에 방문했을 때는 벽이 수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예배처소가 필요했던 것은 다른 교회들과 다름이 없었다.

위동교회는 시골에 위치하였고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무렵 위동교회는 개척된 지 6개월 정도 되었으며, 예배처소는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는 친구가 소유한 집이었다. 채이스 선교사가 1947년에 한국에 왔을 때, 성수경은 날조된 살인 누명을 쓰고 서울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고, 혐의를 벗고 석방되기를 기다리는 몇 달 동안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성수경은 채이스에게 말하기를 수감 중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할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성수경은 아버지 성낙소와 교대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위동교회를 섬겼다<“Come with Me,” KM, March 1949: 2>. 채이스 선교사가 단기방문으로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들은 소식은 필운동교회에서 30명, 위동교회에서 8명이 침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The Year 1948,” KM, March 1949: 1>.

성수경은 존 힐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 송월동 32번지의 ‘기독교회선교부’ 재산을 되찾는 일에도 힘썼다. 존 채이스가 힘쓴 10여 년간의 피나는 노력과 존 힐과 성수경의 노력으로 ‘기독교회선교부’의 재산을 1952년 중반 경에 돌려받게 되었다. 그 때의 상황을 존 힐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1951년 7월 3일까지 남자 선교사들이 한국에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필자도 바로 그 날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필자는 부산에서 고아원을 시작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을 만나 뵈려고 갔었을 때, 그분은 필자더러 서울에서 시작하도록 권유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필자의 오랜 친구,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성수경을 찾았으며, 서대문 근처 송월동 32번지에 있었던 구 선교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동행하였습니다. 전항섭은 탄환이 장전된 연발권총을 들고 우리를 쫓아왔으나 우리가 합법적인 재산 소유자임을 알고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건물의 절반을 차지했고, 전항섭도 나머지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약 일 년 후에 미국 대사관과 영국 해외성서공회의 도움으로 우리는 마침내 전씨를 몰아냈습니다. 그 대신 전씨는 정부가 일본인 자산에서 지불한 정착금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필자는 끝내 재산을 되찾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으며, 전쟁 중 폭격으로 부분적으로 파손된 구 건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많은 돈을 들여 수리를 마쳤습니다[John J. Hill, “A Short History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Korea,” <쎄메론> 제7호 편집부(한성신학교, 1972)],

1950년대에 성수경은 존 힐을 도와 ‘기독교회선교부’ 고아원을 보살폈고, 1960년대 이후에는 대한기독교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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