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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1-04 08:34
이기구 목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96  

이기구 목사

이기구 목사는 1952년 10월 3일 신갈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또 같은 지역에 중학교를 세워 건물을 짓고 운영하던 중에 존 J. 힐과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기구 목사는 금광을 운영하는 동서의 도움으로 중학교 교사를 건축하였다. 그러나 5천 달러 정도의 빚 때문에 거의 팔릴 뻔하였다. 졸업생들 가운데 서울성서신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해롤드 테일러는 입학을 거부하면서 고등학교 설치를 주문하였다. 1957년 봄에 시작된 고등학교에 10명의 신입생들이 입학하였고, 그 가운데 7명이 신학교 지망생들이었다. 이 무렵 전교생이 95명이었다.

6.25전쟁이 터진 수일 후 서울은 인민군과 공산주의자들로 넘쳐났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공기를 들고 인민군을 환영하였다. 과거에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보도연맹(국민보호선도연맹) 출신들은 이때다 하여 곳곳에 “인민군환영”이란 현수막을 내걸고 피켓을 들기 시작하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김창준 목사(북한 최고인민상임위원)는 이만규와 함께 1947년 2월 24일 ‘기독교민주동맹’을 출범시킨 좌익세력의 대표였는데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나타나 태평로에 사무실을 내고 ‘기독교민주동맹’ 위원장의 직함을 가지고 피난가지 못한 목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기독교민주동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981); ‘기독공보55년사/ (19)6.25전쟁과 좌익의 득세,’ 한국기독공보(http://m.pckworld.com/article.php?aid=2547989961). 이때 서울에 남아있던 이기구 목사는 성낙소 목사, 한형태 목사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고 ‘기독교민주동맹’에 가입하라는 위협과 회유를 받았으나 그들은 끝까지 “신약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동맹’에 가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존 힐 선교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많은 교인들이 서울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 머물기로 선택한 세 명의 서울 설교자들의 이야기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모든 기독교 세력을 통합하고 통제하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보이는 공산주의 조직인 ‘기독교민주연맹’에 가입하도록 그들을 설득하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집요하게 위협과 회유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목사들은 신약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동맹’에 가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공산주의자들을 역겹게 하였으므로 그들은 우리의 목사들이 공산주의 군대에 적합하지 않다며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기독교민주연맹’에 가입한 많은 목사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6.25전쟁 중에 이기구 목사의 사모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동굴 속에 숨어 있었고, 동굴 입구에 떨어진 포탄의 폭발로 사망한 다른 100여명과 함께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땅을 파고 그녀를 매장하려던 순간 그녀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다는 것을 안 남편 이기구는 그녀를 리어카에 싣고 내달려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다행히 생명은 구했으나 반신불구가 되었다.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가 1956년 3월 26일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모친이 테일러에게 “몸의 한쪽이 마비된 채 힘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듯 그녀(이기구의 아내)의 두상(정수리)에 난 커다란 흉터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회복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기구 목사는 훗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로 넘어 갔다[최윤권, <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서울문화인쇄, 2003):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