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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08 11:26
김정만 목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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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만 목사(1927.5.20- )

김정만 목사는 스스로를 정찬성과 김은석의 제자라고 말한다. 그의 이름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2회 나온다. 김정만은 1957년 11월 19일에 지철희의 결혼식을 위해서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까지 김은석, 지철희와 함께 갔다. 이듬해 1958년 5월 5일 김은석 목사는 집중강의 일정을 통보하였는데, 김정만은 통보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김정만은 부강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초기에 공부하였고, 정찬성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김정만은 충북 중원이 고향이다. 1945년 12월 하순경에 정찬성 목사가 시무하는 이웃마을 반능교회에 김은석 목사가 와서 말씀을 전하였는데, 말씀에 취해 큰 은혜를 받았다. 부흥회 때 침례식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침례를 주면서 자신에게만 주지 않자, 이를 방관치 않고 간청하였다. 이에 김은석과 정찬성은 김정만을 냇가로 데려가 김은석이 위해서 기도하고, 정찬성은 입은 옷 그대로 물속에 들어가 침례를 베풀어 주었다. 침례를 받고 나니 너무 기뻤고,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옷이 금세 말랐다고 한다.

1946년 반능교회를 섬기던 중에 담임 정찬성의 권유로 부강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다. 3개월 후 정찬성이 김정만에게 교회를 맡기고 사임하자, 교회를 맡아 일하면서 성경공부를 위해 반능과 부강을 오갔다. 반능에서 부강까지는 8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지만, 월요일 새벽예배를 마친 다음 출발해서 저녁까지 걸어서 부강에 도착하곤 하였다.

김정만은 1946년 가을 정찬성, 김은석 두 목사들과 함께 서울 필운동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성낙소, 최상현이 교수로 있던 이곳 신학교에 성령론에 관한 논쟁이 있음을 직접 목격하였다.

어느 날 저녁은 너무 추었던지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고 김정만 혼자만 부강에 도착하였다. 부강에 도착하여 평상시처럼 저녁 예배를 드린 후 식사시간이 되었지만 먹을 것이 없자, 김은석은 소금물이라도 끓여오라고 했다. 그 날 저녁은 소금물을 놓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하였고, 그 다음날도 새벽예배를 드린 후 아침식사로 간밤에 마시다 남은 소금물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밖에서 배달부가 왔다는 소리가 났고, 나가보니 최춘성이 쌀 한 가마를 가지고 와서는 하나님이 형님네 갖다 드리라고 했다면서 놓고 갔다. 최춘성이 돌아가자마자 김은석은 쌀을 반 가마씩 나눈 후에 “반 가마는 내가 먹고 반 가마는 김형제가 가져가게.” 하면서 주었다. 그 때 김정만은 “도대체 세상에 이런 분이 또 어디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스승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충주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전도했더니 얼마 되지 않아 4-5백 명이 모이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김정만은 그 교회를 스승인 정찬성에게 넘겨주고, 사모의 친정이 있던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여 1954년에 예배당을 짓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때 김은석이 설교를 위해 참석했는데, 큰 딸 순명이 우니까 얼른 안아주었는데, 그만 어린 딸이 실례를 하여 예복이 적고 말았다. 그러나 김은석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입고 설교하시고 돌아갔다.

그 후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김광희 집사) 교회로 옮겨갔다가 다시 반능교회로 옮겼는데, 폐병을 얻어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월간 한길사(1959)는 김정만 형제가 죽었다고 부고하였다. 그러나 김정만은 기도로 고침 받고 열성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원근 각처에서 교인들이 모여들어 격주로 충북 각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들도 뜻을 같이 하였다.

김정만 목사가 폐병만기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힐 요한 선교사가 병문안으로 찾아와 약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김정만은 최후의 수단으로 항상 기도하던 음성 고사리봉을 찾아 하나님께 매달렸다. 일주일이 지나자, 당시 눈이 내려 쌓였었는데, 김정만이 있던 곳은 눈이 녹아있었고, 앉았던 자리의 소나무는 뽑혀 있었다. 그만큼 혼신을 다하여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몸이 가볍고 상쾌해져 집에 내려와 보니 씻은 듯이 병이 낳아있었다.

그 후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신이면 (화석리 방축골 교회)에 개척을 하고, 다시 반능교회로 왔다가 1968년에 (충북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갓돈 교회(현 삼방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전 주민들이 믿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김정례 집사와 지재성 집사는 갓돈교회를 이루는 기둥이 되었다.

1971년에 강원도 원주교회를 개척하고, 1973년에 서울 상계동 희망촌 교회로 부임하였다가 1981년 12월 이신이 소천 하던 때에 다시 소생하기 어려운 중병을 얻어 연세대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은 고쳐주었고 오늘의 상계 그리스도의 교회 자리를 매입하는 역사를 체험케 하셨다. 김정만은 12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1993년 이 상계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은퇴하였다.

목회자로서 김정만은 김은석, 정찬성을 스승목사로 모셨고, 김재순, 최요한, 심영진, 이신, 김상호, 이원로(노), 조길재, 지철희, 이재석, 홍승만(이상 목사), 김교인, 이학재, 김길홍, 조춘식, 박오복(이상 장로), 박양순, 최돌연, 김광희, 박정희, 김옥수, 이희, 김정례, 지재성, 정현매, 권영신(이상 집사) 등을 잊을 수 없는 동료들로 기억하였다.

김정만 목사는 3남1여를 두었으나 가난하여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한 때는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기기도 하였다. 목회 중에 성령님의 역사도 많았다. 자만할까 봐 거둬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였다. 교회를 핍박하던 동네 깡패를 회개시키기도 하였다. 쌀이건 보리건 들어오면 신도들에게 나눠줬다. 새끼 돼지를 나눠주며 교인들이 살아갈 방편을 제공하기도 했다. 김정만 목사는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지만, 신약성서교회 회복에 힘썼다. 성서에 없는 것은 결코 따르지 않았다. 그 단적인 예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권사를 세우지 아니한 것이었다.


김정만(1927.5.20- ) 목사


김정만 목사는 충북 중원이 고향이며, 이웃 마을 반능에 들린 정찬성 목사와 김은석 목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어느날 김은석 목사와 정찬성 목사가 합동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침례를 주면서 김정만에게만 주지 않자, 방관치 않고 떠나는 목사들을 붙잡고 1시간 가량을 실랑이 한 끝에 냇가로 내려가 김은석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침례를 받고 은혜 가운데 집으로 돌아오는데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이 모두 말라져 있었다.

은혜를 받고 열심히 반능교회를 섬기던 중에 담임 정찬성 목사의 권유를 받고 부강으로 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다. 3개월 후 정찬성 목사가 교회를 김정만에게 교회를 맡기고 사임하자(1946년) 전도자의 일을 하면서 계속 성경공부를 위해 부강에 다녔다. 반능에서 부강까지는 200(80KM)리 길이었지만, 월요일 새벽예배를 마친 다음 출발해서 저녁까지 걸어서 부강에 도착하곤 하였다.

김정만은 1946년 가을 두 분 목사들의 권유로 서울 필운동교회를 함께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신학교가 개교하고 있었고 성락소 목사와 최상현 목사가 가르치고 있었다. 김정만은 이곳에서 성령론으로 인한 시비가 있음을 보고 알았다.

어느날 저녁은 너무 추었던지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고 김정만 혼자만 부강에 도착하였다. (김정만은 스승 김은석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못하면서 당시의 일을 회고하였다.) 부강에 도착하여 평상시처럼 저녁 예배를 드리고 나서 식사시간이 되었지만 먹을 것이 없자, 김은석 목사는 소금물이라도 끓여오라고 했다. 그 날 저녁은 소금물을 놓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하였고, 그 다음날도 새벽예배를 드리고 나서 아침식사로 간밤에 마시다 남은 소금물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밖에서 우체부가 왔다는 소리가 났고, 나가보니 최춘성 목사가 쌀 한 가마를 가지고 와서는, 하나님이 형님네 갖다 드리라고 했다면서 놓고 갔다. 최춘성이 돌아가자마자 김은석은 쌀을 반 가마씩 나눈 후에 "반 가마는 내가 먹고 반 가마는 김형제가 가져가게." 하면서 주었다. 그 때 김정만은 "도대체 세상에 이런 분이 또 어디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스승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후 충주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전도했더니 얼마 되지 않아 4-5백 명이 모이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김정만은 그 교회를 스승인 정찬성에게 넘겨드렸다.

김정만은 사모의 친정이 있던 송정리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여 1954년에 예배당을 짓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때 김은석 목사가 설교를 하기 위해 참석했는데, 큰 딸 순명이 우니까 얼른 안아주었다가 그만 예복을 적시고 말았다. 그러나 김은석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옷 그대로 입고 설교한 후에 돌아갔다. 이 교회를 섬길 때 김정만은 생활이 어려워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기도 하였다.
송정이란 동네는 박종환이란 사람이 판을 치던 곳인데, 이곳 교회를 거쳐간 사람치고 박종환에게 매 맞지 아니한 목회자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김정만 목사 앞에 굴복시켜 주었다. 그후 황청리(김광희 집사) 교회로 옮겨갔다가 다시 반능교회로 옮겼는데, 폐병을 얻어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월간 한길사(1959)는 김정만 형제가 죽었다고 부고하였다. 그러나 김정만은 기도로 고침 받고 열성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원근 각처에서 교인들이 모여들어 격주로 충북 각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들도 뜻을 같이 하였다.

김정만이 폐병만기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 힐 요한 선교사가 약을 주며 치료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했다한다. 기막힌 일이었다. 그래서 김정만은 기차를 타고 조치원에서 내려 죽으려고 철로 가에 엎드려 있는데, 간수가 와서 정신 돌았냐며 때리고는 충주행 기차를 태워 보냈다. 이 날 김정만은 음성에서 내려 항상 기도하던 고사리봉을 찾아 하나님께 매달렸다. 일주일이 지나자, 당시 눈이 내려 쌓였었는데, 김정만이 있던 곳은 눈이 녹아있었고, 앉았던 자리의 소나무는 뽑혀 있었다. 그만큼 혼신을 다하여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몸이 가볍고 상쾌해져 집에 내려와 보니 씻은 듯이 병이 낳아있었다.

그후 중원군 산이면에 개척을 하고, 다시 반능교회로 왔다가 1968년에 갓도(현 삼방교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전 주민들이 믿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김정례 집사와 지재성 집사는 갓도교회를 이루는 기둥이 되었다.

1971년에 강원도 원주교회를 개척하고, 1973년에 서울 상계동 희망촌 교회로 부임하였다가 1981년 12월 이신이 소천하던 때에 다시 소생하기 어려운 중병을 얻어 연세대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은 고쳐주었고 오늘의 상계 그리스도의 교회 자리를 매입하는 역사를 체험케 하셨다.
김정만은 평상시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성경에 없는 권사를 세우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성경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고, 사랑하였다.

목회자로서 김정만은 김은석, 정찬성을 스승목사로 모셨고, 김재순, 최요한, 심영진, 이신, 김상호, 이원로, 조길재, 지철희, 이재석, 홍승만(이상 목사), 김교인, 이학재, 김길홍, 조춘식, 박오복(이상 장로), 박양순, 최돌연, 김광희, 박정희, 김옥수, 이희, 김정례, 지재성, 정현매, 권영신(이상 집사) 등을 잊을 수 없는 동역자들로 기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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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Man Kim http://kccs.pe.kr/rmp04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