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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08 11:48
김광수 장로 - 자료모음코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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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목사/장로(1922.4.20~현재)

김광수 목사/장로는 1922년 4월 20일 출생하여 평양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남정리 장로교회를 주일학교 때부터 출석하였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사범대학교에 재학하던 중에 부친이 운영하던 포목점에 불이나 전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김광수는 이때 소명을 받고, 복음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사범대학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김광수는 처가인 평안북도 강계군 만포읍에 있었던 만포장로교회에 출석할 당시 23세의 나이로 시위원회의 파송으로 초등학교를 관리 감독하였으나 공산당으로부터 숙청대상으로 지목되어 1946년 6월에 서울로 남하하여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산1번지에 재건교회를 세워 시무하던 중에 성낙소 목사를 알게 되었고, 1948년 11월 성낙소 목사에게 한강에서 침례를 받고 도화동 개척교회를 1949년 11월 6일에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켰다. 환원 후부터 피난 때인 1950년 6월 25일까지 도화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하였다.

성낙소 목사를 만난 1948년에 한국기독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힐 요한과 성낙소 목사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1951년 졸업하였다. 입학 초기 한국기독성서신학교의 강좌는 연지동 힐 요한 선교사의 자택에 시작되었다. 학생 수가 늘면서 곧 필운동 교회로 옮겼고,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 11월에 서울 장충동의 임대건물에서 속개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다시 중단되었다가 1951년 후반기에 송월동에서 속개되었다. 이때 부강교회 김은석 목사, 김상호 목사, 광주의 강순명 목사도 별과 속성과정에 다녔다.

김광수는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제주도로 옮겨가 그리스도의 교회 출신 피난민들을 찾아 심방하고 천막을 얻어 정희건, 김진영 전도사와 함께 1951년 2월경 제주시 삼도리 해변가에 제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1951년 10월 28일까지 담임하였다(수세자 12명). 이후 부산으로 나와서 부산시 동구 수정동 대지공원에 천막을 얻어 치고 1952년 2월 20일 수정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면서(수세자 72명) 1953년 9월 13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2년 봄에 일본 이바라키 국립대학의 캐논이 내한하여 부산에서 공중예배 중에 악기를 사용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설명한 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협의회(유악기)와 교역자회(무악기)로 분열되었다. 이때 동석기의 영향으로 이흥식, 김진영, 정희건, 김광수, 강순명이 교역자회 측에 섰고, 함태영이 세운 광주 교회가 1952년 후임자 강순명 때, 합송리 교회가 1954년 이신의 후임자 김광수 때 교역자회로 돌아섰다. 김광수가 세운 수정동 교회도 1954년 7월 20일 초량교회(동석기 목사의 직제자인 이흥식 장로시무)와 통합하여 부산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교역자회로 넘어갔다.

통합 후 교회를 사임한 김광수는 1954년 8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3구 마을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신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첫날 비가 내려 교회당이 무너져 내렸다. 돈을 모금하여 건축하고, 중등과정인 성실고등공민학교를 열어 불우한 학생들 교육에도 힘썼다. 이 학교 출신 가운데 5명이 목회자가 되었다. 김광수는 합송교회를 1956년 12월 30일까지 섬겼다.

김광수는 1957년 2월 14일 부산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에 재부임하여 1963년 10월 6일 사임할 때까지, 부산시 중구 영주동 621번지 여관이 있던 곳을 구입하여 교회를 이전시켰고, 전임자 박경동 전도자와 기독교 세계봉사회 합동판매점 총무였던 김춘희가 전쟁미망인들을 돌보기 위해서 세운 승리모자원의 이사장을 1958년부터 수년간 역임하였고(수세자 105명), 1959년 부산 진구 연지동 301번지에 대지 1,501평을 구입하고 원사를 신축하여 1960년 5월 5일 총 23세대 87명을 수용하였다(원장 김춘희). 이곳에서 자란 사람들 가운데 목사가 된 사람도 있고,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또 모자원을 기초로 1962년 7월 22일 연지동 성지 그리스도를 개척하여 1966년 11월 27일까지 시무하였다.

1967년 5월 8일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강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아 1968년 12월 10일까지 2년간 담임(그리스도신학대학 교목)하였고, 성경통신대학도 시작하였다. 목회기간동안에 침례를 베푼 사람이 350여명이 된다. 그러나 4남3녀라는 대식구를 거느린 탓에 자녀들 교육문제로 목회를 그만두고 울산에서 현대기계설치공업주식회사를 차례 사업하던 차에 임낙훈 목사가 시무하던 서울 내수동 교회에서 1979년 6월 24일 장로로 임직하였고, 사업에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큰 아들은 서울대학교와 충남대학교를 거쳐 농학박사가 되었다. 말년에는 동대전 그리스도의 교회(교역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