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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2-15 21:35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3
 글쓴이 : 함동진
조회 : 3,612  
   http://kccs.pe.kr/main30.htm [534]
   http://kccs.pe.kr/main30.htm [511]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 3>

1953년 :

   (39세때) 3월24일(음) 창현 함태영 목사의 선친이신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 志士)께서 세상을 뜨셨다.

   평생을 10자녀를 위하여, 사회활동을 위하여, 안일할 날이 하루도 없이 수고롭기만 하시던 선친의 서거를 가슴 깊이 슬퍼하였다.

   유교와 기독교의 갈림길(송암은 유림이었으며 창현은 기독교인임)에서 넘나들던 부자간의 정신적 갈등 속에서도 창현목사의 교육사업과 교회개척 설립 등 기독교환워운동에 있어서 없는 것 잇는 것 할 것 없이 털어서 뒷밭침 함으로 장자인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앞날을 축복하며 사랑으로 지원하였던 아량 넓으신 분을 사별하신 것이다.

   6월 18일 0시를 기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측이 모르도록 극비리에 반공포로(북한인민군)들을 석방하였는데, 말이 석방이지 총격을 받으며 수용소의 철조망을 넘은 논산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은 야반도주의 신세와 다를 바 없었다. 흙탕에 범벅이 되어 찢긴 옷(P.W표 낙인이 된 군복)을 입고, 동이 트는 아침 일찍 보기에도 가련한 5인의 반공포로들이 창현 함태영 목사가 시무하는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에 찾아들었다. 겁과 두려움에 가득차고 허기진 그들은 정부의 조치가 있는 날까지 옷을 갈아 입히고 먹여 따뜻한 보살핌을 받다가 돌아갔다.

   7월13일(음6.4) 불신자 청년, 방종하였던 창현 함태영 목사를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목사가 되기까지 그 많은 시련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늘 기쁨 속에서 찬송과 할렐루야 기도로서 봉사하며 목회의 반려자가 되었던 아내 정용옥 여사는 6.25전쟁과 가뭄 기근에 의한 찌든 가난과 굶주림 등에 의하여 영양실조와 병고로 충남 논산군(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농촌집 모퉁이 셋방에서 32세(1921~1953년)의 젊은 나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용옥 여사는 목회의 뒷바라지로 자신의 몸을 돌보고 추스릴 사이도 없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전도와 환원운동 신학강좌로 부여군 귀암면 합송리에 출장중이어서 사모인 정용옥 여사의 임종을 맞지 못하였다. 정여사는 장남 동진에게 " 내가 죽은 후에 동생들을 잘 돌보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셔라"고 유언으로 당부하였다. 남편인 창현 함태영 목사가 홀로되어 목회에 크게 지장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1살, 4살, 5살, 8살, 13살 되는 어린 자녀들을 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뜨고 천사들과 함께 찬송을 불렀다.(운명의 시간이라 아주 나즈막한 음성으로 고요히 불렀다. 그러나 천군천사의 대합창 속에 승천하는 듯 평화로웠다. 아래의 찬송가 가사는 운명시 그 순간 자녀들과 천사들과 함께 부른 찬송가)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합소서
|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 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인해함을 항상 찬송합니다
 

                                              주의 도와주심 받아 이때까지 왔으니
                                              이와 같이 천국에도 이르기를 바라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에 빠진 우리를
                                              예수 구원하시려고 보혈 흘려주셨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맵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천사들의 찬송이 합창으로 들린다며 자녀들에게 천사들의 찬양을 들어보라고 하면서 또 함께 찬송을 부르면서 심장의 박동이 점점 멀어져 갔다.

   천사들의 호위와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정용옥 여사의 운명 소식을 듣고 부여에서 신학강좌 도중 급히 달려 왔다.

   평상시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낯빛 한 번 변함없었던 목회의 반려자 정용옥 여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니? 주일이면 아름다운 목소리(쏘프라노)로 찬양을 하여 신도들을 은혜롭게 하던 아내, 천사 같기만 하던 정용옥 여사를 떠올리며 두 눈에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다. 아니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저 어린것들을 어찌할꼬? 주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렇게 어려운 시험을 주시나이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와 충곡리그리스동의교회의 두 교회 교인들이 합심하여 꽃상여를 정성 것 만들어 출상을 하였다. 이 때 꽃상여 뒤에는 많은 교인들과 복음중학교학생 그리고 교직원들이 뒤를 따랐고,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모두들 흐느꼈다. 뒤에는 어린 자녀들 사랑하던 신도들, 아끼던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와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 그리고 복음중학교를 남겨두고 주님의 보좌 곁으로 떠나갔다.

   정용옥 여사의 유해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3구 아개울방죽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용옥 여사의 장례식준비는 정여사의 운명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달려와 정여사의 눈을 감겨주었던 복음중학교 교감인 김00 목사와 교직원 학생들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의 현00 장로와 교인들,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의 최00 집사(형제 집사), 신00 집사와 교인들, 가족으로는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아우이며 복음중학교재단이사장 태중, 영어강사인 태욱, 여동생 옥기 등 여러분들이 수고를 하였다.

   이때에 막내였던 동신(1살 젖먹이 유아)은 논산의 유아원(원장 노00 장로)에 맞겨졌다가 후일 충남 공주의 장로 신00씨 집안에 양자로 입양되어 신00으로 개명하고 장성한 후 충청남도 금산군 소재 금산고등학교 와 충청남도 장항읍의 장항공업고등학교의 지리교사로서 건실한 생활을 하고 있다(1983년 11월 현재).

 

정용옥 사모의 소천 수개월 전 사진

(시)

                                              생후 8개월 막내, 그 위로 세 자매, 그 위로
                                              맏인 나 13세 어린 소년일 적에
                                              천상으로 이끌리며 천사들 함께
                                              노래하시는 울엄니 보았네
                                              차마 눈감지 못하는 두 눈의
                                              마지막 눈물도 보았었네

                                              선녀 되어 하늘 가신 울엄니
                                              내 가슴에 백합송이 심어
                                              순결한 향으로 감쌌네
                                              우리들 남매 부활의 날을 소망하며
                                              그 향을 품고 자랐네

                                              엄니 보고픈 날은
                                              백합송이 화병에 꽂아
                                              방안 가득한 젖냄새
                                              나, 엄니 품 소록소록
                                              청아한 천상의 소리
                                              엄니의 노래를 듣네.

                                              * (함동진의 시 <사모화(思母花)-백합․1>전문)

(수필)

   어머니께서 우리 어린것들의 눈에 눈물을 머금게 하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후 40여 년 더 지난 세월, 회갑을 바라다보며 늙어 가는 아들이지만 어머니 생각을 하면 언제나 눈시울이 화끈거리며 마음은 울먹거린다. 어린것들 때문에 차마 눈을 못 감고 숨지기 괴로워 하시던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하랴. 생후 8개월 된 젖먹이 막내, 그 위로 세 자매와 제일 맏이로 13세 된 소년인 나, 어머니의 운명과 함께 세상은 깜깜하게 무너져 내렸었다. 6․25전쟁으로 피난살이 객지에서 굶주림과 헐벗음의 고생이 우리들의 어미를 앗아가게 한 비운이었다.

나의 어머니 그 분은 나리꽃 같은 분이시다.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예쁘장한 여인으로 목소리가 청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일구어 내는 가창력을 지녔었다.

   우리 가족들이 피난생활을 하던 논산 부적 충곡리는 개척교회를 시작하신 아버지를 따라 든 곳이다. 그 곳은 전쟁 중 몇 년째 계속된 가뭄과 흉년으로 기근이 극에 달해 인간들조차 고갈되어 가던 곳으로 만 내 기억 속에 남아 넘나든다. 바로 그러한 곳에서 나의 어머니는 나리꽃 같은 품새로 32년의 인생을 아물어 버리고 졌다. 그때의 아버지는 40대가 채 못된 혈기왕성한 청년말기로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성으로 복음전파에 열을 올렸다. 나는 주일날이면 산이 헐벗어 황토흙이 흘러내리는 주위의 야산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자생하는 나리꽃을 한 묶음 꺾어다 교회의 화병에 꽂아 강대상 위에 얹어 놓았다.

   나리꽃은 연주하는 황금나팔 모양으로 향기가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예배드리는 교회당 안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냈다. 어머니의 찬양송은 백합향이 퍼지듯 매끄럽게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며 감동으로 흐르는 선율로 찾아들었다.

나리꽃은 "순결'이란 꽃말을 지녔듯 매우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깔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꽃은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이기도 하다. 예수는 인간의 존귀함과 그 가치성을 나리꽃을 들어 비유하였다. 부강의 상징이요, 영화의 극치인 솔로몬왕의 영광으로 입은 화려한 의상일지라도 나리꽃의 아름다움과는 비교될 수 없다고 했다.(마태복음 6:28, 어느 성서학자들은 이 꽃을 팔레스타인들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는 붉은 색 아네모네꽃을 지칭한 것이 아니냐는 해설도 있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평안북도 선천사람으로,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인 감독을 살해한 후 도피생활을 하던 풍운아 아버지와 만나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잘 생긴 미남형 청년이며 바람둥이이고 술고래였다. 그러한 아버지는 외조모의 전도에 의해 기독교인으로 개종케 하고 목사가 되게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목사가 되기까지 온갖 시련을 극복하며 내조하였고, 목사가 된 후에 가난하고 쪼들리는 살림에도 목사의 선량한 사모로 인상 한 번 흐트림 없는 후원자였다.

   나리꽃은 백합과에 속하는 초본으로 참나리라고도 부르며 산과 들에 자생하고 관상용으로 정원에 재배하기도 한다. 잎은 가는 댓잎 모양새이고, 꽃은 T자 모양의 수술 아래에 씨방을 두고 종을 닮았다. 그 당시 시골에는 흰 나리꽃을 가꾸는 집을 찾기 힘들었고 흰 나리 자체를 만나기도 힘들었다. 그러므로 야생나리꽃이 흰나리 대신에 자리매김을 했던 것이다.

   나는 나리꽃을 볼 때마다 사모하게 된다. 나의 사모화인 한국의 흰 나리꽃은 구미의 사람들에게 성모백합으로 대량 수출을 하기도 한다. 성모백합은 성모마리아가 부활한 예수의 무덤에 찾아왔을 때에 그 무덤에 피어 있었다는 전설이 있고, 그로 인해 백합은 성모를 상징하며 부활의 꽃으로 교회를 장식하는 꽃으로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흰 나리는 한국에 있어서 외화 달러벌이 꽃으로 농촌의 소득을 증대하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중국의 전설에, 조래산(阻來山)에서 유생인 한 선비가 수도하던 중 묘령의 여인에게 밤마다 유혹당하는 몽유병에 시달리다가 백합뿌리를 캐어 달여먹고 정신질환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노이로제, 정신이상, 집착병 등을 백합병이라 하고 이를 나리뿌리로 다스리는 것이다.

   왕유라는 사람은 그리움과 사무침에 그칠 줄을 모르는 눈물을 마르게 하고자 백합을 취하였더니 눈물이 그쳤다고 한다. 나리는 지루제(止淚劑)로도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백합은 각종 감정이나 정신이상에 효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종기나 종독에도 효험이 있다고 초본강목에는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의 과학이 합성해 낸 기존의 항암제보다도 1백 배 가까이 더 강력한 항암효과를 지닌 성분의 물질을 백합에서 추출해 냈다는 것이다. 암이란 것은 억압을 받은 사람의 오장육부 속에서 또는 기타 인체부위 속에서 생기는 종기가 아니겠는가. 백합은 이러한 정신적 고통에서 비롯된 질환들을 치유했다는 전설이 그르지 않음을 현대의 과학도 입증한 셈이다. 다른 의미로 본다면, 예수가 인류의 질고와 죄로 인한 사망의 고통을 대신 짊어져 죽고 다시 부활한 것은 무덤 속에 피어난 백합의 전설을 합리화 시켜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우리 어린 형제들은 어머니를 잃고 슬픔, 배고픔, 정신적 방황 속에서 별 탈 없이 장성한 것은 나의 사모화(思母花)인 나리꽃이 저 천상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지켜주셨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사모화 나리꽃은 전세계의 사람들도 공통으로 사모하는 꽃이 아닌가 하고 생각케 된다. 백합은 한국에서는 '나리', 일본에서는 '유리', 중국에서는 '마리', 영어로는 '릴리'라 부른다. 희한하게도 '리'자로 끝나는 이름을 기진 꽃이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길쌈도 아니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오늘 있다가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신약성서 마태복음 6장 중에서)

   나는 어머님이 그리운 날에는 나의 사모화 나리꽃을 화병에 꽂는다. 방 안 가득히 퍼지는 향그런 어머니의 젖냄새…….

                                                               * (함동진의 수필 <백합꽃-사모화(思母花)>전문)

   8월 4일 존 제이 힐 선교사는 통역 역할을 하는 최순국 목사와 함께 순회차 개척교회인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지금의 금성그리스도의교회)와 복음중학교를 순방하였다.

존제이 힐 선교사

 

최순국 목사  

   8월 00일 창현 함태영 목사는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로 이주하여 숭실중학교 교장직을 역임함과 아울러 숭실중학교 교내 교목으로 시무하며 교육에도 열성을 다하였다. 이 때에 불행하게도 부여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와 복음중학교에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여 힘이 되어 주었던 아우 태중이 중병으로 사경(死境)을 헤매다가 소생케 되는 역경이 엄습했었다.

    숭실중학교 재직시에 존 제이 힐 선교사와 이신 목사가 격려차 방문하였다.  

   11월 0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에 있던 자택 1동을 그리스도의교회 전도사(여전도사 김00 씨)에게 기증하여 환원교회를 개척케 하여 오늘날 도원동그리스도의교회의 출발점이 되게 하였다.

 

숭실중학교 교장및 교목으로 재직시 사진 뒷줄 중앙 부분 검은양복

숭실중학교 교장재직시 졸업생들과 함께한 창현 함태영 목사   

숭실중학교 교장재직시 남자교사들과 함께한 창현 함태영 목사   

1955년 :

   (41세때) 서울성서신학교(지금의 서울기독대학교)를 제1회로 졸업을 하였다. 북괴군의 6.25남침전쟁으로 인하여 학사행정의차질?로 졸업장이 늦게 수여된 것으로 간주된다.(제1회 졸업생 : 함태영 조국형 김봉석 성수경 김태수 김현숙 이종윤 유현성 정희건 변승택 이홍미 최병식 1955.3.3.)

   같은 때에 막내아우인 태욱은 서울성서신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55.3.3.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 제1회 졸업사진. 앞줄 중앙 흰코트를 착용한 이가 교장인 존 제이 힐 선교사

 

1955.3.3. 제1회 졸업생들  : 함태영 조국형 김봉석 성수경 김태수 김현숙 이종윤 유현성 정희건 변승택 이홍미 최병식  

 1957년 :

   (43세때) 전라북도 이리시에 교회 터를 매입 신축을 계획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전주로 이동 전주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하였다. 전주시 인후동에 있는 반공포로 정착촌에 의무실(醫務室)을 개설 운영하면서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을 전개하였다.

1958년 :

   (44세때) 전주시의 경계지역인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소양리(지금은 전주시에 편입됨)에 200여 평의 대지와 100여평의 대형가옥 건물을 매입하여 전주그리스도의교회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곳에서 큰길 도로변에 별도의 점포를 임차하고 약종상(제약회사에서 포장한 약품인 기성약품만을 매약)을 매입하여 장자인 동진으로 하여금 운영케 하였다.

   동진은 전북일보사 서무원, 시사통신전북지사 무전사 , 합동통신 전북지사 부무전사(副無電士) 등 주경야독을 하면서 전주공업고등기술학교 무선통신학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법학과를 입학하였다. 그리고 교회와 주일학교도 돌보아 창현 함태영 목사의 목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의 전주 목회시절 절친한 친구사이이자 동료 목회자인 이신 목사는 수시로 찾아와 부흥집회도 열고 목회일도 협의하였었다.

전주에서 완주군 용진면 소양리로 그리스도의교회를 이전하고 부흥강사로 이신목사(사진 좌측)를 초빙하였다. 

전주 인후동에서 완주군 용진면 소양리로 그리스도의교회를 옮기고 부흥강사로 이신목사(사진중앙 모자를 쓴이)를 초빙하고 소양천으로 침례세례차 행하고 있다(창현 함태영 목사는 끝에서 2번째).  

1960년 :

   (46세때) 청주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62년 :

   (48세때) 목회를 쉬며 시험받다. 대전시 가오동 천변(川邊)에 하늘만 가려지는 판자 움막을 짓고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키 위하여 시멘트블럭공장을 운영 중노동을 하며 시험과 연단을 받았다. 이 때에 방금 육군에서 만기 제대를 한 장자 동진이 공장 일을 열심히 도왔으나 공장운영이 부진하였다.

   환원운동을 시작한 후 타 교파주의교회로부터 목회자로서의 생활보장을 받고 육신이 조금은 편해질 수 있는 교회의 담임을 제안 받고도 물리치고, 고집스럽게도 가난의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신앙노선을 지켰다.

   환운동과 환원교회사역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시험을 이기자는 주장이었다.

1964년 :

   (50세때) 충청북도 부강그리스도의교회와 남일면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를 담임 시무하였다.

   자신이 청년시절에 익혀두었던 건축기술로 교회를 손수 아름답게 꾸미고 보수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한 번은 혼자서 교회의 지붕을 보수하다가 낙상하여 옆구리의 갈비뼈가 상하는 중상의 위험도 무릅썼다. 

1070년 :

   (56세때) 1970년1월 25일 장남 함동진이 최윤권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거행함.

1974년 :

   (60세때) 논산대명중학교(창립시명칭: 복음중학교) 설립20주년 기념일에 설립자에 대한 공로표창과 부상으로 황금메달을 기념으로 받고, 밀알이 되어 뿌리를 내리고 많은 제자를 길러낸 보람에 잠겨 어려웠던 시련과 고난과 희생의 세월을 잊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고난의 세월을 함께 한 얼굴들을 그리며 두 눈의 눈시울이 뜨거워 옴을 느꼈다.

1975년 :

   (61세때)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장자 동진의 집에서 동료목회자들인 이신․구강서․이종만․조충연․설하운․함명덕․임상규(이상 목사), 박정훈․백00(이상 장로) 등 친지 여러분들과 형제자매 자손들과 함께 조촐한 회갑연을 가졌다. 이날 회갑기념예배의 사회는 조충연 목사께서 축하설교는 이신 목사께서 축하찬양은 설하운 목사 사모인 김경옥 여사(부평그리스도원 및 유치원 원정)께서 맡아 하였다. 작은 회갑연의 자리였지만 기쁨으로 가득한 자리였다.  

회갑날의 창현 함태영목사 (이이를 안고있는 이)

1980년 :

   (66세때) 부강그리스도의교회와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 담임을 마지막으로 하여 노환을 얻어 하나님을 위한 사역인 거룩한 목회직을 은퇴하였다.

   반신마비와 당뇨환으로 투병할 때 아우인 태욱이 모시고 침 뜸(鍼灸)과 약으로 간병하며 한없는 헌신으로 형제의 우애를 바쳤다.

이 세상의 재산과 육신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육을 위하여 바치고 남은 것은 맨주먹과 뿌려서 썩어진 밀알 정신 뿐, 이제 마지막 병든 육신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짐 지고 가는 고난과 고통의 시험을 견디어 내는 것이었다. 오직,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 뿐 십자가상의 가시관을 쓰시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시고 양손과 양발에 박혀있는 대못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대속의 피를 보며 자신이 주님을 위하여 완전히 썩어진 밀알이 되었는지 확인하였다.(평생의 좌우명 <生則福音 死則麥粒> : 살아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 마28:19~20. 행1:8. 요12: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1983년 :

   (69세때) 11월 28일 01시 30분 충청남도 대전시 가오동(지금의 대전광역시동구 가오동)에서 주님의 보좌 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운명한 후에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듯 화평하고 깨끗한 얼굴의 모습을 하여 가족들이 기이히 여기고 평안을 얻어 끊임없이 찬송을 하였다.

   김치연 목사께서 위로의 유가족 예배를 인도되었고 이춘식 목사의 집례로 영결예배를 드렸다. 출상 후 하관예배는 이영호 목사의 집례로 장례절차가 마무리되었다.

   묘소는 전리남도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12번지 선영에 소재하고 있다.

   아우 태호는 형인 창현 목사의 무덤 앞에 춘란을 심어 난초로 십자가를 만들어 사시사철 늘 푸른 십자가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형님. 이산의 과수에서 나오는 복숭아 감 밤 을 마음 것 드시면서 편안히 쉬십시요"하며 눈시울을 붉히며 유족인 조카들을 등뒤로 돌리고 눈물을 감추었다. 형인 창현 함태영 목사를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창현 함태영 목사도 장자인 자신을 대신하여 고향을 지키며 부모를 섬기며 가산을 일구는 어질고 어진 아우 태호를 늘 고맙게 생각하여 왔었다.

   이상과 같이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의 사명은 물욕과 탐함이 없이 한국그리스도의교회와 기독교환원운동사에 있어서 순교자적 사도의 정신으로 남이 모르게 그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였다.

   일제로부터 8.15광복을 맞이하고, 6.25전쟁 북한인민군의 남침전쟁으로 인한 암흑시기에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겪고 폐허화된 국토 위에서 묻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에 탐하여 서로를 미워하고 보복하며 속이고 저주하던 그 시기에 이 사회에서는 윤리와 도덕과 종교가 땅에 떨어져 사랑이 짓밟히고 있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이때에 십자가를 메고 복음을 전하며 밀알이 되려고(生則福音 死則麥粒) 기도하고 찬송하며 헌신하였다.

   국민들은 무지하고 가난이 찌든 시기에 불신자들은 교회를 향한 핍박이 극심하였다. 교회를 연애당이라 부르고,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들을 연애쟁이라 불러 교회를 비윤리적 부도덕한 장소인 것처럼 지칭하며 핍박하였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집안은 모두 망한다고 비방하녀 핍박을 더욱 가하였다.

   예배시간에 신도들의 신발을 감추고 유리창에 돌을 던지며 오물을 끼얹기도 하였다. 혹시 신도들 중에서 병이 들거나 죽게 되면 예수를 믿어 망한 것이라고 비방을 하였다.

   전등이 없는 석유초롱불 밑에서, 겨울이면 난방이 없는 냉방에서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하루에도 수 십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험한 길을 밤낮으로 걷고 뛰며 전도하고 심방을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불량배들의 핍박과 위협을 받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십자가를 메고 주님께서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

   이때에 창현 함태영 목사는 복음으로 교육으로 그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면서 생의 진리 곧 복음을 전파하였다. 때문에 때로는 자녀들 인척들 친구들 친지들로부터 너무나 지나치지 않느냐는 비난도 수 없이 받았다. 이때마다 창현 함태영 목사는 감사하는 기도와 찬송으로 더욱 힘을 내어 사명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생존시 좌우명으로 삼았던 "살아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어서는 주님의 분부대로 한 알의 밀알로 썩는다(生則福音 死則麥粒)" 를 실천함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랐다.

   교회를 지키며 교육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는 아무러한 관계없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일념으로 헌신을 하였다.

   봉사와 헌신의 일생, 뛰며 달리는 활동의 생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생이었다.

창현 함태영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운명하였을 때에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란 말 그대로였다. 손수 찍어 만든 시멘트 블록 몇 장으로 그것도 남의 땅 위에 가까스로 손수 쌓아 올려지어 비가 새는 움막같은 거처였다. 지니고 있던 재산이라고는 손때 묻은 낡은 찬송가와 셩경책 그리고 몇 권의 신학서적 뿐이었다. 그리고 보람으로 간직했던 복음중학교 창립20주년 기념일에 설립자공로로 받은 황금메달도 치료비에 보태기 위하여 이미 팔아 없어진 터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참으로 육신을 위한 모든 것을,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주님께 다 헌신하였다.

   이제 창현 함태영 목사의 뜻이 이루어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한국의 기독교환원동사와 더불어 사랑의 실천이 메마르지 않을 것이며 갈보리 산상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빛날 것이다.

1984년 11월 27일 홍제중앙그리스도의교회 담임 조충연 목사가 창현함대영목사 소천 1주기 추모예배를 함동진 댁에서 집례함.

   ◎ 2007년 한국그리스도의교회 75주년 기념대회(The 75th Aniversary Covention of Korea Christian Churches and churches of Christ)에서 환원상: [환원헌신상(메달)] 수상.

                                              어리석은 놈, 바보
                                              예수쟁이, 멍청이 놀림을 받고
                                              신사참배 거부하다가
                                              쇠고랑 차고 감옥에 누웠어도
                                              야곱의 돌베개 침방으로 여기고

                                              돌은 놈, 미치광이
                                              예수쟁이, 정신병자 비아냥 받고
                                              공산주의 거부하다
                                              친미파 반동분자로 몰려
                                              내무서 감방에 앉았어도
                                              골방의 기도실로 여기고

                                              알거지같은 놈, 비렁뱅이
                                              예수쟁이, 거러지 손가락질 받고
                                              배고파 기진하고
                                              누더기 걸치고 거친 침실이었어도
                                              볶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어디든 천국으로 여기고

                                              자나깨나 볶음전도와 교육, 환원운동으로
                                              일생을 살아가신 나의 아버지
                                              창현 함태영 목사
                                              남기신 유산은 오직
                                              낡은 성경책과 찬송가 단 한 벌
                                             그리고 교훈
                                              "生則福音(생즉복음)
                                              死則麥粒(사즉맥립)"

                                              환원운동이여* 빛나라
                                              떨구어진 밀알
                                              천배나 만배나 더 결실하소서!

                                               * (함동진의 시 <사부곡(思父曲) -나의 아버지 창현 함태영 목사 >전문)

   위의 <창현 함태영 목사 략전(전기)>는 창현 함태영 목사 탄생77주년일인 1991년6월11일(음력4월30일) 초판 발행하였고, 재판은 창현 함태영 목사의 아우인 태욱의 증언과 협의를 거쳐 창현 함태영 목사 탄생79주년일에 수정 증보되었다 .

                                   장자 장산 함동진(長山 咸東振 <炯振 : 咸氏大同譜인 甲子譜上登載名>) 엮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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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현 함태영 목사 카페<카페자료실>란] http://cafe.naver.com/hamdongjin.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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