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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3-24 23:22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동영상 추가)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5,742  
맨발의 성자, 만교 최춘선 목사(1921-2001.09.08)

최춘선 목사는 김은석의 제자로서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 시무하였고, 사회사업가였으며, 소천 전 30여년을 맨발로 거리와 지하철에서 전도하다가 소천 하였다.

최춘선은 말년에 지하철역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비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초대... 예수 십자가는 생명의 젖 줄기, 평화의 젖 줄기, 그래서 십자가 젖 줄기 하나, 교회 하나, 교단은 여러 개가 있을지라도 교회는 하나다!”

(1)김은석 목사와의 관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김찬영) 131쪽에 의하면, 최춘선은, 1949년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힐 요한도 1972년에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에서 이 무렵에 김은석의 영향으로 김포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점을 인정하였다. 1951년에는 김은석, 정찬성과 함께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의 조선기독교회를 조동(현 동량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켰다.

최춘선의 이름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14회 등장하였다. 최초의 언급은 1953년 8월 24일자로 되어 있다. 이 날 최춘선은 김은석, 이복춘, 이시봉과 함께 충북 충주시 남주동 2구 350번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하는 정찬성 전도자를 상봉하였다. 1957년 6월 6일에는 송안성과 함께 김은석 목사의 대전 자택에 머무른 후 7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갔다. 1957년 7월 11일(목) 오후에는 김은석이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 만교 최춘선의 자택에 도착하여 저녁에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스가랴 7-8장을 봉독하였다. 13일(토)에는 김은석과 함께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도당 원경선의 자택에 머물렀다. 1957년 8월 26일에는 편지를 받고 최춘선이 김은석의 대전 자택으로 내려왔는데, 김영원, 김영숙, 이종만, 설하운, 태일러, 박은병도 참석한 자리였다.

최춘선의 이름은 김은석의 통신 및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명단에 빠짐없이 들어 있다. 김은석은 1958년 5월 5일에 집중강의 일정을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통보하였는데, 이 통보를 받은 이들 가운데 최춘선이 포함되어 있다. 또 1958년 7월 10일부터 소년성경학과가, 8월 1일로 9월 10일까지는 집중성경공부가 있다는 통신자 명단에도 최춘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김은석 목사가 1960년도에 연하장을 보낸 자들의 명단과 양녀 김명순의 혼인 청첩자 명단에도 최춘선의 이름이 들어 있다.

또 <목포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19쪽에 실린 김정만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최춘선은 부강교회 김은석에게 쌀가마를 직접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이토록 최춘선 목사는 김은석 목사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였다. <좌측의 흑백사진은 1949년 12월 9일의 한국 기독교 성서신학교(필운동교회) 단체사진에서 따온 것임>

 

(2)무소유와 희생의 삶

최춘선은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목회자였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언제나 존댓말을 하였고,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등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최춘선은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큰 길에서 인천 국도까지 수십만 평의 땅을 유산으로 받았던 거부였고, 자동차를 다섯 대나 소유하였었다. 그러나 6.25 직후 길에 떠도는 노숙자들과 거지들을 집으로 데려와 거두기 시작하였고, 국가나 단체의 보조 없이 고아들을 길러냈다. 또 유산으로 받은 땅을 실향민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조금씩 떼어주고서 남은 건 단지 3천 평뿐이었다.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기에 등기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누군가 그 땅을 자기 앞으로 등기해 남은 땅마저도 다 빼앗겨 버렸지만 힘든 표정 한번 짓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수백 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데리고 서른 번도 넘게 이사를 다녔다.

내일 아침 먹을 쌀만 남았을 때도 누가 와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 그마저도 퍼주었다. 아내가 “우리 아이들은 무엇으로 먹이냐”고 걱정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다 먹이신다고 기록되어 있다”면서 달랬다. 새 옷을 사다드리면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다 떨어진 헌옷으로 바꿔 입고 들어오고, 심지어는 “바울아(아들) 너는 따뜻한 옷이 또 있지?”라고 말하며, 아들의 잠바들도 모두 나눠줬다.

최춘선 목사는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도장하나만 찍으면 증손자까지 4대가 학비지원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닐 뿐 아니라, 나라가 반쪽인데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춘선은 5남매를 목사와 교수 등으로 길러냈다.

3)맨발의 전도자

최춘선은 일본 와세대 대학을 나와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수재였고, 가가와 도요히코와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시절 군사훈련을 거부하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만주로 가서 광복군의 섭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전후에 김은석을 만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으며,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추측컨대 20여 년 가깝게 고아들을 돌보다가 1970년 초 50세 무렵에 모든 사역을 접고 문서선교와 노방전도에만 전념한 것 같다.

최춘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2003년부터 ‘팔복’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김우현 감독이 맨발로 길거리 전도를 하는 할아버지 최춘선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분의 일상을 다큐로 만든 동영상을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한 이후부터이다.

광복군 섭외부장을 지냈던 최춘선은 대한민국이 분단 상태에 있으므로 아직 완전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1970년 초 50세 무렵에 “남북통일이 되기 전엔 절대로 신발을 신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 “미스코리아 유관순, Why Two Korea? 미스터코리아 안중근, Why Two Korea?” 이 외침은 유관순과 안중근과 같은 사람이 참 한국인이며, 그런 이들만 있다면, 왜 두 개의 한국이 있겠느냐는 의미였다고 한다.

아들 최바울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최춘선은 아들의 결혼식 때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었고, 버스기사에게 떠밀려 골반 뼈가 부서졌을 때도, 예수쟁이라는 핍박을 받았을 때도,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혀 피가 흘렀을 때도 결코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최춘선은 2001년 9월 8일 80세의 일기로 소천 하던 순간까지 30년을 넘게 맨발로 다니며 전도하였고, 소천 하던 바로 그 날도 1호선 수원행 열차에서 전도하던 중에 의자에 앉은 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대전 현충원 제2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

최춘선 목사는 본래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서 김은석 목사의 제자이다. 이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2003년부터 '팔복'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김우현 감독이 맨발로 길거리 전도를 하는 할아버지 최춘선 목사를 우연히 알게 되어 그분의 일상을 다큐로 만든 동영상을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한 이후부터이다.




최춘선 전도자와 김은석 목사와의 관계

최춘선 목사와 그리스도의 교회와의 관계는 김은석 목사의 성경메모를 통해서 잘 알 수가 있다. 김은석 목사의 성경메모를 보면, 최춘선이란 이름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최초의 언급은 1953년 8월 24일자로 되어 있다. 이 날 최춘선 전도자는 김은석 목사와 함께 충북 충주시 남주동 2구 350번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하는 정찬성 전도자를 상봉하였다. 1957년 6월 6일에 김은석 목사의 대전 자택에 머무른 후 7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갔다. 1957년 7월 11일 오후에 김은석 목사가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 만교 최춘선 전도자 자택에 도착하였으며, 저녁에 김포 그리스도인 집회소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는 최춘선 전도자가 세우고 섬겼던 교회였을 것이 확실하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오정리 최병록 형제 댁에, 13일에는 오정면 도당 원경선 형제 댁에 머물렀는데, 최춘선 전도자가 김은석 목사와 동행하였다 1957년 8월 26일에는 편지를 받고 최춘선 전도자가 김은석 목사의 대전 자택으로 내려왔는데, 일련의 이런 모임들은 단순한 친교 모임이 아니라, 일종의 성경연구모임이었다. 이 당시 최춘선 전도자는 30대의 젊은이로서 언제 목사안수를 받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50대의 김은석 목사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회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것이다. 최춘선 전도자의 이름이 김은석 목사의 통신 및 성경연구회 명단에 빠짐없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김은석 목사는 1958년 5월 5일에 집중강의 일정을 동역자들과 학생들에게 통보하였는데, 이 통보를 받은 이들 가운데 최춘선 전도자가 포함되어 있다. 또 1958년 7월 10일부터 소년성경학과가, 8월 1일로 9월 10일까지는 집중성경공부가 있다는 통신자 명단에도 최춘선 전도자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김은석 목사가 1960년도에 연하장을 보낸 자들의 명단과 양녀 김명순의 혼인청첩자 명단에도 최춘선 전도자의 이름이 들어 있다. 또 김정만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최춘선 전도자는 김은석 목사에게 쌀을 보내기도 하였다(목포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19쪽). 이토록 최춘선 전도자는 김은석 목사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였다. 1949년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최춘선 목사는 김포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 131쪽). 그래서였을까? 최춘선 목사는 이렇게 외쳤다. "예수 십자가는 생명의 젖줄기, 평화의 젖줄기, 그래서 십자가 젖줄기 하나, 교회 하나, 교단은 여러 개가 있을지라도 교회는 하나다!"

최춘선 목사는 흔히 맨발의 전도자로 불리며, 2001년 9월 8일 80세의 일기로 소천하던 순간까지 30년을 넘게 맨발로 다니며 전도하였고, 소천 하던 바로 그 날도 지하철에서 전도하던 중에 의자에 앉은 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대전 현충원 제2애국지사 묘역에 묻히셨다.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가가와 도요히코와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 시절 군사훈련을 거부하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만주로 가서 광복군의 섭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목사 안수는 한국 그리스도 교회에서 받았으며, 언제부터인가 목회를 접고 문서선교와 노방전도에만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최춘선 목사는 앉으면 성경 이외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예배를 드리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언제나 존댓말을 하였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전도하며,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등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였던 전도자였다. 이후의 증언들은 인터넷에서 찾아 옮긴 글들임을 밝힌다.

맨발의 성자(聖者) 최춘선 할아버지
출저:
http://cafe.daum.net/grace-1009/99gZ/7
맨발의 성자(聖者), 맨발천사로 불리는 최춘선 할아버지!

그는 처음에 지하철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인(狂人)일 뿐이었다. 걸인과 같은 모습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찬 종이를 온몸에 두르고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나 “미스 코리아 유관순!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Why two Korea?”라고 외치고 다녔다. 더군다나 혹한의 추위에도 맨발로 다니는 모습은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무슨 임무라도 띤 듯 그렇게 30년 동안 매일같이 지하철을 누볐다.

그러나 그는 일본 와세대 대학을 나왔고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수재였으며 김구선생을 도운 독립운동가였다. 움막에서 기거할 것 같은 할아버지는 한남동 번듯한 주택에 살고 있었고, 5남매를 목사와 교수 등으로 길러냈다. 큰 부잣집 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큰 길에서 인천 국도까지 수십만평의 땅을 유산으로 받기도 했다.

도쿄 유학 중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이후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6.25 직후 길에 떠도는 노숙자들과 거지들을 집으로 데려와 거두었고, 국가나 단체의 보조 없이 고아들도 많이 길러냈다. 내일 아침 먹을 쌀만 남았을 때도 누가 와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 그마저도 퍼주었다. 아내가 “우리 아이들은 무엇으로 먹이냐”고 걱정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다 먹이신다고 기록되어 있다”면서 달랬다.

유산으로 받은 땅을 실향민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조금씩 떼어주고서 남은 건 단지 3천평 뿐이었다.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기에 등기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누군가 그 땅을 자기 앞으로 등기해 남은 땅마저도 다 빼앗겨 버렸지만 힘든 표정 한번 짓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수백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데리고 서른번도 넘게 이사를 다녔다.

할아버지는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도장만 찍으면 연금이 나오고 자녀들 대학 학비까지 나올 수 있었는데 신청을 거부했다.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며, 아직도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이므로 완전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할 뿐이다.

어려운 살림에서도 하나님의 보살핌과 '천사같은' 아내의 헌신으로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냈으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지하철로 매일같이 나갔다. 종이 한장이라도 아끼기 위해 신문지 등에 자신이 직접 문구를 써, 허술하지만 깊은 의미들을 담긴 전단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골목 어귀에 붙이고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렇게 그렇게 30년 동안 맨발로 다닌 것이다.

그를 세상의 빛으로 발견한 김우현 감독


한낱 광인으로 기억될 뻔한 최춘선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7년 동안 좇아다닌 김우현 감독(42. 전 KBS 인간극장 PD. 사랑의교회 집사)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상으로 예수님의 근원적인 사랑을 전하고자 1992년 8mm 중고 비디오 카메라를 구입해 활동을 했으며 36세에 처음으로 방송일을 시작하다 KBS '인간극장' 등을 연출했다.

김우현 감독이 최춘선 할아버지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95년 7월이었다. 걸인과 같은 모습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찬 종이를 온몸에 두르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비의 초대. 예수그리스도의 자비의 초대"를 외치면서 맨발로 걸어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해를 걸러 만날 때마다 참 신기하게도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고, 만나면서 점점 할아버지의 말이 영혼 깊숙히 파고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가 사는 한남동으로 찾아간 김 감독은 움막이 아니라 번듯한 집에 놀랐고 그의 아내로부터 듣는 할아버지의 옛 얘기에 더욱 놀랐다. 동네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친근하게 바라봤으며 동네 곳곳에는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전단지들이 붙어있었다.

김 감독이 마지막으로, 그것도 우연하게도 최춘선 할아버지를 본 것은 2001년 7월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다녔다. 그러나 목소리는 쇄했으며 많이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 온화한 모습은 여전했다. 김 감독은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발을 만져볼 수 있었고 할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만난 김 감독에게 신문광고 문구로 쓰인 '생명'이란 단어를 떼어주었다. 지하철이 들어오자 할아버지는 “충성은 열매 가운데 하나요”라는 말을 남기고 아주 먼 곳으로 가듯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흘러가는 차창 너머로 할아버지는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셨다.

김감독과 헤어진 할아버지는 1호선 수원행 열차에서 전도하다가 의자에 앉은 채로 평온하게 돌아가셨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곁으로 말이다. 그리고 대전국립묘지 제2애국지사묘역에 모셔졌다.

팔복(八福) 프로젝트

김 감독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방송일을 중단했고 2003년부터 '팔복'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팔복 정신을 영상으로, 사진으로, 글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2003년 여름 '팔복(八福)-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으로 3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완성, 홈페이지 '버드나무'에 올렸다. 이 영상물이 네티즌 사이에서 퍼져갔고 교회에서까지 상영되면서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듬해인 2004년 9월6일 국내 유일의 기독교 영화제인 서울기독교영화축제 기독교프로파간다 초청전에서 김 감독의 다큐 3편을 상영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상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 말 김 감독는 '맨발천사 최춘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을 출간했다. 버드나무에는 감동의 댓글이 이어졌으며 책 출간 이후 팔복 원정대가 결성됐으며 공식 홈페이지(http://palbok.godpeople.com)도 생겼다.

김 감독은 할아버지를 카메라에 담는 과정에서 왜 그가 " 미스코리아 유관순! Why Two Korea’, ‘미스터코리아 안중근! Why Two Korea"라고 외쳤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안중근 유관순 같은 분들이 참 한국인이며 그런 이들만 계신다면 왜 두 개의 한국이 있겠느냐’는 의미였던 것이다. 또 30년간 맨발로 다닌 이유도 "남북통일이 되기 전엔 절대로 신발을 신지 않겠다"라는 것도 알아낸다.

김 감독은는 그의 삶을 묵상하면서 이사야 20장 3절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면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게 표징과 징조가 된 것처럼”에서 그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 처럼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조롱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 이 시대 이사야인 것이다.

김 감독은 이처럼 귀한 삶을 살다간 할아버지를 누군가는 기록해야 했고 예수님은 자신을 도구로 사용했다고 고백했다.

“1995년 지하철 역에서 최춘선 할아버지를 우연히 보았고 2001년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도 모두 우연이었지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죽음의 문턱에서 신앙으로 회복하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위엄있고 힘찬 목소리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한 진정한 ‘팔복’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최춘선 목사님| ˚.. --···기독교동영상

"부끄러웠던 맨발의 아버지가 이제는 제 인생의 모델입니다" - 최춘선 목사님의 장남 최바울 목사님

지하철 3호선 푹푹찌는 무더위를 뚫고 한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맨발이었다. 굳어지고 갈라진 맨발로 그는 지하철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계절이 바뀌고 한파가 몰아친 어느 겨울날 그 노인은 여전히 맨발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외치며 죽는 날까지 거리를 배회했던 맨발의 가엾은 노인을 바라볼 때마다 과연 "저이의 자식은 누구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그가 죽고서야 한 다큐 감독에 의해 그가 목사이자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는 것을 알게 됐다.

"
고 최춘선 목사," 그가 죽은지 7년 남짓, 남아있는 그의 가족이 궁금했다. 자녀들에게 최춘선 목사는 어떤 아버지였을까? 지금 그들에겐 무심히 거리를 벗삼은 아버지의 기억이 어떻게 남아있을까 알고 싶었다. 호기심으로 만나본 최춘선 목사의 장남 최바울 목사는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갈라져 피가 나오는 발에 깊이 박힌 유리조각을 빼내며 "이제 그만 나가시라" 애원했지만, 아버지의 열정을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아들은 "아버지의 맨발"을 닮고 싶어한다.

"아버지 죄송해요. 얼굴은 아버지 모습을 그대로 닮았는데 발은 닮기 힘들것 같아요." 2004년 맨발 할아버지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던 고 최춘선 할아버지의 장남 최바울 목사가 전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고백이다. 맨발의 전도자로 살다가 2001년 주님 곁으로 떠난 맨발 할아버지 3년뒤 어느 다큐멘터리 감독의 카메라에 담겨있던 영상이 전파되며 세상을 감동시킨지도 어느덧 4년이 지났다. 거렁뱅이 예수쟁이에서 맨발의 천사로 세상을 감동시킨 할아버지의 사역은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시대 참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어주고 있다.

# 천국에서도 전도하시는 아버지

돌아가신지 7년이 지난 지금도 인터넷과 DVD 책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할아버지, 지난 21일 찾아간 한남동의 동그라미 유아심리연구소에서 최춘선 할아버지가 아버지임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를 만났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라는 음성과 모습은 어디서봤더라하는 의문을 잠시 일으켰다. 맨발의 할아버지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한 최바울 목사,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유아심리를 연구하며 유아교육전문프로그램과 사역자를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자리가 더 커져있었기에 맨발 할아버지에 대한 물음에 기억을 더듬는 최목사의 눈시울은 촉촉해졌다.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죽기까지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예요." 목이 매였는지 말을 잠시 아낀 그는 생전에 육신의 고통까지도 견뎌가며 전도에 힘썼던 아버지의 모습을 전했다. "기력이 다하신 아버지께서 한번은 식사중에 아가~ 숟가락 좀 가벼운 거 없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기력이 떨어지셨으면 숟가락이 무겁다고 하실까 하고 맘이 아팠지만, 아버지의 전도는 막을 수가 없었어요.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전해야만 했던 맨발 할아버지, 십자가에 빚진 자 된 그의 마음속에는 부인과 자식은 물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명감과 열정이 자리잡아 강직한 전도자의 삶을 그칠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조금도 의심없는 믿음의 소유자 아버지는 내일 일은 절대로 걱정하지 않는 분이셨어요.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도 전부 나눠주시고, 새옷을 사다드리면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다 떨어진 헌옷으로 바꿔입고 들어오시고, 심지어는 "바울아(아들) 너는 따뜻한 옷이 또 있지? 라고 하시며, 제 잠바들도 모두 나눠주셨으니까요. 당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부족했던 부분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항상 채워주셨음을 전했다.

한번은 다음날 아침에 먹을 쌀을 전부 나눠줘 어머니께서 발을 동동 구르시고 계신데, 지방에서 한 성도가 첫 수확한 쌀이라며 새벽차로 올라와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자신의 옷이 하나둘 없어질 때마다 속상했었다고 전하는 최목사, 중학교 때는 동생들을 모아놓고 아버지가 예수를 믿어서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니, 우린 절대로 예수 믿지 말자라고 했던 때도 있었어요.

김포 일대의 땅이 대부분 아버지의 소유였고 자동차가 다섯대나 있었는데, 모두 나눠주고 개천다리 밑에서 살다가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었던 것 같아요.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지가 도장하나만 찍으면 증손자까지 4대가 학비 지원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터라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서류를 위조해가며 받아내려는 독립유공자 자격을 나라가 반쪽인데 그 돈을 받을수 없다며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으셨어요. 목숨을 걸고 지키셨기에 대한민국을 지독히도 사랑하셨죠. 동생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지 말자던 사춘기 시절의 상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모두 채워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위탁하신 가족의 삶

예수 믿지 말자던 다짐이 "오직 예수, 오직 기도"로 바뀌어 버린 사건도 있었다. 모든 재산을 다 나눠주고 쫓기다가 생계를 위해 어머니와 미술학원을 열기로 했을 때였다.

미술학원 첫 입학식 때였는데, 사회를 맡았던 저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거예요. 교회도 아니고 기독교 학원도 아니라 망설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바울아! 너는 그것도 못하니?" 라는 불편한 마음을 심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큰소리로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 제1회 동그라미 미술학원 입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외치고 기도를 드렸죠. 아니나 다를까 4명이 바로 그 자리를 떠나버렸어요. 그런데 다음날 하나님께서 8명으로 채워주셨어요. 그 이후로 항상 기도를 하며 월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미술학원이 됐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나님을 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라는 그의 고백은 모두 기적이고 이적뿐이라 동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딸을 키우며 아버지의 자리에 있는 그에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 저도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께서 많이 외로우셨을것 같아요. 늘 죄송한 마음뿐이예요. 제가 친구같은 아들이 되어드렸어야 하는데 가정에서 성경이외에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던 아버지를 너무 높이만 바라봤던 후회스러움이 최목사에게 밀려왔다. 아버지께서는 하나님께 자식들의 교육을 위탁하셨던 거죠.

#복 받은 무소유와 희생의 삶

자녀들은 하나님께 위탁하고 나라를 위해서 또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몸바쳐 싸움을 하던 최춘선 할아버지, 버스기사에게 떠밀려 골반뼈가 부서져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고통의 눈물을 보이면서도 전도를 멈추지 않았고(목발을 짚고 전도) 두꺼운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혀 피가 흘러도 예수쟁이라는 어떠한 핍박도 할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염려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었는데 마지막 손을 흔드시는 모습이 아버지의 임종의 모습이었어요."

친구의 연락을 받고 인터넷에 올라온 아버지의 동영상을 보고 밤새도록 울었다는 최마울목사 두꺼운 발바닥에 박힌 유리를 핀셋으로 수도없이 빼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아버지를 아들인 저도 몰라드린 부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아들의 결혼식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으셨다는 최춘선 할아버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예수님의 말씀을 맨발의 사랑으로 지켜낸 맬발의 천사, 그런 아버지의 삶을 닮아가고자 하는 아들의 마음이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하나님께 위탁하셨기에 은혜 가득한 무소유의 삶으로 사랑을 전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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