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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6-22 21:49
카닝햄 선교사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023  
윌리암 디 카닝햄(William D. Cunningham/1864-1936)은 1864년 7월 19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트론 타운쉽(Tyrone Township)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매튜(Matthew) 카닝햄과 어머니 리디아(Lydia Newcomer)는 농부로써 아들 윌리암에게 깊은 신앙심과 자립심을 심어 주었다. 그 결과 윌리암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일과 공부를 번갈아 해야 했다.

1875-1879년까지 데비드 뉴코머(David Newcomer) 농장에서 일했고, 1880년 갈렙(Galleip) 상점에서 일했다. 1881년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임시교사 자격증을 얻었고, 1881-1883년 겨울까지 클린톤(Clinton)과 1884-1886년까지 오버톤(Overton)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1887년에 23명 가운데서 수석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888-1891년까지 웨스트 뉴톤(West Newton)에서 교사로 일했다.

1884년 12월 7일 윌리암은 유그휴그헤니(Youghiousheny) 강에서 침례를 받고 예배시에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올드 벧델(Ola Bethel) 그리스도의 교회에 교인으로 등록하였다(올드 벧델 교회는 후에 밴더빌트(Vanderbilt)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장소를 옮겼다).

1891년 9월 21일 윌리암은 베다니 대학(Bethany College) 2학년에 편입하여 신학을 공부하면서 선교사의 꿈을 키웠고, 1892년 6월 5일 첫 설교를 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1894년 7월 29일 세인트 토마스(St. Thomas)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부임 첫 해에 139명에게 침례를 주었고, 같은 해 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141명의 결신자를 만들기도 했다.

1898년 6월 2일 웨이버(W. R. Waver) 목사의 주례로 에밀리 보이드(Emily Boyd)와 결혼하였고, 1898년 9월 4일 첫딸 엘로이스(Eloise)를 얻었다.

윌리암은 결혼 직후 일본 선교에 뜻을 품고 선교본부에 문을 두드렸으나 건강문제로 번번이 거절당하자, 선교부의 지원없이 개인적으로 선교하기로 결심하고 작은 인쇄기를 마련하여 1901년 9월 12일 차이나(China)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901년 10월 1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이 기계로 그는 {도쿄 크리스찬}(Tokyo Christian)이란 선교지를 발행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윌리암은 1902년 도쿄에 요츠야 선교회(Yotsuya Mission)을 설립하고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에 힘쓴 결과 처음 7년 동안 1903년 7월 5일, 1905년 4월 8일, 1906년 6월 9일에 각각 한 개씩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다섯 곳에 성경공부 반을 운영하면서 300여명을 가르치는 성공을 거두었다.

윌리암 카닝햄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907년이었다. 일본에 온지 6년째 되던 해에 중국 상해에서 1907년 4월 25일부터 5월 7일까지 선교사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상해로 가던 길에 한국에 온 카닝햄은 처음으로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1년 말경에는 한국에서 부흥의 불길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하였으며, 요츠야 선교회를 통해서 일본인 성도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설립을 위해서 15.70엔을 헌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는 일본 도쿄에 한국인 교회를 설립하였다. 1930년 도쿄에는 10개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하나가 재일본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였던 것이다. 그리고 1931년에는 한국에 2개의 교회가 임대건물에서 시작되었다.

카닝햄이 1907년 처음 한국을 찾았을 당시 이원균(Li, Wan Kyun)과 이인범(I. P. Lee, 사진 오른쪽)을 만났다. 이들 한국인들은 이미 믿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카닝햄과 친해질 수 있었다. 이들은 카닝햄을 통해서 일본에 건너가 카닝햄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고 침례를 받았으며,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원균은 1924년 10월에 파송되었고, 이인범은 1932년에 파송되었다. 이인범은 한국 YMCA에서 일을 했는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100여명에게 침례를 주었고, 몇 군데에 교회도 개척하였다. 카닝햄은 이 일에 관해서 {도쿄 크리스찬}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하나님은 "가라"고 명령하셨고, 한국 사람들은 와서 도와 달라고 간청해 오고 있으며, 우리들도 가고 싶다. 가고 싶은 정도가 아니고 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가기를 절대적으로 원한다. 보내고 안 보내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달렸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신약교회의 설립의 때가 왔다. 한국에는 2개의 큰 교파의 교회가 있는데, 이들은 성공하고 있지만, 이인범에 의하면, 인간적인 신조를 벗어나서 성경만 믿으려고 하는 무리가 증가하고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이인범을 두 번이나 한국에 보냈다. 한국교회는 두 가지가 유명하다. 성경공부와 기도이다. 내가 한국에 가서 한번은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모인 숫자가 1,200명이었다. 참석한 자들이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카닝햄은 선교부에서 일본에 파송된 12명의 선교사 및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동역하였는데, 그들 가운데서 나중에 한국으로 옮겨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설립과 선교에 힘썼던 분들이 죤 체이스(Mr. & Mrs. John T. Chase) 부부이다. 체이스 부부는 1927년에 일본에 도착하여 7년간 카닝햄 선교부에서 일하다가 카닝햄과의 갈등 끝에 면직되었고, 그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1936년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카닝햄은 1남 2녀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둘째 딸 도리스(Doris Elaine)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1928년 7월에 일본에 돌아와 카닝햄 선교부에서 2대째 선교사로 일했다.

카닝햄은 암으로 미국에서 1936년 6월 24일 오후 8시 45분에 소천하였다. 일본에 건너가 선교사로 일한지 35년 3개월 7일 만이었다. 그가 생전에 전도한 일본인들 가운데는 분조 후지타(Bunzo Fujita)라는 일본 대학의 학장과 외교관 히로시 사이타(Hiroshi Saita)가 포함된다. 후지타는 일본 황태자자로부터 교육과 예술부분에서 훈장까지 받은 분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죽을 때(1919-1934)까지 제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히로시 사이타는 외교관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동경 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다.(참고서적: 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를 중심으로 - 1864-1936} 한성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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