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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4-26 07:08
손잡아주기의 기적 3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537  
▶손잡아주기의 기적 3◀
중학교 2학년 때 부친을 잃고, 할머니와 어머니, 두 누님과 동생 셋을 거느린 한 소년 가장이 씩씩하게 자라서 부산에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이어서 경남정보대학, 동서대학교, 부산디지털대학을 차례로 설립하였으며, 제11, 1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직을 지냈다. 그가 바로 장성만 목사이다. 그가 이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할머니의 기도 때문이었다. 가장을 잃고 한 가정을 책임지게 된 어린 성만이 “이제 어떻게 살아가나? 무얼 먹고 살아가나? 누굴 믿고 살아가나?”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근심에 쌓여 있을 때, 그를 붙잡아준 것은 할머니의 기도였다. 어느 날 밤, 소년 성만이는 할머니의 애끊는 기도소리를 들었다. “하나님, 우리 성만이가 절망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저 어린 것이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성만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집 가장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성만이의 아버지가 돼주세요.” 성만이는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때 할머니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순간 참아왔던 슬픔의 둑이 붕괴되고 통곡의 바다를 이뤘다. 할머니의 품에서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열다섯 살 소년은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한숨처럼 기도했다. "하나님, 성만이에게 용기를 주세요. 우리 성만이에게…." 그 밤에 그들은 찬송을 불렀다. “성령이여 강림하사/나를 감화하시고/애통하며 회개한 맘/충만하게 하소서/예수여 비오니/나의 기도 들으사/애통하며 회개한 맘/충만하게 하소서.”(190장)
둘째, 주변 인물들이 그의 손을 잡아준 때문이었다. 소년 성만이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공부를 하던 중에 6·25가 터졌고, 국군에 입대하여 복무를 마쳤다. 그 무렵에 신학생 장성만은 부산 대교동 미국문화원 강당에서 강연회를 열고 있던 동석기 목사를 만났다. 동석기 목사는 1904년 23세 때 미국 하와이에 농부로 이민 갔다가 본토로 건너가 신학공부를 마치고, 감리교회 목사로서 1913년에 귀국한 분이셨다. 귀국 후 14년간 목회하는 동안 구미 소식통의 역할 등의 일로 독립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한 바가 있고, 3.1운동이 일기 직전에 민족대표로 서명하였지만, 이후 33인에는 들지 못한 분이다. 동석기 목사는 이후 미국에 건너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접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에로 돌아가자는 환원정신에 감동하여 신시내티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조선 땅에 최초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다. 신학생 장성만이 6.25동란 중에 이 분의 강연을 듣고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한 것은 1953년 1월 1일이었다.
장성만 목사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 일이었다. 그 일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일본주재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였던 마크 맥시가 그를 일본에 초청하여 오사카 성서 대학에서 학부과정을 마치게 하였고, 미국 신시내티 크리스천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모든 가능한 길을 열어 주었다. 그가 후원을 얻어 부산에 경남정보대학을 세우고, 제11, 1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지내고, 동서대학교와 부산디지털대학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마크 맥시라는 일본주재 미국인 선교사의 헌신적인 손잡아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맥시 선교사가 장성만 목사의 손을 잡은 그 순간이 바로 장성만 목사에게 기적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적은 단순히 또 다른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기적을 낳게 한 첫 열매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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