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인간의 미래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들은 종종 영원한 세계를 꿈꿨다. 그리스인들은 낙원인 샹젤리제와 무한지옥인 타르타로스가 모두 다 음부인 지하세계에 있다고 믿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서 혼령으로 가야하고, 비통과 시름과 타오르는 불과 망각의 강들을 건너야 한다.
중국 사람들은 복사꽃이 활짝 핀 무릉도원의 봄을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보았다. 물과 곡물이 풍부하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이곳을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차단된 세계이다.
유럽 사람들은 황금시대를 지배한 농경의 신(神)인 사투르누스의 영원한 봄의 정원 아르카디아를 유토피아로 보았다. 아르카디아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고, 곡괭이질을 하지 않아도 풍부한 과일과 곡물을 선사해주는 곳이다. 우유와 감로주가 강물처럼 흐르고, 녹색 호랑가시나무에서 황금빛 꿀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샹젤리제에는 부활이 없고, 무릉도원과 아르카디아는 현실세계의 이상촌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미래를 보다 확실하게 보장하고 제시한다.
첫째, 기독교는 부활을 보장한다. 기독교이외에 그 어떤 종교도 부활과 부활의 축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샹젤리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는 곳이고, 무릉도원과 아르카디아는 죽기 이전의 목가적인 삶을 말한다.
둘째, 기독교는 내세를 보장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는 낙원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지고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장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계 22:1),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리는 곳이다(계 22:2). 새 하늘과 새 땅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는 곳이다(계 7:16).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사는 곳이다(계 22:3).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사 65:18).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는 곳이다(계 21:4).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친히 빛을 비추는 곳이다. 밤이 없고, 해와 전기가 필요 없는 곳이다(계 22:5). 새 하늘과 새 땅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곳이다. 해함이 없고 상함이 없고(계 22:3; 사 65:25), 질병이 없고, 죽음이 없는 곳이다(계 21:4).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놀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곳이다(사 65:25).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실수나 잘못이 마음에 생각나지 않는 곳이다(사 65:17; 계 21:4).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성도들이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 하는 곳이다(계 22:5). 남에게 지배를 받거나 고용 당하지 않는 곳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구속받은 성도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튼튼하고,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고, 보석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새 예루살렘성에서 보호받으며 안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갈 특권을 얻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로 자기 의복을 빨아야 한다(계 21:9-22:15).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한 사람들은 모두 다 이 놀라운 축복에 참예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라도 성도들에게는 보장된 미래가 있기에 실패자가 아니라, 승리자이다.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미래가 무상으로 주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