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초인’과 헤라클레스의 ‘영웅성’의
차이▣
삶이 녹록치 않고, 힘들고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
자신이 짊어진 인생의 짐이 평소보다 커 보일 때, 슬픔이 절반쯤 섞인 아련한 아픔이 가슴을 저며 올 때, ‘외롭다,’ ‘쓸쓸하다’는 기억이
되살아날 때, 마음이 우울해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란 물음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듯, 마음에 일어날 때, 신에 대한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한 헤라클레스의 영웅적 삶을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신의 존재와 도우심을 부정하는 자들은 스스로 제 문제를
해결해야하며, 자기를 구원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앙심을 나약한 자들의 자기투영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헤라클레스에게 있었던 깊은 신앙심을
간과하고 있다. 이들의 대표적인 인물, 니체는 권력지향적인 강한 ‘초인’이 되라고 말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과 좌절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몸과 마음을 잘 단련하고 헛된 희망을 버려야 하며, 종교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니체는 행복이란
거짓 위안일 뿐, 슬픔과 고통이 더 인간적이라고까지 했다. ‘불행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강박관념이라고 했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나 그런 고집스런 주장이 세상을 모순덩어리로 보게 만든다고 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뿐 아니라, 책임져야
하며, 타고난 운명이외에 아무 것도 되기를 원치 않는 인간이 되라고 했다. 만약 운명의 신이 당신에게 나타나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할 당신의 인생이 가감 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라고 묻는다. 또 모든 행동에 앞서 또는 모든 행동을 한
후에 ‘이 행동이 영원히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가?’라고 묻고, 그 물음에 환희에 찬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면, 그는 권력에의 의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초인이라고 말한다. 약한 자는 내세에 희망을 걸고 살지만, 강한 자는 현재의 삶을 즐긴다고 했다.
니체는 영웅 헤라클레스를 닮으라고 했지만, 헤라클레스는
니체가 말한 대로 운명에 자신을 맡긴 채 자신의 운명을 즐긴 인물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헤라클레스는 신들이 인정한 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 헤라클레스는 니체처럼 숙명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우연과 숙명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가엾은
운명과 싸웠다. 싸움을 하되,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했고, 옳은 가치와 정의를 위해서 했다. 그는 지혜의 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았다. 신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영웅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니다. 신은 고난을 극복할 방법을 항상 예비했고, 헤라클레스는 그 방법을 찾아 기어이 난관을
극복했다. 헤라클레스는 최후까지 신 앞에서 겸손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아테나의 영웅 테세우스가 복잡한
미궁에 들어가 괴물과 싸울 때에 아리아드네가 건넨 실타래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과 같다.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그 복잡한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덕분이었다. 우리가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의 시인
쉴러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용감한 헤라클레스는 끝없이 싸우며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헤라의 증오는 지상의 모든 고뇌를, 지상의 모든
수고를 그에게 짐 지웠으나, 운명의 생일로부터 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그는 이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