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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10-05 06:48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11)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801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11)

[오후 성경공부 내용]
12장은 예수님의 지상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마지막 한 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장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지상생애 마지막 유월절 6일 전에 베다니동네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동네는 예수님께서 죽어서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던 곳입니다. 이곳에 예수님께서 주후 30년 3월 31일 금요일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로부터 꼭 일주일 후인 금요일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3일 만인 일요일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굴 무덤에 계신 시간은 대략 38-40시간 정도이고, 날짜로는 3일간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축제 곧 무교절은 춘분이 지나고 찾아오는 첫 음력 보름날부터 시작되고, 기독교의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첫 음력 보름이 지난 후 돌아오는 첫 일요일에 지켜집니다.
2-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신 바로 그날 마리아는 식탁테이블 곁에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드시던 예수님의 발에 0.5리터 정도의 순정품 나드, 값으로 환산하면 무기술 노동자 일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왜 이런 돌출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평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경청했었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던 터라 누구보다도 더 잘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드려진 어둠의 그늘과 얼굴 가득한 수심과 고뇌를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일에 분주해서 나사로는 병들어 죽었다가 살아나서 예수님의 속사정을 파악할만한 경향이 없었을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고 또 출세에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슬픔과 고뇌를 알아 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만큼은 무언가 강하게 느끼는 것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날 마리아가 값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것은 그런 어떤 알 수 없는 강한 느낌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도보여행 후에는 손님에게 손발을 씻을 물을 제공하거나 씻겨 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렇더라도 혹자들이 말하듯이 베다니 사람들이 씻을 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거나 마리아가 최고의 희생과 헌신을 표현한 사랑고백 성격의 것이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행동으로 보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나드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스파이크 나드(Spike Nard)로 불리며, 인도에서 공급되었고, 건초와 같은 향을 지닌 나드향에는 세스키페르핀과 바레라놈이란 성분이 함유돼 있어 집단 세균성 감염 등을 차단할 수 있는 살균 작용과 잔치 음식으로 인한 배탈이나 설사 등의 예방 및 해독 작용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나드향에 심리적 안정효능이 있다는 최근 연구결과는 마리아가 수준 높은 향유 전문가였을 것이란 추측까지 낳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고뇌를 읽었던 마리아는 심리적 안정을 주는 나드향을 선택했을 만큼 나드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고 보아집니다. 마리아가 나드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씻긴 일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 말고도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란 것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이 돌출행동에 대해서 가장 먼저 문제를 삼고 나온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길 계획을 하고 있었던 가룟 유다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직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 했을 때(요 6:15), 예수님께서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설교를 들은 이후로 예수님에게 실망을 느꼈고, 이때로부터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자들에게 팔아넘길 생각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가룟 유다의 마음을 읽고 계셨고,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표적 직후 유다의 변심뿐 아니라, 예수님을 추종했던 많은 수의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요 6:66).
우리는 12장에서 서너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과 온몸과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 마르다처럼 분주히 식탁 봉사나 남을 섬기는 일에 힘쓰는 사람, 나사로처럼 예수님 곁에 앉아서 잔치를 즐기는 사람, 그리고 구경꾼들 그리고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를 볼 수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유대인의 큰 무리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려고 구경나와 있었습니다. 4-6절을 보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라 했고,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척했지만, 실은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회계를 맡고서 공금을 횡령한 것은 그가 예수님에게만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의 신의도 저버린 까닭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올가미를 놓아 남을 등쳐먹고 사는 거미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기만을 위해 사는 개미와 같은 사람이 있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수고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나 마리아와 마르다 같은 사람이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고 가룟 유다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던 가진 자들이 바로 거미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키엘르케고르는 세상을 구경꾼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군중에 휩싸여 사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일에 헌신적으로 쏟아 붓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9절의 구경나온 유대인들이 세상을 구경꾼으로 혹은 군중에 묻혀 사는 사람들일 것이고, 마리아와 마르다와 같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일에 헌신적으로 쏟아 붓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구경꾼들'은 피상적인 인생을 살면서 환경에 따라 이리 저리 방황하며, 이런 저런 삶의 경험들을 맛보지만, 근본적인 결단을 미루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조만간 권태를 느끼게 되어, 삶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게 됩니다. 한 곳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군중들'은 더 이상 자기 인생을 형성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군중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과 참된 인간성을 회피합니다. 그러므로 군중은 비인간화된 자기 상실의 표본이 될 수 있습니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많은 사람 가운데 파묻힌 한 개의 모래알과 같이 무명인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삶을 남에게 의존하는 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삶의 목적과 가치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으로 이 땅에 왔고, 하나님이 부여한 삶에 목적이 있다는 소명의식을 찾게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구경꾼으로 세상을 살지 아니하고, 군중 속에 자신을 파묻어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일에 헌신적으로 쏟아 붓습니다. 더 이상 구경꾼이 되거나 군중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가치 있는 일에 몸을 던집니다. 그러한 사람의 삶은 나드 향유와 같은 향기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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