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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9-21 22:42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요 11:1-1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924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요 11:1-16)

[오후 성경공부 내용]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표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마지막에 소개된 것이 우리가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죽어서 굴 무덤에 장사됐던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입니다. 그리고 본문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부활은 믿음과 새 생명에 관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의 총체적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죽은 예수님을 살린 분으로, 예수님을 죽은 나사로를 살린 분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부활의 첫 열매로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은 죽임으로부터의 살림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인 죽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죽임과 영혼의 죽임까지도 포함하는 죽임으로부터의 살림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죽임뿐만 아니라, 작은 집단과 큰 사회를 망라한 타락과 병듦까지 다 포함하는 죽임으로부터의 살림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죽임은 아담의 범죄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죽임의 법칙인 현재의 자연법칙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죽임의 법칙이 없었습니다. 이담의 범죄이전에 어떤 자연법칙이 있었다 해도 현재의 자연법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자연법칙은 엔트로피 법칙으로써 생명에서 사망으로 가는 법칙입니다. 살림에서 죽임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건강에서 병듦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싱싱함에서 시듦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새것에서 헌것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사랑에서 미움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평화에서 전쟁으로 가는 법칙입니다.
부활은 이런 자연법칙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생명법칙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활이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예수님 재림의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그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죽임으로 상징되는 옛 시대의 자연법칙의 사슬을 끊고 생명으로 상징되는 새 시대의 생명법칙에로 점진적으로 이루어가고 맛보고 경험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거듭난 새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새 삶은 예수님 재림의 때에 완성될 새 생명의 삶에 대한 약속이자, 지금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맛보아지고 경험되어지는 새로운 삶이요, 생명으로 가득한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우리 인간의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대 자연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부활로 설명되는 생명회복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서 죽게 된 영혼의 부활과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서 죽게 된 육체의 부활과 우리 인간이 죄로 병들게 한 인간 공동체의 회복과 우리 인간이 물질의 욕심으로 병들게 한 지구회복을 다 포함합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은 죄로 죽었던 자신의 영혼이 산 사람들이고, 미래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새로운 육체로 태어날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큰 복을 주신 것은 이제 더 이상 죽임의 일을 하지 말고, 살림의 일을 하라고 한 것이요, 더 이상 죽음의 사슬에 얽매어 있지 말고, 생명을 살리는 자유인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큰 복음을 전해서 그들도 예수님 믿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요, 자기 주변의 공동체나 사회가 병들지 않도록 힘쓰는 일이요, 혹 병들었다고 하면 고치는 일에 힘쓰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지구와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임의 일은 마귀를 기쁘게 하는 일이요, 살림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중한 병에 걸려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지구가 환경파괴로 얼마나 중한 병에 걸려 있습니까? 이 중한 병을 고치고 살리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요, 진정한 부활사건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기적 가운데 열 번째가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출 11:1-12:30). 이 재앙은 아주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않고 장자로 태어난 것은 다 죽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안에 3대 독자가 살았다고 칩시다. 할아버지도 죽고, 아버지도 죽고, 아들도 죽고,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들만 살아남게 되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집트가 눈물바다로 변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 무서운 재앙 때문에 앞서 행해진 아홉 가지 재앙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바로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기적과 평행을 이룹니다. 모세의 재앙이 마지막 클라이맥스였듯이 예수님의 기적도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죽음’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생명이 있던 곳에 죽음을 가져왔고, 기쁨이 있던 곳에 통곡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죽음이 있던 곳에 생명을 가져다주었고, 슬픔이 있던 곳에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타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생명을 억압하고 생명을 죽이는 종교는 참된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는 종교가 참된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억압하고 생명을 죽이는 옛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새 시대를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구체화된 것이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이고, 죽어서 무덤에 묻혔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을 고친 것은 예수님께서 빛을 주시는 분임을 입증하는 표적이었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입증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복음은 살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자연법칙에 지배받지만, 복음은 생명법칙에 지배받습니다. 자연법칙은 죽이는 것이요, 생명법칙은 살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사람과 동물을 죽이는 재앙을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중을 억압하고 무거운 멍에를 메우고 죽이는 일을 했지만, 예수님은 민중을 풀어주고 해방하고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자연법칙만을 믿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죽임의 일을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부활을 믿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는 분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살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살리고, 친구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환경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살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살림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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