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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7-02 15:43
예수를 믿는지라(요 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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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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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지라(요 4:1-45)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긍정적인 변화의 능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서 베풀었던 표적들과 그분이 전해준 율법이 부정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들이었고, 옛 시대(율법시대)를 대표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베풀었던 표적들과 그분이 전해준 복음은 새 시대(복음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모세와 예수님을 대조하거나 옛 질서와 새 질서, 또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제2장에서 옛 성전과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되는 새 성전이 대조되었고, 제3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와 하늘에서 오신 선생 예수님이 대조되었으며, 제4장에서는 야곱의 우물이 주는 물과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대조되었고, 유대인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예루살렘성전 예배나 사마리아인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그리심산 예배와 같이 장소에 매이는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예배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참 성전, 참 선생, 참 예배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할 것입니다. 참 성전은 인간이 지은 예배당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몸, 곧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세우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참 선생은 종교지도자들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을 긍정적인 변화의 능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그것을 전해 받은 사도들의 말씀, 곧 신약성경 속에 있습니다. 참 예배는 예루살렘성전(A.D. 70년에 로마제국에 완파됨)이나 그리심산성전(400 B.C.경에 세워졌으나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서 128 B.C.에 완파됨)과 같은 어떤 장소에 매이는 예배가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예배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변화와 관련해서 물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습니다.
제1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물로 침례를 주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새 시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한 회개의 침례였습니다(1:26;31,33).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아래 베풀었던 침례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침례는 새 시대인 교회시대(=은혜시대와 성령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 베풀어진 침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침례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들 침례가 회개를 위한 것이었다면(마 3:11),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침례는 믿고 회개한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제2장에서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고(2:1-11), 제3장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4장에서는 예수님이 산 물, 곧 영생수를 주시는 분이라 하였으며, 제5장에서는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의 물에서 그의 건강을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6장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6:16-21).
제2장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물은 결례(潔禮) 곧 죄 씻음을, 그리고 포도주는 살림 곧 생명을 상징합니다. 제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의 물은 중생의 씻음을, 제4장 사마리아 여성과의 대화에서의 물은 죄 씻음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부정(不淨)하고 불결한 자들이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기를 꺼려하였습니다(4:9). 제5장 베데스다 연못의 물은 치유의 씻음, 그리고 제6장 갈릴리호수의 물은 구원의 씻음을 상징합니다.
이들 물에 대한 언급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수반될 때 비로소 물이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을 봅니다.
제2장에서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믿음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되게 한 능력입니다. 제3장에서도 니고데모의 믿음이 전제(前提)된 후에 거듭남의 신비가 밝혀집니다. 제4장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4:39),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았고(4:42), 제5장에서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고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6장 갈릴리호수에서는 풍랑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안으로 영접함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물(=침례)이 분명하게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침례)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물(=침례)에 사람을 구원하는 어떤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 두 나라로 갈라선 때는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었습니다. 그러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은 722 B.C.년에 앗수리아제국의 침략 때문이었습니다. 앗수리아제국은 침략 후 가난하고 못 배운 자들만 본토에 남겨놓고 유식하고 재산이 많은 자들은 다 포로가 잡아갔습니다. 그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 부득불 이방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또 배우자들의 종교에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722 B.C.년 이후 혼혈(混血)과 혼교(混敎)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남왕국 유다도 586 B.C.년에 바벨론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하였습니다만 바벨론제국은 끌러온 유다민족에게 그다지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한곳에 모여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유배지에서 그들의 전통과 종교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던 반면, 앗수리아제국에 끌러간 북왕국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남왕국에 남은 자들 또한 못 배우고 가난한 자들뿐이었지만,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이 남왕국에 돌아옴으로써 유대교의 전통과 유대인혈통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들 속에서 남쪽 유대인들은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不淨)하게 보는 편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4장에 등장한 여성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부정(不淨)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를 제3장에 나온 유대인 율법학자 니고데모와 대조했을 때, 신분 차이는 크게 벌어집니다. 이 여성에게 정을 준 남자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마음에 상처만 남겨놓고 떠난 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진정한 내님이라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진정한 임을 고대하던 때에 우물가에서 일곱 번째로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부정(不淨)하게 생각하는 사마리아 땅의 여성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셨고, 존재가치에 대해서 깊이 자각(自覺)하게 하셨으며, 자신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성은 증거자로 변화됩니다. 이는 제1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증거자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증거자로,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와 빌립이 증거자로 변신한 것처럼, 사마리아 여성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증거자로 변화됩니다. 이 여성이 예수님을 증거(와 보라)함으로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4:3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증거자의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써 그분의 양식을 삼는다고 하셨습니다(요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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