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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10-26 22:40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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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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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4-38)
[오후 성경공부 내용]
일요일 예루살렘 입성 후 마지막 만찬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한주간의 행적을 요한복음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와 기도문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입성후의 행적을 보면, 월요일에 성전을 청소하셨고(마 21:12-22; 막 11:12-25; 눅 19:45-48; 21:37-38), 입만 풍성하고 열매가 없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화요일은 많은 질문과 답변이 있었던 날입니다(마 21-25장; 막 11:27-13장; 눅 20-21장; 요 12:20-50). 이 날 무화과나무가 고사되었고, 종말과 심판에 관한 비유들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날엔 질문도 많았습니다. 제자들의 종말의 징조에 관한 질문,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세금납부에 관한 정치적 질문,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교리적 질문, 바리새인들의 큰 계명에 관한 윤리적 질문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기하신 질문도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 과부의 헌금, 예루살렘의 멸망, 재림, 종말 등에 관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강연은 대부분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것들로써 이 많은 말씀들과 질문들이 이 한날에 다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내용들을 주제별로 모우고 이것들을 또 13장 천국비유를 중심축으로 하는 대칭으로 배열하였기 때문입니다. 화요일의 말씀들은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 대칭되는 내용으로써 산상수훈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이 화요일의 담화들은 천국이 임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구체적인 모의가 있었을 것이고(마 26:14-16; 막 14-10-11; 눅 22:3-6), 목요일에 제자들은 유월절식사를 준비했습니다(마 26:17-29; 막 14:12-25; 눅 22:7-38; 요 13:1-17:26). 유월절 양은 평일 희생제사 시간과 동일한 오후 3시에 도살합니다.
그리고 이 날 밤(유대시간으로 금요일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셨습니다. 또 주의만찬제정사와 고별사를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겨서 죽음을 앞둔 기도를 하신 후에 체포되셨습니다. 체포 후 무덤에 장사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유대시간으로 금요일 하루에 이뤄진 일들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만찬이 공관복음서의 유월절식사 날짜와 동일한가라는 문제가 신학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13장 1절의 “유월절 전에”와 3절의 “저녁 먹는 중”이 동일한 날짜가 아닐 수 있고, 또 19장 31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이 안식일(유월절 명절중인 안식일이므로 특별한 안식일로 취급 함) 전날인 금요일(예비일)이었다는 점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언급한 금요일과 일치하지만, 18장 28절의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라는 말이 마치 유대인들이 아직 유월절식사를 하지 못한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 해의 유월절식사는 유대시간으로 금요일이 시작되는 밤 곧 우리 시간으로 목요일 밤에 먹었습니다. 그런데 18장 28절의 상황은 금요일 새벽, 그러니까 유월절식사가 끝난 지 대여섯 시간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요한이 예수님의 사망시간을 목요일 오후 3시 곧 유월절 어린양의 도살시간과 일치시킴으로써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으로 소개하려고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간은 금요일 오후 3시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여러 가지로 유월절과 연관시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예수님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까지 유월절 잔치를 먹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의 동향을 감시하고 체포하여 구금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모의하고 실행했던 행동대원들이었을 것입니다. 설날이라도 보초 설 사람은 보초를 서야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식사 중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34-35절), 예수님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1절).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의 때를 영광 받으실 때로 보신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활짝 열린 기독교시대를 보신 때문이며,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이 사명을 감당해야할 제자들이 권력에 집착하며,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실 줄 알고, 자리다툼을 벌리는 일까지 있었고, 예수님을 배신하는 제자들까지 생겨나서 불신이 깊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식사하시다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유대인들의 복수심은 대단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피의 복수자'가 합법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당시의 법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동해상해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마지막 말씀으로 당부하셨고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13장에는 두 제자들의 배신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빵의 문제 곧 돈 때문에 예수님을 쫓았던 가룟 유다는 스승을 팔아넘겼고, 수제자를 자처하며 용맹을 떨치던 베드로는 고문이나 총칼의 위협이 아닌 단지 대제사장의 종들의 물음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로 갔고, 무지하고 순수하기 그지없던 베드로는 한 때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회개한 후에 지상 최초의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36-38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이 말은 폴란드인 헨릭 쉥케비츠(H. Sienkiewich)가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쿼바디스’에 나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온갖 삶의 풍상을 다 겪은 듯한 한 노인이 한 소년과 함께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 네로가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기독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탄압하기 시작할 때, 초로의 이 노인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어느 한 해안에서 고기를 잡으며 황혼을 맞고자 은둔의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산등성이에 우뚝 선 나무위로 밝은 빛이 비췄습니다. 노인은 이전에도 한번 이 빛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노인은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때 무릎 꿇은 노인 곁에 선 소년의 입이 열렸습니다. “로마의 내 백성들이 널 찾고 있다. 네가 내 백성들을 버리면 난 로마로 돌아가 두 번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소년의 음성은 곧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되돌아가자, 로마로!”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가 박해받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목양하다가 체포돼서 나 같은 죄인은 바로 죽을 수 없다고 간청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묻기 전에 우리의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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