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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9-12 05:53
선한 것을 본받으라(요한삼서 1-12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8,310  
선한 것을 본받으라(요한삼서 1-12절)

요한삼서는 가이오에게 보낸 개인 편지로써 지역교회의 지도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순회 전도자들을 무시하고 영접치 않는 자로써 본받아서는 안 될 자로 거론이 되고 있고, 데메드리오는 본받아야 할 자로 추천 받고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 송(宋)나라에 술을 만들어 파는 업주가 있었습니다. 술맛이 일품이었고, 고객에게 무척 친절하였지만, 술이 팔리지 않아 만들어 놓은 술이 변질되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업주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웃에 사는 양청(楊靑)이란 사람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가 답하기를, “자네 말이야, 집에서 사나운 개(猛犬)를 키우고 있지 않는가? 술을 사러간 고객에게 으르렁대고 물려고 덤비니, 누가 자네 집으로 술을 사러 가겠는가?”고 했다고 합니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회사든, 교회든, 국가든, 어느 크고 작은 집단이든 간에 사나운 개가 버티고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들지를 않게 되고, 결국은 문을 닫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디오드레베가 바로 교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전도의 문을 가로막는 사나운 개였던 것입니다. 디오드레베란 ‘양육 받음“이란 뜻인데, 그는 양육을 받은 자가 아니라, 양육을 받아야할 자였던 것입니다. 이런 우려를 금치 못한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를 써서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다“고 말하면서 디오드레베의 악행을 본받지 말고, 데메드리오의 선행을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이 권면이 요한삼서의 기록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첫 번째 인물은 '가이오'입니다. 가이오는 요한삼서의 수신자이며 요한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큼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은 그를 향하여 말하기를,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가이오는 요한으로부터 삼박자 축복을 받은 자였습니다.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영혼이 잘되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육신이 건강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이런 지극한 사랑과 축복기도를 받은 가이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요한은 4절에서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혈육의 자녀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 영적인 자녀를 말합니다.
가이오는 사도요 목회자요 장로인 요한을 매우 기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가르치는 자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그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가이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이오는 떠돌이 순회전도자들과 나그네 된 자들에게 진실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본문 5-6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이오의 선행은 순회전도자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많은 교회들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도 요한도 그 소문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베풀 때, 굳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선행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입으로 당신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벌이지 않았지만, 그분이 행하신 선행들로 인해서 그분의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 하늘의 음성과 귀신의 입을 통해서까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송을 받았습니다.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할 뿐 아니라, 진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자였습니다. 본문 7-8절에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순회전도자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직접 목회자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직접 선교지에 가지 않더라도, 목회자와 전도자와 선교사를 돕고 후원하는 일로써 목회자의 일에, 전도자의 일에, 선교사의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뛰는 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일인 것입니다.
두 번째 인물은 ‘디오드레베’입니다. 디오드레베는 교회발전을 저해하고 전도의 문을 가로막는 사나운 개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디오드레베란 ‘양육 받음“이란 뜻인데, 그는 양육을 받은 자가 아니라, 양육을 받아야할 자였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디오드레베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디오드레베는 으뜸되기를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9-10절에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 도다”고 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으뜸되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동기와 방법이 나빴을 경우일 것입니다. 고객이나 동료를 향해서 으르렁대고 물어 찢으려고 사정없이 덤비는 사나운 개와 같은 경우일 때가 으뜸되기가 나쁜 경우입니다. 요즘 경영에서의 화두는 ‘최고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도 교회도 회사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고가 되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최고가 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맙니다. 그러나 디오드레베와 같은 최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디오드레베는 가짜 최고 브랜드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짜인 최고 브랜드를 모방한 가짜 최고 브랜드라 할 수 있습니다. 양의 가죽을 쓴 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으뜸되기는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입니다. 오래 버틸 수가 없습니다. 진짜 앞에서 가짜는 반드시 가짜란 사실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도자가 판치는 집단은 앞서 한비자의 글에서 으르렁대는 사나운 개 때문에 술집이 망하는 것처럼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 26-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23장 10-12절에서는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 또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은 최고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자신의 것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나 남의 것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섬기는 자’ 또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항상 자신이나 자신의 것에 대해서 부족을 느끼고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만에 빠지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익은 곡식은 머리를 숙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익은 곡식 사이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쭉정이거나 가라지일 것입니다. 가짜가 언제나 큰소리 치고 가짜가 언제나 고개를 쳐드는 법이니까요. 따라서 참 지도자의 모습은 겸손히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는 사도요 목회자요 장로인 요한을 멸시하고 접대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9절에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주의 종들을 악한 말로 중상모략하였고, 접대하지 못하도록 훼방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0절에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다”고 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디오드레베는 반드시 그의 악행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할 자였습니다. 본문 10-11절에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다.”고 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데메드리오'입니다. 데메드리오는 앞서 언급한 가이오처럼 진리 가운데서 행하는 자였습니다. 본문 말씀 12절은 데메드리오가 그 일로 뭇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사도 요한과 그의 일행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디오드레베의 악행을 본받지 말고, 데메드리오의 선행을 본받으라는 취지로 요한삼서를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신랄하게 비판과 저주의 말씀을 하셨는데,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란 생각이 들어서 몇 가지만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첫째,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입니다(13절).
둘째,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은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자기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입니다(15절).
셋째,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사랑과 믿음은 버리는 자입니다(23절).
넷째,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자입니다(25절).
다섯째,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은 회칠한 무덤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자입니다(27절).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이 교회 안에 있으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회사에 있으면, 회사를 떠나는 인재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이 아무리 많다하더라도 그들을 핑계 삼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리거나 성경의 권위와 변화의 능력마저 무시하는 건 스스로 더 큰 불행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유명브랜드의 일류상품이라고 가정해 보시면,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물은 가짜요 모조품이 됩니다. 가짜가 극성을 부린다고 해서 진짜인 유명브랜드를 탓하면서 유명브랜드를 가짜 취급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일부 잘못된 신앙인과 교회들을 탓하면서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비방하는 인물들은 그들이 누구건 간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 아니면, 10절의 말씀처럼, 고의적으로 악한 말로 망령되이 폄하하며 무시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가짜를 보고서 진짜를 폄하한다고 진짜가 가짜가 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이 디오드레베와 같은 잘못된 인물이 아닌지, 값싼 은혜와 값싼 신앙에 젖어 잘못된 삶을 사는 가짜 신앙인이 아닌지 반성하고, 채찍질하는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을 뿐 아니라, 끝내는 저주의 불못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처럼 선한 것을 본 받는 자가 되고, 참되신 하나님을 부단히 찾는다면, 그분으로부터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란 말을 들을 뿐 아니라,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는 축복도 받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육신이 건강하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삼박자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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