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4-07-17 13:2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5)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68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5)

1998년 11월에 영국의 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가 저술한 ꡔ제3의 길ꡕ이란 책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이후로 ‘제3의 길’이란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앤소니 기든스는 영국 언론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의 사부’로 불리고 있습니다. 기든스는 토니 블레어가 주창하는 ‘제3의 길’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든스는 ꡔ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의 갱신ꡕ이란 책도 출간하였습니다.
ꡔ제3의 길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이념을 뛰어 넘어 인류가 지향해야 할 정치 사회적 전망을 제시한 책입니다. 한마디로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좌우를 포용한 제3의 길을 가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제3의 길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길이 아니라, 이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뛰어넘는 새로운 중도좌파의 길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 가운데에도 앤소니 기든스처럼 ꡔ제3의 길ꡕ을 제안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고린도서를 쓴 바울과 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제3의 길’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바울의 말처럼 실제로 당대의 유대인들은 열심히 표적을 찾고 있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얻고자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던 이유는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메시아인가는 그가 행하는 하늘로부터 내린 표적으로 판단하게 되는데, 메시아의 등장만이 유대인들은 이상국가(理想國家)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았던 이유는 그들이 이데아라 불렀던 참실재의 세계로 그들을 인도해줄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표적으로도 안 되고, 지식으로도 안 되고, 표적과 지식의 결합으로도 안 되고,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야 이상국가를 세울 수 있고, 참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면서 제3의 길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수의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다수의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인즉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야말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을 이상국가로 인도할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을 참 실재의 세계로 인도할 하나님의 지혜란 것이며, 그것이 비록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일지 모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많은 종교나 철학이 있었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요, 산길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1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들이 원했지만 얻지 못했던 것들의 실상이요, 헬라인들이 그토록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능력을 통해서 메시아의 등장을 기다리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참 길을 찾고 있었고, 헬라인들은 철학의 지식을 통해서 이데아의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참 길을 찾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바를 얻지 못했고, 찾던 바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는 헬라인들이 보고자 했던 참 실재에로 나갈 수 있는 길이요, 유대인들이 오래도록 기다렸던 메시아요,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은 명백합니다. 유대인들이 구했던 율법의 길도 아니오, 헬라인들이 찾았던 철학의 길도 아니란 것입니다. 인류에게 “새롭고 산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기본 사상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인류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나 천사나 모세나 또는 아론의 제사장들보다 월등히 더 위대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는 믿음의 선구자이시며 완성자이시며 중보자이시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은 유대인들이 바랐던 것들이 이뤄질 실상이요, 헬라인들이 보기를 원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뤄질 증거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이 “새롭고 산길”에 대해서 에베소서 3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감춰진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밝혀진 그리스도의 신비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는 60-90년 사이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되고나서도 유대교와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또 동족의 박해를 이기지 못해서 유대교에로 복귀하려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우왕좌왕하는 자들에게 왜 그리스도께서 ‘제3의 길’인지, 바울의 표현처럼, 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지, 왜 그리스도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월한 존재이신지, 그리고 왜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우월한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자'(7:25)고 하였습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는 논문으로 시작해서 설교로 발전하고 있고, 편지로 마치고 있는 매우 독특한 글입니다. 특히 히브리서는 선포와 교훈이 네 차례 반복되고 있는 매우 훌륭한 문체로 쓰인 글입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히브리서에는 비교가 많이 나옵니다. 가장 빈번한 비교는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복음과 율법의 비교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 비교를 모형론 또는 유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이 모형론은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대표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인데요,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의 내용을 실체로 보고, 그 먼저 나타난 모세와 율법을 모형 또는 그림자로 보는 견해입니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 놓았듯이, 먼저 나타난 것, 그래서 먼저 본 것은 나중에 나타날 좋은 일의 모형이며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10:1). 그러므로 먼저 나타난 모세와 율법은 나중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복음의 그림자일 뿐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체인 나중 것, 즉 그리스도와 복음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유대교는 실체인 기독교의 모형 또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실체가 바울에 의하면 이전 세대들의 사람들에게 감춰졌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1장에서 천사들보다도 뛰어나신 분으로 소개하였고, 2장에서는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지만, 지금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분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고, 마귀를 없이하시며, 백성을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하시며,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며,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시는 구세주로 소개하였습니다. 3-4장에서는 안식을 주시는 분으로, 5장에서는 아론보다 뛰어난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면서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굳게 잡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고 하였습니다.
6장의 경고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가르침을 떠나서 성숙함에 이르자고 하면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오래 참고 믿음을 지키면 반드시 약속을 받아 이루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7장에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8-10장에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특유의 모형론을 들고 나오면서 예수님을 옛 언약보다 뛰어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옛 언약시대의 장막보다 더 뛰어난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과 더 나은 제사의 큰 제사장으로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을 만나는 “새롭고 산길”이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끝까지 견디자, 믿음으로 하자, 사랑으로 하자, 소망 중에 인내로 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11장에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축복의 반열에 든 신앙선배들을 일일이 열거하여 증거로 제시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저자가 강조한 또 다른 내용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장 1절에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고, 12장 2절에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10장 29절에서는 배교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였으며, 10장 32절에서는 이전에 큰 고난을 당하고도 잘 참고이긴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고, 또 13장 3절에서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저자가 배교직전에 놓인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방법은 앞에서 말씀드린 모형론이라는 것인데요, 유대인들에게는 대조효과가 뛰어난 방법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대조효과란 다 쓰러져 가는 몇몇 초라한 집을 먼저 보여 주고 난 후에 정상적인 집을 보여주면, 잠재고객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 집을 훨씬 더 훌륭하게 평가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한다든지, 복음과 율법을 비교하는 일은 월등히 높은 위치에서 대조를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긍심을 키울 수 있고, 얻어지는 효과도 크지만, 그 반대로 등급이 낮은 위치에서 월등한 것과 대조를 하거나 비교를 하게 되면,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얻게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보디가드」란 영화의 후반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요, 배우 케빈 코스트너 (Kevin Costner)가 가수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경호원으로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휘트니 휴스턴이 열연한 대중가수 레이첼을 죽이려 한 사람 때문에 케빈 코스트너가 프랭크란 이름의 경호원으로 열연을 했는데요, 레이첼을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레이첼의 언니였습니다. 레이첼의 언니도 동생처럼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동생이 유명해지면서 동생의 어린 아들을 돌보는 보모로 나옵니다. 또 한 사람은 레이첼의 언니가 동생을 살해하려고 고용한 사람인데요, 정작 살해를 부탁한 언니는 그가 누군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부살인자는 레이첼의 경호원인 프랭크와 함께 대통령의 경호를 함께 맡았던 전직동료였습니다. 이 사람이 레이첼의 청부살인을 맡게 된 이유는 레이첼을 광적으로 좋아한 팬이었거나 돈이 궁해서가 아니라, 이전 동료였던 프랭크에 대한 경쟁심과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프랭크가 맡았던 의뢰인을 죽임으로써 책임감이 워낙 강한 프랭크를 침몰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레이첼의 경호원 프랭크는 대통령이 암살되던 때에 비번이었고,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대통령 암살에 대한 죄책감을 무겁게 느끼면서 경호원직을 그만둘 만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레이첼과 그의 어린 아들이 암살위협에 떨게 된 것은 레이첼의 대중적인 인기를 자신의 처지에 비교하면서 남몰래 질투했던 언니의 삐뚤어진 비교 때문이었으며, 책임감과 실력이 남달리 뛰어난 프랭크를 경쟁상대로 보았던 전직 대통령 경호원의 삐뚤어진 비교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영화는 경호원 프랭크가 온 몸으로 총탄을 맞으며 의뢰인의 목숨을 건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비뚤어진 비교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라는 점과 일단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무한 책임을 지는 경호원의 사명감이 돋보이는 영화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로 경호원 프랭크처럼 우리 인류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고 온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모든 일에 예수님을 표절하고, 거짓으로 일관하는 사단은 프랭크의 전직 동료처럼 예수님을 질투하여 인류를 보호하고 지키며 사랑하는 예수님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우리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몸을 던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들을 살리셨습니다. 비록 그분은 죽어 무덤에 묻히기까지 하였지만, 하나님이 그분을 살려내어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게 하셨고, 사람들로 하여금 영광과 경배와 찬양을 받게 하셨으며, 대중가수 레이첼처럼 그분을 믿고 따르며 사랑하는 자들과 부부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분을 통해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십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등 뒤에 두고 앞에서 이끌어 가시는 분이지, 우리들 뒤에서 몰아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앞서가는 그분을 바라보며 좌로도 치우치지 말고,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다.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