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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27 13:37
창세기 044: 야곱이 인식한 하나님(창 28:1-22)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952  

창세기 044: 야곱이 인식한 하나님(창 28:1-22)

본문은 에서를 기만하고 아버지를 속인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피하는 장면입니다. 밧단아람은 하란 인근 지역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북편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고원지대로써 리브가의 고향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밧단아람으로 가서 그곳에서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고 한 것은 아내 리브가의 간곡한 부탁도 한몫을 했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삭이 늦게나마 큰 아들 에서의 장래에 대한 자신의 큰 실수를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빈 축복, 3-4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야곱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빈 축복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야곱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에게로 이어지는 보존언약의 계승자가 된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멸망당한 인류로부터 건짐을 받은 새로운 조상인 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생존권을 보장하시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이 바벨탑 사건 이후 셈의 후손 아브라함에게 전달되어 마침내 야곱에게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1:28; 9:1-8; 28:3-4)는 축복을 이어받게 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건설하고자한 하나님의 나라의 계승자가 된 것입니다. 인류는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거부하고 힘의 논리에 근거하여 인간이 왕이 되는 인간중심의 나라를 건설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민족을 통해 그분의 주권이 온 세상에 나타나는 새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새 민족의 조상으로 삼고, 그 후손들로 하여금 새 나라를 건설토록 하시겠다는 약속은 마침내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야곱은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많은 후손들을 생산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12:1-3). 실제로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나왔고, 그의 열두 아들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진화론자들이 하나님중심의 나라를 거부하고 인간중심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최전선에 서고 있습니다. 진화론이 무엇입니까? 진화론이야말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 곧 힘의 논리를 펼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영원한 나라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뤄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성도님들은 깊이 인식하시고 이 일에 즐거움으로 동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면서 축복의 근원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3절)이란 표현을 쓴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을 통해서 성취될 것을 믿음으로 내다본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이삭은 야곱을 불러 가나안 사람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밧단아람의 브두엘의 집에 가서 아내를 취하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아내가 될 사람은 야곱이 수행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함께 인식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자기가 거주하는 가나안 땅에서 구하지 않고 자기가 떠나온 고향의 친척을 통해서 구해야만 했을까요? 왜, 이삭은 야곱에게 아내를 가나안 땅에서 구하지 말고 외삼촌의 딸들에게서 구하라고 했을까요?

이 물음에 정확한 해답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첫째는 정치적이나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가나안 땅에서 며느리를 맞는 것이 좋은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롯이 소돔사람들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했던 것도 정치적인 이유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실패를 면치 못했습니다. 롯이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알려주면서 함께 피신해 줄 것을 강청했지만, 사윗감들 중에는 조롱하고 비웃을 뿐 그 누구도 따라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나오미는 성공적인 케이스에 듭니다. 모압에서 얻은 두 며느리 중에 룻이 나오미의 백성과 신앙을 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의 동서인 오르바는 그녀의 백성과 그모스 신에게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룻기 1:15).

아브라함과 이삭이 가나안 땅에서 며느리를 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는 혈통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공유라는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뒤늦게 에서는 부모의 마음을 읽고 나서 이스마엘 가계에서 부인을 한 사람 더 얻지만, 이것 또한 인간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받았다고는 하나 어머니가 이집트 출신이요, 부인이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이스마엘에게서 난 딸 마할랏은 에서의 사촌뻘이긴 하지만, 혈통이나 신앙에서 거리가 깨 먼 관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약속의 자녀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기 나라가 없는 유랑민족이었습니다. 남의 나라에 얹혀살면서 자기들이 신세지고 사는 땅을 넘보는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방민족의 땅을 내 것으로 삼겠다는 꿈과 비전을 함께 공유하고 함께 이루기 위해서는 그 땅의 거주민이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와서는 그 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깨지게 되고 말 것을 아브라함과 리브가와 야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삭도 그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옳은 판단과 결정을 한 야곱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사는 외삼촌 라반에게 가기 위하여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던 중 벧엘에 이르러 유숙하다가 꿈을 꾸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새롭게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13-14절). 이 약속은 야곱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받은 유일한 계승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나라를 야곱을 통해 건설하시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의 언약을 확인해 줌으로써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에 대하여 인정한다고 보증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은 당신 스스로 지키신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5절)는 약속은 야곱을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할 뿐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성도님들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벧엘 사건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삭의 하나님도 되시며, 동시에 야곱과 동행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도 되시고, 미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야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장막 안에서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이 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간적으로 영생하시는 하나님일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편만해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브엘세바에서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벧엘에서도 하란에서도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고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생각이나 머릿속에서만의 존재가 아니라, 시공간 속에서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야곱의 삶은 야곱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노출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생활 하나하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된 삶의 구체적인 형태로 이 세상에 나타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연속성이 결국은 야곱의 인생이란 발자취로 역사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각과 삶은 단순히 개인적인 인생행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야곱의 인생행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며, 야곱의 인생행로를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의 현장에 살아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의 나그네의 행로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약속받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의 발자취로 자신의 인생행로를 그려갔던 것처럼, 우리 성도님들도 짧은 인생 살면서, 야곱의 도망자의 신세처럼, 우리 자신만의 답답한 삶이 되게 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의 인생행로가 하나님의 역사의 발자취로 남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성공하는 신앙인들이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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