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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1-21 10:41
예수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요 19: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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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skin/board/basic/img/icon_view.gif) 조회 : 5,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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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요 19:25-30)
[오후 성경공부 내용]
예수님은 AD 30년 4월 7일(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있었습니다. 이 여섯 시간동안에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경에 남겨진 말씀은 일곱 마디입니다. 본문에 실린 세 마디 이외에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한 마디, 누가복음에 세 마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실린 세 마디는 모두가 예수님의 육신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 보라 네 어머니라... 내가 목마르다. . .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23:34-46)에 실린 세 마디는 모두가 기도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막 15:34)라는 한 마디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소개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은 복음서 저자마다 복음서를 기록하는 목적과 강조점이 달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한정된 지면에 모든 것을 다 소개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이 태초부터 말씀(Logos)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소개하였고,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분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표적들과 권위 있는 말씀들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육체의 고통을 모르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육신을 가진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효성스런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었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마태와 마가가 유일하게 소개한 예수님의 절규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소개하지 않고, 그 대신에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 목마르다. . . 다 이루었다!”는 말씀만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생략하고 기록하지 아니한 이유는, 짐작하건대, 사랑하는 어머니를 가장 아꼈던 제자에게 부탁하시고, 갈증을 호소하시며 자신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예수님에게 이런 절망적인 절규는 요한복음서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누가는 예수님의 활동과 말씀을 수집하여 기록하면서 몇 가지 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 몇 가지 주제들은 배척, 성령, 기도, 그리고 여행입니다. 누가는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정치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시고,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시며, 민중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그렸고, 그런 와중에서도 성령 충만하신 가운데 끊임없이 기도하시며 가야할 목적지 예루살렘을 향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다가가시는 예수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특히 누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에서까지 배신자와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회개한 강도를 축복하시고, 자신의 영혼까지 하나님께 의탁하는 참으로 감동적인 기도장면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유일하게 소개하는 예수님의 절망적인 절규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 절규는 아마 누가 당시의 신앙인들이 박해상황에서 울부짖었을 절규와 동일한 것이었을 텐데도 누가가 생략하고 기록하지 아니한 이유는, 짐작하건대, 배신자와 박해자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올리시고, 강도까지 축복하시고, 자신의 영혼까지 하나님께 의탁하는 예수님에게 이런 절망적인 절규는 누가복음서에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신앙인들에게 모범적인 기도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오로지 예수님의 이 절규만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또 예수님은 왜 이런 절망적인 기도를 했을까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이미 그 같은 고통을 각오하고 있었고, 제자들에게도 여러 차례 예고(豫告)하였습니다. 가난한 민중을 편들며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정치권의 안정을 위협했을 때, 안식일 법을 어겨가면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었을 때,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권위에 도전하며 그들을 저주받을 놈들이라고 말했을 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며 유대교전통에 반기를 들었을 때,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예루살렘의 가진 자들에게 대항하였을 때, 또 사십육 년째 보수 및 증축되고 있는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며 예루살렘의 성전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민중의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외쳤던 예언자들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예수님이 왜 절규를 했을까요?
예수님을 버린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배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고,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호언했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런 나약한 민중들의 배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버림을 하나님의 버림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사람을 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대하는 것을 나눠서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외마디 절규는 “이렇게 크게 고통당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일입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일의 잘잘못을 하나님께 묻고 검토 받고 심판 받겠다는 뜻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외마디 절규는 문자 그대로 “나를 이렇게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외마디 절규는 아픔에 대한 호소였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입 밖으로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외마디 절규는 출산의 아픔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찌 고통 없이 값진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죽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귀한 일인데 어찌 그만한 고통이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여섯째, 예수님의 외마디 절규는 “아버지의 뜻은 반드시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져야 합니다.”는 요청이었습니다.
일곱 번째, 예수님의 외마디 절규는 곧 하나님의 절규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몸짓이자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죽인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철길에서 놀고 있던 자식을 구해내기 위해서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듯이 하나님은 우리 못난 인간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 던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절규에서 인간을 구원코자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절규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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