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5-07-01 11:27
창세기 033: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창 20:1-18)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064  
창세기 033: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창 20:1-18)

약속의 땅을 떠난 롯이 경험했던 불행한 일들과는 반대로, 약속의 땅에 거주했던 아브라함은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가나안을 침공한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을 무찔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의 축복(14장)을 받았으며,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시고 언약을 맺어주셨으며(15장), 하갈한테서 이스마엘을 얻었고(16장),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의 표시로 할례제도를 세워주셨으며, 이삭출생을 약속하셨고(17장),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들을 영접하였으며(18장), 이전보다 발전된 신(神)에 대한 개념을 갖는 등 아브라함의 삶은 화가 변하여 복이 되는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이런 일련의 축복이 비단 아브라함 개인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모든 이들이 받아 누렸고, 또 받을 축복이라 믿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을(19장) 목격한 아브라함은 사해보다 더 아래쪽으로 옮겨가 네게브 사막 그랄 땅에 머무르게 됩니다. 가나안에 머물렀던 아브라함이 갑자기 그랄 땅으로 옮겨간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굳이 두 가지를 추측해 본다면, 첫째는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15:18)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될 땅을 미리 살펴보려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후에 이 땅은 유다지파에게 주어졌고, 오늘날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을 끌어다가 옥토로 가꾸고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네게브 사막으로 이주한 두 번째 가능한 이유는, 그가 본래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이었다는 점입니다. 물과 풀이 풍부한 곳을 찾아서 이주하는 것은 그의 일상적인 일이고, 그의 여정이 무려 수천 킬러미터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실로 떠돌이 중에도 제대로 된 떠돌이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떠돌이 유목민이었다는 점, 물과 풀을 찾아서, 특히 약속의 땅을 찾아서 끊임없이 장막을 옮겼다는 점은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에 불과하다는 점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썩어질 육신의 발은 이 땅을 딛고 살지라도, 항상 저 높은 곳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받기 위해서 힘써 달려가는 마라토너가 돼야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빌 3:12-14).

아브라함 당시 그랄 땅은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하였고, 아비멜렉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들의 공식칭호로써 ‘아버지 왕’ 곧  ‘나라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함의 후예로서 지중해의 북쪽서안 터키지방에 살다가 가나안 남쪽서안으로 이주해온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배를 다루는 항해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당대에 지중해를 주름잡던 민족이었습니다. 더불어 서안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가나안의 다른 부족들보다 용맹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앞선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섬겼던 신은 ‘다곤’으로 바다의 신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많은 가축과 식솔들을 거느린 아브라함으로서는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경계심과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고, 비록 나이 많아 늙었으나 아름다웠던 사라를 빼앗기 위하여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1절).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딸이면서 어머니가 다른 누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속임수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요? 성경에 보면, 이 속임수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책망했다는 말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일 때마다 그리고 사라를 이집트의 바로와 그랄의 아비멜렉에게 빼앗길 때마다 강력하게 개입하고 있고, 그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오히려 복을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을 속인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것일까요? 이런 문제는 오늘날에 수많은 윤리적인 문제들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지를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풀기 어려운 숙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속임수의 문제는 낙태, 안락사, 사형, 생명공학, 폭력 등과 더불어 수많은 윤리적인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윤리학자들 가운데서 무조건적인 절대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입장은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1600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거짓에 반대하는 글을 몇 차례 쓴 일이 있습니다. 그는 이 글들에서 어떤 경우에서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거짓에 대해서는 사라가 그의 누이였기 때문에 그가 한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는 면죄부를 부여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절대주의자들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일순간 눈에 보이는 인간의 위협을 두려워했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실수가 있었다는 것, 그의 믿음이 불완전했다는 것, 그도 역시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아브라함의 편에 서셨고, 아브라함을 도우셨습니다.
상황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단 하나의 규범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입장과 동일한 처지에 놓였다면, 호전적인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나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 혹은 남편과 식솔들과 가산을 보호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라는 아브라함의 판단이 비록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것일지라도 그의 판단이, 혹은 자신의 희생이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아브라함이 목숨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또 그들의 그런 진심이 하나님께 통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도우실 것이라 믿고 그리 행동했을까요? 아무튼 결과는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였으니까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체험했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롯은 소돔성 입구에서 만난 범상치 아니한 두 나그네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두 딸을 소돔 사람들의 성노리개로 내놓으려고 했습니다. 과연 옳은 처사였을까요? 그의 진심이 하나님을 감동시켰을까요? 롯의 처신에 대한 결과는 좋았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이 소돔성에 남아서 불로 멸망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공리주의자들이라면 아브라함과 롯의 처신에 대해서 찬사를 보낼 것입니다. 그들은 결과를 중시할 뿐 아니라, 좋은 결과는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인데, 아브라함도 살고, 사라도 살고, 모두가 사는 것이 사라가 정조를 잃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일까요?
차등적 절대주의자들은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구별하여 더 중요한 일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역시 목숨을 지키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상충적 절대주의자들은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들 사이에 갈등을 피할 수 없을 때에 더 중요한 일을 행하고, 덜 중요한 일을 행하지 아니한 일에 대해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나중에 회개할 것을 염두에 두고 속임수보다 더 중요한 목숨을 지키려고 했을까요?
오늘날 수많은 주님의 자녀들이 눈앞에 닥친 위협에 견디지 못하고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하곤 합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기보다 강한 이방민족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의 자화상이자, 모형일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뒷수습을 하나님께 맡겨둔 채,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잘못된 결정에 개입하시고, 도움의 손길을 펼치신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선택을 한 후에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회개할 줄 알아야하고,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기에 앞서서 그들의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그들은 왜 그렇게밖에 선택할 수 없었을까를 고민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비록 사라를 취한 아비멜렉의 행위가 당대의 관행으로 볼 때, 합법적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잘못된 사회풍조였습니다. 명명백백한 죄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사회적 관행이나 관습의 잣대로 살아가지 말고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비멜렉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 수치를 당한 사라에게 은 천개를 주어 보상했습니다. 그런 그의 회개로 인해서 그는 가문의 모든 태를 닫으신 하나님이 내린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회개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의 신이십니다. 회개한 자들을 기꺼이 용서하십니다.
아비멜렉에게 내린 재앙이 거둬진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라 부른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했을 때 이뤄진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의 가족들의 출산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아브라함의 영적인 능력 아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상의 군왕들 앞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로 부각시켜 주심으로써 아브라함의 신변을 보호하고 그의 지위를 막강하게 만들며, 그와 그의 후손이 장차 팔레스타인 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될 기틀을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은 위해 개입하시고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모든 일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게 하며, 소망 중에 인내로 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