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37: 믿음의 연단과 여호와이레(창 22:1-24)
창세기 22장에서 우리는 ‘연단하시는 하나님’과 ‘예비하시는 하나님’ 모두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14절에서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풀어야할까요? 히브리서 11장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하신 말씀에서 쓰인 ‘시험’이란 말은 각각 그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전자의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사단의 시험처럼 ‘유혹’하지 아니하신다는 뜻이고요, 후자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하신 말씀은 ‘연단’하시려고 테스트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연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단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연단 받은 후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케 하는 사단의 유혹과는 달리, 자질이나 능력 등을 일정한 절차에 따라 알아보는 테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자질을 몰라서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연단시키는 것입니다. 연단이란 용광로에 광석을
넣고 뜨거운 불에 녹여서 불순물을 없애고 순전한 금속으로 제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한 것처럼, 금이 섞인 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녹인 후에 순금을 뽑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이유도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소중하고 값지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1장 2절의 말씀처럼, 이와 같은 연단을 위한 시험을 만날 때에는 축복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고,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할
줄로 압니다.
‘모리아’ 땅 또는 ‘모리아’ 산은 ‘여호와의 계시’ 또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이신 곳’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악지역으로써 솔로몬 성전과 골고다언덕이 있던 곳입니다(대하 3:1). 아브라함이 거처하던 브엘세바로부터 대략 80-9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보로 사흘길이나 되는 먼 이곳을 예배할 장소로 특별히 지명하신 것은 장차 세워질 솔로몬 성전과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염두에 두고 하신 분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 모리아 산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순교하셨습니다.
본문 2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는 장차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자 예수님을 인류의 대속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예시하는 그림자적인 사건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 믿음의 후손들에게 베풀어 주실 것을 예시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처럼 혹은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가장 아끼는 것조차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이삭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서 싹을 낸 후에 많은 열매를 맺듯이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받는 일입니다. 이삭이 제물이 되기까지 순종함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높임을 받듯이,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는 축복과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로 높임을 받고 계십니다.
본문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떠난 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수고와 정성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아브라함이 도끼를 들어 장작을 쪼갤 때 느낀 심정은 자신의 마음이 쪼개지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쪼개는 준비나 성의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온다면, 안 나온 것보다야 월등히 낫겠지만,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약속한 것은 75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낳은 것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00세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약속하시고 주신, 어렵고 귀하게 얻은, 정말 소중한 것을 당신께 바치라 했을 때에는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상식조차도 손에 무엇인가를 쥐었을 때에는 눈이 어두워지고, 생각과 귀가 막혀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진심을 의심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작은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큰 것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믿음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손에 쥔 가장 아끼는 것을 내려놓게 되는 경우에서조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란 말을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소중하게 아꼈던 외아들 이삭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고, 하나님의 명령에 이유를 달거나 지체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해서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둬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란 것을 알았고, 거둬 가시면
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8절의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믿는 부활신앙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도록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단이 주는 시험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시험을 당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은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준다.”고 했습니다.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강도 높은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은 그동안 체험했던 하나님에 대한 신인식의 차원을 한 계단 더 높이게
되었습니다. 14장 22절에서 ‘엘 엘르욘’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17장 1절에서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을, 21장
33절에서 ‘엘 올람’ 곧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던 아브라함은 이제 ‘여호와이레’ 곧 ‘나타나신 야훼’ 혹은 ‘야훼의 현현’ 혹은
‘야훼께서 준비하심’을 경험하게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어 제단에 눕히고 그의 몸에 칼을 대려한 것은 그가 결코 무식했거나 잔인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벼랑 끝으로 밀리는 순간에서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나홀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는 형제관계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나홀이 아브라함의 ‘동생’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 ‘동생’은
‘형제’로 번역되어야 맞습니다. ‘브라더’(brother)라는 영어 단어가 ‘형제’란 뜻이고, 형인지 동생인지를 구별하지 않듯이, 창세기에서
‘동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크흐’라는 말은 형 동생의 구별이 없는 그냥 ‘형제’란 뜻입니다. ‘형제’란 말이 ‘동생’이란 말로
오역된 것은 아브라함의 이름이 나홀과 하란보다 항상 앞에 나오기 때문이며, 그로인해서 아브라함이 나홀이나 하란보다 연장자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아브라함보다 나홀이 한 세대 더 위이고, 하란은 아브라함보다 두 세대가 위인 형들입니다. 성경에서는
중요 인물의 이름이 형제나 부부들 사이의 이름들 앞에 놓이기 때문에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삭은 이스마엘의 동생이지만 항상 먼저
기록되고 있고(창 25:9; 대상 1:28), 모세와 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형들을 앞지르겠다는 아우들의 반란이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는 비록 동생일지라도 그 이름이 항상 앞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도록 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값진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