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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1-28 16:59
예수부활의 증거(요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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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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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의 증거(요 20:19-31)
[오후 성경공부 내용]
예수님은 삼년 육 개월의 짧은 고난과 배척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A.D.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3시경부터 주일 이른 아침까지 약 40 시간 정도 무덤에서 안식하셨습니다(마 27:57-66; 막 15:38-47; 눅 23:45-56; 요 19:31-42). 그리고 4월 9일 주일아침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마 28:1-8; 막 16:1-8; 눅 24:1-8; 요 20:1). 부활 후 예수님은 40일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예수부활은 기독교가 시작된 출발점이며, 기독교가 가르치는 알맹이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고,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을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부활은 기독교 변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쟁점입니다. 예수부활의 진실성 여부에 따라서 기독교의 진실성 여부가 판가름 나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이 예수부활을 유물이나 문헌연구를 통해서 입증하는 고증학 방식으로 입증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신빙성 있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교회 안에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 정황증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부활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설명되어진다 해도 믿음이 없이는 그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부활의 진실성 여부는 믿음의 문제이지 결코 과학적인 입증의 문제는 아닙니다. 믿음이 있고 없음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듯이, 믿음이 있고 없음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부활의 일차적 증거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부활이 일상생활에서 다반사로 발생된다면, 그것이 과학적 사실은 되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예수부활의 독특성은 사라지고 맙니다. 또한 부활의 기초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독특성도 상실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존재하시면서 범죄자들을 즉시 처벌하신다면, 이 세상에는 종교도 법도 필요 없게 되고, 과학도 학문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먼저 예수부활의 직접증거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의 수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40일간 세상에 계시면서 열 한번이나 사람들에게 보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목격한 사람의 수가 오백 명도 넘습니다.
(2)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이 빈 무덤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은 동굴무덤이었습니다. 입구를 무거운 돌문으로 막고 진흙을 이겨 틈새를 봉한 후에 진흙에 관인을 찍어 당국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열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또 시신을 훔쳐갈 수 없도록 당대 최고였던 로마군인들이 4교대로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인은 떨어져 나갔고, 돌문은 열려 있었으며, 무덤 속에는 시신을 감았던 세마포만 남아 있고, 시신은 무덤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3)예수님은 바위를 뚫어 만든 새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유대인의 동굴무덤은 대개가 성인이 허리를 약간 구부려야 들어 갈 수 있는 130-150㎝ 높이의 입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본실이 있고, 입구를 제외한 본실 삼면의 벽에는 시신을 안치할 수 있도록 깎아 만든 평상들이 있었는데 머리를 두는 쪽은 베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두툼하게 높여 만들곤 했습니다.
(4)무덤의 입구는 큰 돌을 원판으로 깎아서 막았습니다. 입구의 문턱은 돌문을 끼어 넣고 좌우로 굴릴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습니다. 이 때의 홈통은 무덤 입구 쪽을 낮은 쪽으로 해서 약간 경사지게 파고, 그 대신 돌문이 정확하게 입구를 막고 설 수 있도록 낮은 쪽의 턱을 높게 만들었습니다. 입구를 봉할 때는 돌문을 괴고 있던 받침목을 빼내고 밀기만 하면 홈통의 낮은 쪽으로 돌문이 굴러 쉽게 입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돌문을 열고자 할 때는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돌문의 무게는, 미국 조지아 공과대학 교수들이 측량한 바에 따르면, 무려 1.5톤 내지 2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돌문을 홈통에서 경사가 높은 쪽으로 밀어 올리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베자 성경 마가복음 16장 4절에 따르면, “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라는 말씀에 이어서 가로 속에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그곳에 누인 후 장정 20명이 굴릴 수 없는 돌로 무덤을 막았다.”고 부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돌문이 열려진 채 빈 무덤으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5)예수님의 무덤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로마군인 16명이 4명씩 일 개조가 되어 4교대로 지켰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대의 로마 군인들은 천하를 통일한 제국의 군인답게 가장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마 28:2-4)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부활의 정황증거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 정황증거들은 기독교가 지난 이 천년 동안 지켜온 주일예배, 성만찬과 침례, 그리고 변화된 초기 신자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주일예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매우 확실한 정황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매우 엄격하게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늘로 두 번 깁거나 두 글자를 쓰지 않았으며 불을 끄거나 켜지 않을 정도로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던 초대교회가 이 안식일을 무시해 버리고 일요일을 지킨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일가친척과 국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버림당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데는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날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지 않았다면, 주일예배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독교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부활과 같은 사건이 아니고서는 유대인으로써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인이 될 수 없으며, 안식일을 무시하고 주일예배 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순교를 불사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변화된 모습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매우 확실한 정황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과 실의에 빠졌던 제자들에게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온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때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사두개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도 다메석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평생을 복음전도에 힘쓰다가 유대인들로부터 서른아홉 대의 곤장을 다섯 번 이상 맞았고, 돌로 몰매를 맞고 죽었다가 살아 난 적이 있으며, 말년에는 체포되어 네로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대부분의 제자들이 제 각기 다른 나라들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이상의 몇 가지 정황증거들(circumstantial evidences)만 가지고도 예수부활의 역사성을 충분히 입증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입증이 아니라, 믿음이란 것입니다. 아무리 입증을 잘한다 해도 믿음이 없으면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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