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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9-01 07:40
새 시대를 위한 세상의 빛(요 9:12-41)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340  
새 시대를 위한 세상의 빛(요 9:12-41)

[오후 성경공부 내용]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후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여 고친 기적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8장 12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맹인의 눈을 고쳐서 빛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서 빛을 볼 수 있게 된 맹인은 예수님을 “사람”(11절), “선지자”(17절),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33절)과 “주님”(38절)으로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에 관한 말씀은 이미 1장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는 “사람들의 빛”(1:4)인데,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1:5)고 하였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빛을 볼 수 없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시각장애자로서 피아노를 전공한 한 여성의 말에 의하면, 시신경(視神經)이 끊어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정안(正眼)이었지만, 소경이 된 지금은 빛조차 전혀 느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눈이 어두워지면 사물은 고사하고 빛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떠 볼 수 있게 되면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처럼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33절)과 “주님”(38절)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맹인이 눈을 뜬 후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예수님을 “사람”(11절)이라고 부르더니, 그 다음에는 “선지자”(17절), 그 다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33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님”(38절)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삶에서 어두움이 걷히고 광명이 찾아왔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눈을 떴다고 생각했던 자들, 즉 바리새인들은 이 이야기 마지막에서 눈 먼 자들로 지적당하고 맙니다. 이는 39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한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1:12)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3장에서는 “세상의 빛”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밝혀지고 있고,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3:16)고 하였으며,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 하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다른 복음서에 없는 두 개의 신체장애자 치유 기적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귀먹고 어눌한 벙어리였고(막 7:31-37), 다른 사람은 벳새다 장님(막 8:22-26)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장애자를 고치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너희가...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17-21).
제자들은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였고, 귀가 있어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고 듣는 것은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고 듣는 것은 물질과 명예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고 듣는 것 가운데는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받을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누릴 명예와 권세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번민하며 기도하셨는데, 제자들은 높은 지위를 누리는 단꿈을 꾸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그 많은 기적과 권위 있는 말씀을 듣고도 확실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귀먹고 어눌한 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을 때에, 또 소경의 눈이 뜨였을 때에 제자들의 대표자격인 베드로가 비로소 참 진리를 깨닫고 볼 수 있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9장에서도 소경의 눈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고, 정신의 눈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릴 때에 참 빛을 볼 수가 있고, 참 빛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427-347 B.C.)은 「동굴비유」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굴 속에 묶인 채로 그림자가 비취는 벽만 바라보고 수십 년씩 살았던 죄수들은 벽에 비취는 그림자가 실재인줄로 알고 믿었지만, 결박에서 풀려난 다음, 벽에 그림자를 만드는 참 빛을 볼 수 있었고, 그 순간 그 동안 자신이 알고 믿었던 것이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되면 죄의 결박에서 벗어나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장 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고, 36절에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을 38년 동안 앉은뱅이로 고통 받게 하였고, 날 때부터 장성하도록 장님으로 어둠 속에서 헤매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로 봐야 그분으로부터 세상의 빛을 받을 수가 있고, 그분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우리 안에 짙게 내린 어둠의 그늘, 죄악의 그늘을 몰아 낼 수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참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고, 진리 가운데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치유이야기를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치유와 비교해보면, 몇 가지 비슷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이 두 장애인이 모두 안식일 날에 연못에서 고침을 받고 있고, 이 일로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납니다. 또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치유에서는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실로암 연못의 맹인치유에서는 “빛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두 개의 기적이 모두 침례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눈먼 청년이 실로암의 물을 통해 그의 시력을 되찾았듯이 침례를 받은 사람은 물과 성령의 씻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참 빛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로암 물에 눈을 씻음으로 시력을 되찾은 맹인은 침례에 의해서 빛을 찾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 엘리사를 찾아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아만이 문둥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것은 그가 싣고 온 많은 재물이나 그가 누린 명예나 권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고침을 받은 것은 엘리사의 말을 믿고 요단강에 내려가 물로 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우리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고 침례를 받아 영혼의 눈이 뜨이고 병이 고쳐진 줄 믿습니다.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I was blind but now I see!)(25절)으로 인해 우리는 빛과 생명의 일을 해야 합니다. 모세는 흑암재앙(출 10:21-29)을 베풀어 온 땅을 어둡게 만듦으로써 눈을 뜨고도 볼 수 없게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눈을 고쳐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제자”(28절)라 자랑하는 이들의 삶은 빛을 흑암 되게 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을 주로 믿는 자들의(38절) 삶은 어둠을 빛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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