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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10-11 20:57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요 12:12-1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997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요 12:12-19)

[오후 성경공부 내용]
예수님의 지상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마지막 한 주간은 금요일 베다니에 도착하신(요 11:55-12:11; 마 26:6-13; 막 14:3-9) 때부터 시작됩니다. 도착당일 식사 중에 향유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은 마리아의 헌신을 일주일 후에 있을 자신의 죽음을 예비한 일로 받으신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토요일만큼은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조용히 안식을 취하셨습니다. 이 안식은 또한 지난날의 고단한 순례와 다음날 있을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이뤄진 안식이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 날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모두가 설레는 날이었고 긴장감이 도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모두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3년 6개월여의 지난날의 고생을 끝내고 명예와 권세와 재물을 얻어 누릴 영광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한 때문이요,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민중과 권력자들에게는 “이번 명절에는 과연 예수가 메시아임을 밝히 드려낼 것인가?”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광복절이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살아가는 유대인들로서는 유월절 명절엔 왠지 모를 흥분과 기대에 휩싸이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살짝 건들기만 해도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명절은 민중봉기의 가능성이 연중 가장 높은 시기였고, 로마총독과 대제사장과 같은 권력자들에게는 결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숨 가쁜 한 주간으로 기억되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일 것이란 소문은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유월절 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문제를 일으키곤 했던 예수님의 관행으로 볼 때, 필시 이번 유월절에도 나타나실 것이란 기대와 흥분과 소문들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전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입성하신다는 소문이 퍼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왔을 것입니다. 군중심리도 크게 한몫했을 테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융단대신 겉옷을 벗어 오시는 길에 깔며 목청껏 ‘호산나’와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면서 앞에서 달리고 뒤에서 따르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열광했습니다. 이 분위기는 빨리 가라앉히지 않으면 쉽게 민중봉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예수님은 물론이요 권력자들도 크게 우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들뜬 분위기나 군중심리에 결코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도 신중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옥함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었던 것이나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얼마나 그들이 하나님과 역사 앞에 신중하게 행동했었나를 말해 주는 증거들입니다.
민중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마음은 오히려 괴롭고 무거웠습니다. 눈앞의 상황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었고, 인간들이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자기욕심을 앞세우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만큼의 이익이 없을 때는 언제라도 배신하고 돌아설 것이고, 희생양으로 처형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부여한 자신의 독특한 사명에 대해서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왔고, 민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권력자들이 무엇을 논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대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느냐 죽느냐의 사생결단을 내려야할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결정한다면, 민중이 지금은 기대와 흥분 속에 일시적으로 환호의 물결을 이루지만, 흥분이 식는 날엔 성난 파도로 돌변하여 대제사장의 무리와 한패가 되어 자기를 집어삼킬 것과 사랑하는 제자들조차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 그리고 자신을 팔아넘길 자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인류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놓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예수님이지만 막상 죽음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오자 이를 피하고 싶은 욕망이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고단함을 과연 누가 알아주었는가? 예수님의 고뇌를 조금치라도 눈치 챈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헌신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꼭 이루리라고 결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옥합이 깨질 때 향기가 발산되었듯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는 사실이 예수님의 마음에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되기를 바라는 제자들의 기대와 민중의 요구를 뿌리치고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는 각오로 봉기군을 이끌기 위해 백마를 타고 칼을 차고 방패를 손에 쥐는 대신에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9-44; 요 12:12-19).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모두가 겸손의 나귀를 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분쟁과 소요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겸손하며 사랑하며 섬겨야할 평화의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나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시 118:25).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출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렘 23:5, 30:9, 33:15-18, 겔 34:23, 37:24).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3장 31절과 마태복음 1장 1,6절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나신 것이나 베들레헴의 별의 출현도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입증하는 표시들인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베들레헴의 별은 다윗의 별 곧 메시아를 지칭하는 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출생 시에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아란 분명한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메시아사상은 세상적인 것, 곧 이스라엘국가를 로마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이스라엘나라를 세계통치 국가로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중 특히 열심당원들은 오병이어 표적 직후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을 삼으려고 했다가 실패한 이후로(6:15) 예수님 곁을 떠났던 자들이지만(6:66), 예수님의 수도입성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진심을 알게 된 후에 무너졌고, 분노로 돌변하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는 그들의 기대를 표현한 환호성이었고,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9:15)는 그들의 실망과 분노를 표현한 외침이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왜 어린 나귀를 타야했는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의 꿈이 물거품이고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말씀하신대로 다시 사셨고, 수차례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로 강한 성령체험이 있었고, 성령님의 깨우침으로 서서히 예수님의 진심이 파악되었습니다(14-16절).
모두가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예수님,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예수님의 행동은 그분이 왜 어린 나귀를 선택했는지를 오늘도 우리에게 말없이 교훈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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