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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7-02 15:54
새 시대를 위한 복음적 사고(思考)(요 5:1-18)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598  
새 시대를 위한 복음적 사고(思考)(요 5:1-18)

예수님의 공생애 첫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율법적인 생각을 복음적인 생각으로 바꾸란 말입니다. 닫힘과 죽임의 세계관, 종교관, 가치관을 살림과 열림의 것으로 바꾸란 말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율법시대가 교회시대로 바뀐 새 천년시대를 말하고 “가까이 왔다”는 주후 30년 오순절 날에 시작된 교회시대, 은혜시대, 성령시대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어 흑암에 살던 민중을 복음아래서 빛과 생명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구시대의 율법적인 생각과 일, 그리고 새 시대의 복음적인 생각과 일이 크게 대립되고 있는 곳이 요한복음 5장 1-18절에 실린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던 곳이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자비의 집) 연못이었습니다. 거기에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는데, 병 낫기를 바라는 환자들이 그곳에 모여서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고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병에 걸린 지 38년이나 된 환자가 누워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띤 것을 보면, 그의 형편이 매우 나빴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은 40이란 숫자를 죽음 또는 고난으로 봅니다. 병에 걸린 지 38년이 되었단 말은 이 환자의 상태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예, 고침 받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물이 움직일 때 저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로 고침을 받고 건강을 되찾아 자기 짐을 챙겨들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유대인들이 스스로 정한 율법에는 안식일에 짐을 운반하거나 900미터 이상 걷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짐을 메고 길을 떠나는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중대한 범죄였습니다(10절).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도 유대인의 안식일 법을 어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어기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길 뿐 아니라,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18절).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생각과 예수님의 복음적인 생각의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구시대의 산물인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생각에 도전장을 내고, 새 시대에 필요한 복음적인 생각을 유도(誘導)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봅니다.
율법은 마치 베데스다 연못과 그 주위에 있던 다섯 개의 행각(오경을 상징)과 같습니다. 이들 행각에는 38년 된 병자를 비롯해서 온갖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들로 가득했습니다. 고침 받아야 할 환자는 많았지만, 어쩌다 한번 끓어오르는 물에 애써 달려가 봤자 고침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먼저 간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까, 고침 받아야할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씩 기다려도 고침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율법은 사람에게 죄의식과 징계에 대한 심적 부담만 주었지 그들을 고치거나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가진 한계였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재앙 가운데 사람의 몸에 독종이 나게 한 표적(출 9:8-12)이 있었습니다. 이 표적은 모세가 사람의 몸에 고통을 준 최초의 재앙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38년 된 병자의 고침이 예수님께서 개인의 고통을 고쳐준 첫 번째 표적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경우 정상인의 육신을 병들게 한 반면, 예수님의 경우 병든 육신을 고쳤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가 병을 걸리게 했거나 예수님이 병을 고친 데에는 인간의 생각과 별무 관계일 것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해주는 말이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9절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위급한 일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겨가면서 또 유대인의 미움을 받아가면서까지 또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을 각오하고서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이 가진 개방성입니다.
본문에서 38년 된 병자는 “당신이 나를 돌봐줘야 한다.”는 의존단계를 벗지 못하였습니다. 38년 동안 생각의 전환 없이 살아왔습니다. 남이 도와주기만을 바라고 38년을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방법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율법적인 생각의 희생자였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12절)고 따져 물을 수밖에 없었던 한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이나 전통에서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시대의 고정관념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식과 껍데기만 붙잡고 살아온 그들은 실로 이 환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질병의 고통에 살도록 묶어둔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보다 순응하고 안주하려는 태도가 더 지배적입니다. 자기를 가두고 있는 낡은 틀과 형식에서 벗어나야 하는데도 오히려 낡은 모습, 낡은 생각, 낡은 관습에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낡은 율법의 형식주의를 타파하시고, 인간에게 참된 자유와 새 생명을 주는 새 시대를 이 땅에 펼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생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복음적인 생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적 생각은 믿음과 창조와 하면 된다와 할 수 있다와 살림과 열림의 생각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혁신적인 생각을 하셨습니다(8절). 잘못을 고치는 개혁정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지 말라’보다는 ‘~하라’의 생각을 하셨습니다. 부정적이고 외적인 율법의 형식에 치우치지 아니하시고, 긍정적이고 내적인 율법의 정신을 따라 생각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나 전통을 지켜가기 보다는 새로운 습관을 키우고 새로운 전통을 새우려고 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살림’의 생각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기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따져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마 12:11-12). 그 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되물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병 낫기를 원하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예, 고침 받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로 고침을 받고 건강을 되찾아 자기 짐을 챙겨들고 걸어갔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예수님의 복음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살림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정관념의 탈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믿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조적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열림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곳에 새 시대가 열립니다. 믿음과 새 생명의 역사가 열립니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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