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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3-27 08:01
창세기 018: 무지개 언약과 노아의 허물(창 9:1-28)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487  
창세기 018: 무지개 언약과 노아의 허물(창 9:1-28)

창세기 9장은 세 가지 내용으로 나눠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노아의 법’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무지개 언약’, 그리고 셋째는 노아의 허물과 자녀들의 처신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노아의 법’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자기 영토에 살면서도 이방인들의 지배를 몸으로 겪어야했던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배타적이었고, 선교에도 소극적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개종자들에게 엄격한 율법준수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이방인들과 뒤엉켜 살아야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레코로만 세계에 동화되어 살면서 이방인들을 유대교에 입교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유대교에 입교한 ‘하나님 경외자들’의 책무를 가볍게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비유대인 ‘하나님 경외자들’을 ‘노아의 자녀들’(B'nai Noah)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아담과 노아도 포함이 됩니다. 이들 ‘노아의 자녀들’을 ‘문의 개종자’라 부르는데, 유대인의 집안에 든 손님 곧 ‘문안의 객’이란 뜻입니다. 이들 문안의 객들에게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613개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대신에 ‘노아의 법’으로 불리는 일곱 개의 법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고 한 창세기 9장 4절의 말씀에서 보듯이 이들 일곱 개의 법은 최초의 ‘하나님 경외자’였던 아담과 노아에게 주어졌던 것이며, 모든 비유대인 하나님 경외자들 곧 문의 개종자들에게 주어진 법으로 유대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개의 노아의 법은,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둘째, 우상들을 숭배하지 말라; 셋째, 간음하지 말라; 넷째, 살인하지 말라; 다섯째, 도둑질하지 말라; 여섯째, 동물의 살코기를 산채로 먹지 말라; 그리고 일곱째, 사법체계를 제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방인 교회의 대표인 바울과 바나바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들인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총회를 갖는데,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방인 교회의 성도들에게 유대인들이 ‘문의 개종자’들에게 내렸던 노아의 법을 동일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네 가지로 압축돼서 요구되었는데요,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2천년 전 유대인들이 비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신분을 노아의 법을 지키는 노아의 자녀들 곧 ‘하나님 경외자’ 혹은 ‘문의 개종자’의 맥락에서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에 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현대인들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산다고 합니다. 그만큼 오늘의 시대는 변화가 무쌍해서 앞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황해하고 불안해하며 소망을 갖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언약의 무지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미래, 그것도 영원한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고 있고, 하나님과 약정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선수금조로, 인감으로 주셨고, 우리 가운데 내주동거 하시면서 의사의 일, 변호사의 일, 교사의 일, 안내자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의심으로부터 확증을, 모든 죄로부터 용서를, 모든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이러한 모든 것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무지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지개처럼 찬란한 미래구원을 약속받고 있기 때문에 당황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경험한 홍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무지개 언약을 받기까지는 떨쳐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작은 비구름에도 심한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갱도에 갇혔다가 살아났거나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성수대교의 붕괴와 같은 붕괴로 인해서 건물더미에 갇혔거나 구사일생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장기적인 정신과적 치료입니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홍수로 인해서 그 많던 사람들이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졌고, 그들이 애써 일궈 온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 엄청난 재난을 겪고 구사일생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던 것이 정신과적 치료였을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보다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신 것은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엄청난 쇼크로 인한 내상(trauma)으로부터 깨끗하게 벗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뛰어난 처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11-17절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분명히 해두셨습니다. 첫째는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이고요, 둘째는 그 증거로써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는데,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이 모든 생물을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지개는 홍수로 인해서 지울 수 없는 큰 쇼크를 받았던 인간들에게 주신 사랑의 묘약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늘에 뭉친 구름처럼 세상으로부터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에 휩싸이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무지갯빛 언약을 기억해내셔야 합니다.
무지개 언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의 예표가 됩니다. 무지개 언약은 성도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불변함을 더욱 밝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맹세로써 보증해 주셨다”고 히브리서 6장 17절에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과 맺은 “영원한 기업의 약속”에 대한 예표적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은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는데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 곧 영생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창세기 9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을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징표로써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이것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보증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 무지개 언약이 보다 구체화되고 확실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언약의 징표인 무지개가 대홍수를 막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 인류의 멸망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시대이후로 무지개는 인류를 사랑하시고 권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을 기억나게 한 것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이 영생과 구원사건으로 구체화되었고, 또 그것이 마지막 날에 궁극적으로 다시 나타날 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증표입니다.
노아와의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성도와의 구원을 확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과 보호에 대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고,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노아의 허물과 자녀들의 처신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는 인간의 허물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나옵니다. 하나는 허물을 들춰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남의 허물을 들추는 검찰과 경찰의 일은 ‘사랑’이란 입장에서 다뤄질 일이 아닙니다. 평화주의자들 가운데는 국가가 사랑을 실천하는 기관으로 잘못 오해하는 일이 있는데, 국가는 사랑보다는 정의를 실천하는 기관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를 정의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잘못 오해하는 일이 있는데, 교회는 정의보다는 사랑을 실천하는 기관입니다. 정의를 실천해야할 국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치리하게 되면, 그 나라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해야할 교회가 ‘정의’란 이름으로 성도들을 치리하게 되면, 도덕과 양심의 법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법까지 적용해야하는 교회로써는 죄인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정은 작은 국가일수도 있고, 작은 교회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와 사랑이 가장 절묘하게 균형을 이뤄야할 곳이 가정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국가기관과 달라서 사랑이 정의보다 우세한 곳입니다. 가정에서의 정의는 나무의 가지치기와 같은 것이고, 사랑은 그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양분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말씀에 보면, 노아의 허물, 곧 집안 가장의 허물 혹은 담임목사의 허물에 대해서, 그 허물을 들춰낸 ‘함’이란 구성원이 있었는가 하면, 그 허물을 덮는 ‘셈’과 ‘야벳’이란 구성원이 나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허물을 들춰낸 ‘함’은 저주를 받았고, 허물을 덮었던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함’이 취한 행동은 강력한 가부장의 권위와 명예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족장시대의 가부장은 한 집안의 최고 통솔자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역할까지 담당했습니다. ‘함’이 취한 행동은 그런 위치에 있는 아버지의 권위와 명예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함’의 아버지에 대한 도전이 정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들춰내는 것이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에는 항상 교만이란 함정에 빠지기가 쉽고, 자칫 하나님께 도전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되고 말 수도 있습니다. ‘함’이 취한 행동이 단순히 아버지의 허물을 들춰낸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기보다는 그의 도전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고만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세운 종들은 겨룸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입니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면, 노아의 허물을 심판할 분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팔아야했겠지만,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불행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권위를 넘보고 도전했던 미리암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들도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행위로 간주되어 저주를 면치 못했습니다. ‘함’의 실수가 여기에 머물게 되었으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의 저주는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준엄한 심판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함’에 비해서 ‘셈’과 ‘야벳’은 겸손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남의 허물을 덮어줄 아는 넓은 아량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허물을 잘 들추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우상숭배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자기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 자기 외에 존경받아야할 자가 없게 되고, 자기 판단보다 더 나은 판단이 없게 되고, 자기 아이디어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게 되고,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무시하는 처사는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의 허물에 대해서 취할 태도는 ‘함’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셈’과 ‘야벳’과 같은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이 불효자이듯이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을 거역하는 일 역시 위험한 처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근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노아처럼 허물을 들어내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것이고, 그 허물을 덮는 사랑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