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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3-27 08:00
창세기 017: 원죄란 무엇인가?(창 8:21-22)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559  
창세기 017: 원죄란 무엇인가?(창 8:21-22)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더라도 ‘원죄’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죄’라는 말은 신학용어일 뿐 아니라, 문학작품에도 잘 쓰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원죄란 과연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또 원죄가 끼친 영향은 무엇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업적과 원죄와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런 몇 가지 물음을 가지고 원죄에 대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원죄가 과연 있는지, 또 그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또 그것이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창세기 8장 21-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면에서 원죄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타고난 죄성 곧 죄지을 성질과 타락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자연법칙과 자연생태계순환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것들조차 타락하였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자연법칙 또는 자연생태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 곧 죽음입니다. 살아있고 질서 있던 것이 죽음이란 무질서를 향해서 극대화되는 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이것을 엔트로피 또는 제2열역학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이 법칙은 생명에서 사망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살림에서 죽임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건강에서 병듦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싱싱함에서 시듦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새것에서 헌것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사랑에서 미움에로 가는 법칙입니다. 평화에서 전쟁으로 가는 법칙입니다.
이 나쁜 성질의 법칙, 또는 타락성이 원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는 죽음이란 무질서를 향해서 내달리는 성질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본능이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도 통제가 어려운 타락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본능이 원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아담 타락 이전에도 본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니까, 타락성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타락한 죽음의 법칙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이 죽음의 법칙이 에덴동산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이전에는 지금의 자연법칙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아담의 범죄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죽음의 법칙인 자연법칙 또는 자연생태계순환법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법칙은 인간의 본능을 포함해서 아담의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고, 죄의 결과인 죽음이 자연법칙과 본능의 지배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죄의 삯을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죽고, 동식물이 죽고, 삼라만상이 죽는 것은 궁극적으로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죄를 가진 성인이 죽는 것은 자범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갓난아이가 죽거나 동식물이 죽는 것은 자범죄를 적용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으로 아담의 원죄 때문에 죽는 것이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있습니다. 그리고 원죄의 영향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인데, 그 가운데서도 피조물에게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원죄는 유전이 되는 것일까요? 죽음이 죄와 무관하게 자연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도 유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 로마서 4장 15절과 5장 13절에서 율법이 없이는 범함도 없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율법이 없이는 죄가 성립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아담 때부터 모세가 율법을 전할 때까지 법 없이 살았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죽음이 왕노릇 하였습니다. 성서는 죽음이 죄의 삯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법이 없었는데도 사람이 죽고 자연생태계가 죽음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 부여되기 이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죄에는 원죄도 포함이 됩니다. 죄의 삯인 죽음이 율법이 없었던 아담 때부터 모세 때까지도 왕노릇 하였기 때문이고, 아담의 범죄처럼 하나님의 특정한 명령을 위반하지 않고서도 사람들은 물론이고 죄와 무관한 동식물까지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에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로 그들의 죄악성이 드러났고(1:18-32), 도덕주의자들은 인간본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의 계시 즉 양심의 법에 의해서 그들의 죄악성이 드러났다(2:1-16)고 했듯이, 성문법인 모세의 율법이 부여되기 전에도 인간행위를 심판할 어떤 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법이 없었다면, 죄도 없었을 것이고, 죽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망은 성문법이 없던 때의 사람들에게조차도 죄가 실재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 죄를 죄가 되게 할 어떤 법이 실재했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이 법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계시를 이해할 만한 인간 이성의 법이나, 인간본성의 양심의 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들, 곧 이성의 법이나 양심의 법의 실재와 성문법은 유전죄 곧 원죄를 입증해 주지를 못합니다. 법이 있으면, 유한한 인간들에 의해서 법을 어기는 행위가 있게 되고, 그 대가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식이 되어지기 때문에 원죄가 성립될 수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죄가 존재할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부분이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자기 죄가 없는 갓난아이가 죽는 것과 동식물이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 없는 갓난아이들의 죽음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육체적인 죽음이 원죄의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면(롬 6:23), 모든 육체의 사망은 정녕코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육체의 죽음이 단순한 자연의 현상에 지나지 않고, 아담의 불순종에 기인한다면, 그것은 결국 원죄가 실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죽음을 죄의 대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업적이 원죄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주제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유아들이 자기 죄가 없이 원죄만으로 불행한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자기 죄가 있는 성인들과 동일하게, 곧 자범죄가 있는 성인들과 자범죄가 없는 유아들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유아들의 영혼의 죽음까지 인정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자기 죄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끼리의 관계가 전혀 없는 유아에게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원수 됨 즉 영혼의 죽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말했을 때, 범죄를 모르는 유아들의 영혼의 죽음도 포함되는가라는 것입니다. 유아들의 영혼의 죽음이 아담의 원죄의 결과에 포함이 되는가의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행위 곧 그분의 구원사역에서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물어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죄와 죄의 결과가 유전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순종의 결과는 유전될 수 없는가고 말입니다.
로마서 5장 15-21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는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와 비교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첫째, 범죄와 은사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더욱 넘쳤고,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심판은 정죄를 가져왔지만, 많은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은사는 의롭다함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망과 생명은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왕노릇 하였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그 한 사람을 인하여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더욱 왕노릇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율법과 은혜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지만, 은혜는 죄가 더한 곳에 더욱 넘치기 때문이며, 죄는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하였지만,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아담의 범죄로 유전죄가 적용되고 모든 사람이 죽는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더욱 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선물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은 아담의 원죄의 결과보다 더욱 넘치고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며, 더 원대하고, 그 미치는 범위도 넓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원죄를 말살하여 그 범위가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아담의 한 범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가되어 유전죄가 인정된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순종의 행위 또한 모든 인간에게 전가되어 유전죄를 말살할 뿐만 아니라, 그 은혜는 아담의 범죄의 결과보다도 월등하게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상실한 것을 제 이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알게 모르게 찾았고 또 찾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원죄의 결과를 말살하셨다면, 왜 육체의 죽음이 여전히 인간들과 생태계 속에서 계속되는가라는 것입니다. 영적 죽음인 하나님과의 단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해결이 됩니다. 또 유아들의 유전죄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로 말살됨으로써 자기 죄가 있기까지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를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유전죄도 없고 자기 죄도 없는 성도들과 동식물들은 왜 여전히 죽는가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죽음을 자연의 순리로 때에 따라서는 아주 정상적인 상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죽음을 아주 비정상적인 상태이며, 죄의 삯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죽음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라고 고린도전서 15장 26절에서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구원받은 성도들과 자기 죄가 없는 유아들, 그리고 자연생태계의 죽음은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해결이 다 되었으나 그것이 성취되는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일어날 성도들의 부활과 대자연의 회복의 때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을 이룬 성도들에게, 비록 성도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아담의 원죄로 인해서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살고는 있지만, 모든 구원이 이뤄질 재림의 때까지는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선물로 주시고, 최후승리의 때까지 구원의 사실을 보증하시고, 그 때에 주어질 축복들을 맛보게 하시며,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미 우리 성도들은 죽음을 이긴 승리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이 이뤄지는 때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는 때이기 때문에 그 때를 고대하며 끝까지 참고 믿음을 지키는 승리자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