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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3-20 08:50
창세기 014: 물과 구원의 관계(창 7:1-2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583  
창세기 014: 물과 구원의 관계(창 7:1-24)

성서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고, 죽음의 세계나 지하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물 바깥 곧 해변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는 물론이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조차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있고, 물 바깥 해변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물에서 구원받은 사건들이 적지 않고 기독교 침례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고린도전서 10장 1-4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이집트를 죄악이 가득한 세상으로, 홍해를 죽음의 바다로, 홍해를 건넌 것을 침례 받음으로, 광야를 교회로, 광야에서 먹고 마신 만나와 반석의 물을 주의 만찬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은 죽음의 강이요, 가나안복지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약성경의 해석방법을 신학에서는 모형론 혹은 유형론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침례를 행할 때 물에 들어가 물 속에 잠기게 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이 죄 씻음을 의미하고,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며,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것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라고 말하며 침례의 모형으로 설명하였고, 로마서 6장 3-4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는데, 침례식에서의 물이 죽음 또는 죽음의 세계를 상징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물에서 건짐을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죽음의 강 요단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으며, 요나도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수차례 건짐을 받고 있고, 계시록 15장 2-4절에 언급된 하늘 보좌 앞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가에 선 성도들도 홍해 또는 소돔과 고모라를 삼켰던 불바다 또는 박해로 상징되는 죽음의 바다를 건넌 후에 바닷가에 서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모세의 노래’ 또는 ‘어린양의 노래’였습니다(출 15장 참고). 또 계시록 13장을 보면,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탄압하는 적그리스도가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역시 바다는 죽음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신화에서도 죽음의 세계인 하데스에 이르는 길을 아케론(Acheron)강으로 표현하고 있고, 지하세계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개의 강들을 건너야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신화에는 회한의 흐름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참혹한 비통의 강인 아케론 강, 깊고 검은 시름의 강인 코퀴토스 강, 용솟음치는 불길의 폭포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불의 강인 플레게톤 강, 이승의 일은 까맣게 잊고 저승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망각의 강인 레테 강, 혼령들이 이승의 추억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레테 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레테 강은 종종 추억의 해독제라고도 불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오 강으로 알려진 스튁스 강이 있습니다. 이들 강들은 한결같이 인간을 죽음의 세계인 지하세계 곧 하데스로 인도하는 강들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 땅에 이르러 하데스의 궁전에 들어가자면 이들 강들을 모두 건너야 합니다. 하데스 곧 지하의 세계 또는 죽음의 세계는 대장장이의 망치받이 모루를 떨어뜨리면 아흐레 밤 아흐레 낮 동안 떨어져야 이를 수 있을 만큼 땅 속 아주 깊은 곳에 있다고 합니다.
이 강들 중에서 비통의 강인 아케론 강은 지상에서 저승으로 흘러들어갔다가 다시 흘러나오는 강으로써 사람이 하데스의 오른팔이자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죽음이란 뜻)의 손아귀에 붙들리면 이 아케론 강을 건너야 하는데, 일찍이 헤라클레스 이외에는 타나토스의 손아귀 힘을 꺽은 영웅이 없었다고 합니다. 헤라클레스는 타나토스의 멱살을 잡고 타나토스를 혼쭐을 내줬다고 하니까, 헤라클레스는 죽음도 이긴 영웅이었을 뿐 아니라, 죽음의 세계인 하데스에 들어갔다가 하데스의 궁전을 지키고 있는 얼굴이 세 개인 뱀 대가리 혀를 가진 무시한 케르베로스를 무찌를 뿐 아니라 ,죽음을 이긴 부활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찌됐든 사람이 죽으면 비통의 강인 아케론 강을 가장 먼저 건너야 하는데, 이 강에는 카론이라는 뱃사공 영감이 있습니다. 이 영감은 바닥이 없는 소가죽 배로 혼령들을 강 건너 쪽, 즉 피안으로 실어다 줍니다. 그런데 이 소가죽 배를 얻어 타려면 적어도 엽전 한 닢이라도 내지 않으면 절대로 이 강을 건널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의 입에다 꼭 엽전 한 닢을 넣는다고 하는군요.
아케론 강을 건너면 그 갈래인 코퀴토스 강, 즉 시름의 강이 나오고, 이 시름의 강을 건너면 플레게톤 강, 즉 불의 강이 나오고, 이 불의 강을 건너면, 레테 강, 즉 망각의 강이 나옵니다. 이 망각의 강을 건너면 벌판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낙원의 들판인 엘뤼시온(Elusion)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무한 지옥인 타르타로스(Tartaros)가 나옵니다. 타르타로스에는 많은 죄인들이 벌을 받고 있는데, 그 중 탄탈로스는 물 속에 몸을 잠그고 있는데도 영원히 갈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탄탈로스가 마시려고 입을 대면 물이 달아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익시온은 영원히 도는 불바퀴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티튀오스는 독수리의 부리에 살을 파 먹히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고, 다나오스의 딸들은 밑 빠진 독에다 영원토록 물을 길어다 부어야 하며, 시쉬포스는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는데, 바위는 산꼭대기에만 이르면 다시 굴러 내려오기 때문에 시쉬포스는 영원토록 그 바위와 씨름해야합니다. 죄지은 이들의 이런 종류의 고통들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타르타로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화이기는 하지만, 타르타로스(음부 곧 지옥)는 사람이 갈 곳이 못되는 아주 무서운 곳이라는 점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물은 흑암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반대로 해변은 빛과 구원을, 바꿔서 말씀드리면, 해변은 흑암과 죽음의 터널을 벗어나 부활한 자들이 밝고 안전한 곳에 도달한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상징되는 물은 빛과 환희의 세계인 구원의 해변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이 어둠의 터널이요 흑암과 죽음의 바다라면, 그것은 새 생명을 위한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빛과 환희의 세계에 도달한 것과 같고, 태아가 출산됨으로 어둡고 출렁이는 파도의 세계를 벗어나 빛의 세계로 나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부활은 요나가 어둡고 무덤 속 같은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와 빛의 세계 해변에 이른 것과 같고, 칠흑처럼 캄캄한 밤에 폭풍을 만나 죽음에 직면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동터오는 미명에 갈릴리 해변에 다다른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넓은 곳이 10킬로미터나 되는 큰 호수입니다. 북서쪽에는 레바논 산맥과 그 산맥을 마주보고 서있는 높은 산 헬몬이 자리 잡고 있어서 강우량이 많은데다가 갈릴리 호수가 해면보다 210미터나 낮은 곳에 있어서 호수로 흘러드는 물의 양이 많고, 또 이들 양대 산맥에서 형성된 거센 돌풍이 계곡을 타고 내려와 호수 위를 지날 때면 작은 배들을 파선시킬 수 있는 큰 파도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가 놓인 특이한 지형 때문에 이런 돌풍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이용해서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자주 이동을 했기 때문에 이런 돌풍을 종종 만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런 폭풍 중에서 물위를 걸어와 목숨을 건져준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을 것이고, 이런 특이한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여러 가지 신학적인 깨달음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을 바다를 항해하는 작은 배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가정 혹은 우리 교회를 바다를 항해하는 배라고 가정해 봅시다. 때때로 거친 풍랑과 파도를 만나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맬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혀 어떤 방법이 없을 때 말입니다. 그 때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사정을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억울함을 다 듣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현장에 직접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찾아와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뢰할 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고, 병들어 죽어가던 왕의 신하의 아들이 고침을 받았고, 병들어 38년간 일어서지 못했던 병자가 자리를 들고일어나 걷게 되었고,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수천 수 만개의 보리떡과 생선이 되었고, 성난 폭풍과 파도가 변하여 고요하고 잔잔하여졌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에서 볼 때, 노아의 홍수는 불신자들이 겪게 될 지옥을 상징하기도 하고, 물 자체는 죽음이나 죽음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에 바닷가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계시록 15장 2-4절의 말씀처럼, 붉은 유리바다 곧 불과 유황과 연기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의 처지와 같은 지옥의 바닷가에 서서 구원을 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물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