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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3-20 08:46
창세기011: 땅에 속한 자손과 하늘에 속한 자손(창 4:1-2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899  
창세기011: 땅에 속한 자손과 하늘에 속한 자손(창 4:1-26)

창세기 4장은 3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부는 1-15절까지로 가인의 악행과 불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2부는 가인의 가계 곧 가인과 그의 7대손까지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들은 ‘땅에 속한 자손’들로써 인간들의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제3부는 셋의 가계 곧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들은 ‘하늘에 속한 자손’들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먼저 가인의 가계에서 드러난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가인의 가계에 불행하게도 살인자의 피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절의 가인의 살인이 23절의 라멕의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라멕의 살인행위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에 눈이 밝아진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죄악에 눈이 떴다는 뜻이고, 물 컵에 떨어진 먹물이 급속히 퍼지듯이, 일단 죄악에 눈을 뜬 이상 급속히 진행되었고, 인간의 역사 또는 땅에 속한 자들의 역사가 극단적인 생명파괴와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역의 역사로 발전되어간 것입니다.
둘째, 가인의 가계에 살인자의 피가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땅에 속한 인간의 문명은 그로 인해서 오히려 진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는 기술을 발전시켰고(17절), 야발이 목축기술을 발전시켰으며(20절), 유발이 음악을(21절), 두발가인은 금속가공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22절). 그러나 인간문명과 기술의 발전은 불행하게도 라멕의 ‘칼의 노래’ 곧 그의 살인행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을 대항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로 악용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벨을 대신한 셋의 가계에서 드러난 특징들을 무엇일까요?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주신 셋으로부터 시작하여 에노스에 이르는 셋의 가계는 ‘하늘에 속한 자손’ 곧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셋의 가계가 가인의 가계와 다른 점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인의 가계와는 달리 셋의 후손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26절)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가계가 ‘땅에 속한 자손들’이 이룬 세속적인 발전사라고 한다면, 셋의 가계는 ‘하늘에 속한 자손’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룬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발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이 셋의 가계와 혈통, 곧 약속의 자녀들의 혈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고, 지금도 우리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성도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켜가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후 100년경에 쓰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일명 「디다케」란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인데, 두 길의 차이가 큽니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당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당신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오. 또 무슨 일이든지 당신에게 닥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거든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마시오. . . . 죽음의 길은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길은) 악하고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살인, 간음, 정욕, 음행, 도둑질, 우상숭배, 마술, 요술, 강탈, 위증, 위선, 표리부동, 교활, 오만, 악행, 거만, 욕심, 음담패설, 질투, 불손, 교만, 자만, 두려워하지 않음입니다.
이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인의 가계에 속하여 땅의 지배원리, 곧 타락한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따라 살면서 스스로 멸망의 길, 곧 넓은 길을 걷는 부류가 있고, 셋의 가계에 속하여 하늘의 지배원리, 곧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법칙에 따라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소망 중에 인내하면서 구원의 길, 곧 좁은 길을 걷는 부류가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성도들이 걸어야할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올바른 예배와 거짓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드린 예배에서 드러난 특징들은 무엇일까요?
첫째, 가인이 드린 예배는 자연계시에 따라 드린 타종교들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계시라 함은 빛을 받았으나 별빛이나 달빛처럼 희미한 빛을 말합니다. 자연계시는 우주만물에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 또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데요, 특별한 설명 없이 자연만물을 보고 각자가 나름대로 신의 존재를 인식하거나 예배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특히 자연계시의 한계점이나 제한성에 대해서 로마서 1장 19-32절은 잘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둘째, 아벨의 예배는 특별계시에 따라 드린 기독교예배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계시라 함은 태양빛과 같이 밝고 분명한 계시를 말하는 것으로써 자연계시로는 알 수 없는 깊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와 경륜과 같은 것들을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알게 되거나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로마서 3장 21-31절은 잘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셋째, 예배가 열납되고 못되는 것은 바쳐진 제물이 동물이냐, 곡식이냐에 달려있거나 그 양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바치는 자들의 인격과 정성과 믿음에 달렸습니다. 4장 3-5절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이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삶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아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인물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가인이라고 해서 믿음이 전혀 없었겠습니까마는 아마도 가인은 하나님께 대한 친밀과 열정이 없는 허울뿐인 예배 곧 마지못해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하나님께 대한 친밀과 열정과 책임적인 사랑을 가지고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예배를 드렸던 아벨은 신실한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한편 가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친밀과 열정이 없는 책임감에 마지못해서 드렸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마지못해서 제물을 바쳤다는 증거는 4장 5-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만일에 가인이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지 않으셨다면, 필경 가인은 그 이유를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찾았을 것이고, 깊이 반성하면서 옳은 방식의 예배를 알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지 않았고, 불순한 마음으로 뇌물의 성격으로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가인에게 선을 행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가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말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지 않고, 소망 중에 인내로 하지 아니한 행위는 그것이 비록 하나님께 드린 예배라 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가인이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동생에 대해서도 전혀 사랑이 없었습니다. 동생에게 몰인정했고, 동생을 비교대상이나 경쟁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상징하는 바는 가인으로 대표되는 세속사 또는 타락사 그리고 아벨로 대표되는 신앙사 또는 구원사에 있다고 봅니다. 아벨이 가인으로부터 살해당한 것처럼, 기독교역사는 칼을 가진 세상의 권세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왔고 순교의 피를 흘린 역사입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선에 대한 악의 박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할 것은 아벨의 죽음이 결코 개죽음이 아니라 의로운 순교란 사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벨과 셋 그리고 에노스로 이어지는 ‘하늘에 속한 자손’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요 생명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선민이요 순교자의 길을 걷는 거룩한 하나님의 신부들입니다. 땅에 속한 자손들로부터 언제 어떻게 탄압을 받아 고난을 겪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5절을 다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19)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