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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0 11:15
대중문화의 세계관[골로새서 2장 6-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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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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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화전민과 어부가 서울 어느 초라한 여관에서 만났다. 초면인사 후에 해뜨고 지는 이야기가 나왔다. 산간벽지에 사는 화전민이 말했다. "태양은 동쪽 산봉우리 위로 떠서 서쪽 산봉우리 아래로 지지요." 그때 어부가 말했다. "무식하긴 이 사람아, 태양은 바다 지평선 위에서 떠서 바다 지평선 너머로 진다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관 주인이 한심하다는 듯이 끼여들며 말했다. "여보시오, 어르신네들, 태양은 저 큰 빌딩숲 위로 떠서 커다란 저 건물들 사이로 진다오."
개그 같은 이야기이지만, 먼 옛날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는 이렇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오늘날엔 어떤가? 지구촌이란 말이 일상화된 것만큼 인간들은 엄청난 기계기술문명을 이루었다. 스포츠계를 보라. 체력의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눈물겹지 않는가?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달리고 던지기 위해서 선수들은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업계를 보라. 더 많은 양의 자료를 더 빨리, 더 멀리 보내고 받고 처리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는가?
초고속 광통신시대가 앞으로 10년 안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무척 줄일 수 있게 된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 앉아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고,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서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고, 백화점에 나가지 않고도 집에 앉아서 쇼핑할 수 있게 되고, 은행에 가지 않고서도 입출금을 할 수 있게 된다. 아직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이런 일들은 부분적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모든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어느 정도 줄일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극복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이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의 도움으로 시공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얻을 수는 없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말고도 인간에게는 또 다른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가 있다.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이다. 의학의 발전은 노쇠현상이나 질병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여기가 인간의 한계점이다.
한 여름에 땀흘려 일하는 개미 떼를 살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평면 세계에서 땀흘려 일하는 개미 떼를 한 눈에 내려다보고 관찰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앞에 놓인 일과 지나 온 길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미는 인간처럼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공간 세계에 살고는 있지만, 자신의 앞일과 지나온 과거를 동시에 볼 수 없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시련과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인정하고,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삶의 길이 있고, 또 하나는 인간을 신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삶의 길이 있다. 어느 길을 택하든지 그 길은 그 인간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그에 따른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첫째, 진단과 처방의 차이가 있다. 병든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진단과 올바른 처방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있다. 왜 인간은 존재하는가? 왜 인간은 죽는가?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선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고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우주는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근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의 학문세계이다. 그런데 인간이 발전시킨 학문들은 인간문제에 대한 진단서이지 처방전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죽음의 원인을 말할 수 있어도 그 죽음을 막을 수가 없다. 의사가 내 몸의 이상을 일시적으로 치료 할 수는 있어도 죽음을 막지 못한다. 죽음 앞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인가? "최선을 다했다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장래 준비를 하시지요." 과학자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의 현 배치나 상태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이 우주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어 사실이 되기에는 우주는 시간적으로 너무 멀고, 공간적으로 너무 넓다. 아무도 태초부터 살았던 이가 없고, 그 큰공간을 활보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대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해답을 '우연이다. 숙명이다.'에서 찾는다.
그러나 성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을 말해준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밝혀 준다. 왜 인간이 존재하는지, 왜 인간은 죽는지,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우주는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밝혀 준다.
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동의보감'이다. 인간의 근본문제들에 대한 모든 처방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궁금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서 속에 담아 놓으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문제의 원인과 처방을 알고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은 성서 속에서 찾아야 한다.
둘째, 사망과 생명이란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 불신자에게는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되고, 신자에게는 삶이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된다. 신자의 세계관은 생명과 부활이지만, 불신자의 세계관은 죽음과 절망이다.
먼저 불신자의 세계관을 살펴보겠다. 과학자들은 이 우주가 약 180억 년 전에 엄청난 폭발(big bang)과 함께 갑작스럽게 생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우주는 매우 느리긴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무질서와 큰 혼란의 상태로 죽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건물이 낡아 가고, 사람이 늙어 가며, 산과 해변이 침식되어 가고, 지하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현상과 같이 또 더운물이 찬물에 섞이면 미지근한 물이 되어 다시는 더운물을 되찾을 수 없는 것 같이 태양도 언젠가는 차갑게 식고 별들도 소멸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아무리 건물을 새로 짓고 물을 다시 데운다 할지라도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에너지는 결코 늘지도 줄지도 않을 뿐더러 한번 소모된 에너지는 흩어져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무질서는 계속 증가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무질서가 승리하게 되어 우주는 멸망하게 된다. 이를 과학자들은 '열평형' 혹은 '열사망'(heat death)이라고 말한다. 이 이론은 빅뱅설과 열역학 법칙이 혼합되어서 나온 비관론이다. 이 비관론이 자연스럽게 우연론과 숙명론으로 발전된다.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 제안한 우주팽창론은 우주의 종말을 예고한 열사망을 피하기 위해서 나온 하나의 가설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물질은 초기의 대폭발에 의해서 한꺼번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또는 영원히 계속되는 소폭발에 의해서 초당 약 5만개의 별이 새로 생겨나며, 이들 별들이 은하계를 이루어 팽창으로 생겨난 공백을 메움으로서 은하계의 밀도를 유지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우연이 시작되어 계속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을 만들어 내는 데에 필요한 기본 에너지는 누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니며, 공간이나 시간도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열평형 혹은 열사망으로 예언된 우주의 죽음을 피해 보고자 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많은 과학자들은 창조를 일종의 신비라고 말한다. 물질이 만들어지면 똑 같은 양의 반물질이 함께 만들어지게 되고,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언제나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폭발과 함께 소멸해 버리기 때문에 창조된 물질이 반물질과의 만남을 피하여 살아 남아 있다는 것과 반물질은 사라지고 물질만 남아 있다는 사실은 신비 중의 신비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폭발 이론을 믿는 과학자들 중에도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고 반물질이 없는 상태로 물질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우주에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진화론자들은 생물학적인 질서가 돌연변이와 자연도태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우주의 질서가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서 생겼다고 하지만, 우주를 하나의 사건으로 볼 때, 그것이 어느 정도의 질서를 가지고 탄생될 확률은 마치 원숭이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마구잡이로 건반을 두들겨서 우리가 잘 아는 노래를 연주할 확률보다도 훨씬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사실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 현대과학은 마치 팽팽하게 태엽을 감긴 시계가 얼마 후 태엽이 풀리고 죽는 것같이, 팽팽하게 고무줄이 감기어 하늘을 날던 모형비행기가 줄이 풀리면 땅에 처박히는 것처럼 이 우주는 고도의 질서에서 출발해서 무질서를 향해 가고 있고 결국은 죽게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무질서한 상태에서 점차 고도의 질서로 옮겨간다고 말하는 진화론자의 설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은 우연성에서 우주적인 질서를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연'이란 말은 그들이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언어이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나이를 180억 년으로 보고 태양계의 나이를 45억 년으로 본다. 그리고 이 우주가 완전하게 멸망하려면 앞으로 40억 년 내지 50억 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대에는 이 우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이지만, 결국에는 태양 에너지의 소멸과 함께 혹성들은 블랙홀들에 삼키든지, 우주적인 빙하시대를 맞든지, 그것도 아니면,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크게 수축되면서 불덩이에 휩싸이든지 하여 죽게 된다. 천문과학 서적인 {호라이즌}에서 마이클 시든은 이렇게 말했다. "해도 달도 별도 죽을 것이다. 은하계도 죽을 것이다. 온 우주가 죽을 것이다. 인구를 조절하고 자원을 재 순환시켜도 지구상의 생명엔 끝장날 때가 올 것이다."
이와 같이 무신론자들은 죽음이야말로 정상적인 우주의 상태이며,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이 우주는 우연과 진화에 의해서 발생되었다가 이제 서서히 영원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죽음'은 그들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언어이다. 무신론자들에게 삶은 비정상이며, 우연일 뿐이며, 덧없이 스쳐 가는 찰나적인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과 '우연'은 불신자가 보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언어, 가장 빈번하게 입에 오르내리는 언어는 '생명'이다. 죽음은 비정상이며 침입자이며 강도이다. 우주는 우연에 의해서 발생되지 않았다. 우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만들고 목적을 부여한 피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는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간다. 하나님이 돌보실 영원한 나라를 향해 간다. 비록 우주가 지금은 타락해 있고, 인간은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이 우주는 회복될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다. 죽음은 신자들이 정복할 최후의 원수일 뿐이다. 따라서 신자는 죽음 앞에서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는 것이다(롬 5:17). 그러므로 '영생'과 '생명'은 그리스도인의 사상이오, 세계관이오, 삶의 철학이다.
그러나 불신자의 세계관은 '우연'과 '죽음'이다. 이 두 언어는 불신자의 삶을 온통 지배한다. 불교에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란 말이 있다. 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이다. '우연'과 '죽음'이란 언어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하는가? 그 인간은 언제나 "재수 없다. 운이 없다. 죽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라며 살아 갈 것이다. 인생을 비관적으로 염세적으로 부정적으로 폐쇄적으로 소극적으로 살아 갈 것이다.
신앙은 삶의 방식이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산다. 승리할 것을 기대하며,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살아간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바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만세 전에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우리를 부르시고, 불러주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고, 의롭다하신 우리를 또한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어둠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체험하며, 맛보며, 누리며 살아간다.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을 기대하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며, 낙심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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