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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0 15:11
영성이 깊은 사람[이사야 59장 9-15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631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앞일을 미리 내다보고 판단하는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하다. 사업가는 경제흐름을 읽을 수 있는 사업 안목이 필요하고, 정치인은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정치 안목이 필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인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 필요한데 이를 영성이라고 말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리의식이다. 기업가에게는 기업윤리가 필요하고, 정치인에게는 정치윤리가 필요하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윤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사업가라면 경제흐름을 읽을 수 있는 안목과 기업윤리가 필요하다. 이것을 고루 갖춘 사람이 빌 게이츠라고 생각된다.
올해로 41세인 빌 게이츠는 포브스지가 연속 3년째 미국 최고의 부자로 꼽을 만큼 재산이 20조원에 이르고 있고, 6년째 짓고 있는 저택에 들어간 돈만 해도 320억 원에 달하고 있다.
이런 큰 성공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빌 게이츠는 통찰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수억씩 하는 중대형 컴퓨터만 만들어지던 때에 저가의 소형 컴퓨터가 일반화 될 것을 예상했고, 컴퓨터 사용을 쉽게 해줄 수 있고, 어떤 컴퓨터 회사 제품에 사용해도 문제없이 돌아가는 호환성을 가진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면, 컴퓨터 보급을 확산시킬 뿐 아니라, 자사 제품의 소프트웨어 시장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엄청난 이익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도 자기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소형 컴퓨터 산업에 초석을 마련하고도 소형 탁상용 컴퓨터가 한 때의 유행이라고 생각했던 디지털 이퀴프먼트사의 켄 올슨은 망했고, 우수한 문서편집용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고서도 컴퓨터와의 호환성을 갖춘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생각지 못한 왕 안은 일찍이 이 산업에 눈을 뜬 청년 빌 게이츠에게 성공의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빌 게이츠의 인간됨을 사업가로서의 안목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돈 되는 것이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들의 가치 척도로 보면 돈 번 사람이 성공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써의 성공은 재물이나 명성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자신과 남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할 수 있고, 작은 일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로 국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걸맞게 빌 게이츠는 기업가로서의 윤리를 갖추고 있다. 그의 인간 됨은 자기가 번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에서 빛나 보인다. 그는 "컴퓨터 산업은 단순히 돈벌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10년 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켜 자선사업에만 전념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는 최근에도 1,700억 규모의 기금으로 재단을 설립하는가하면, 몇몇 대학에 기부한 돈만도 6백억 원에 달하고 있다.
기업인의 안목과 윤리를 갖춘 우리 나라 기업인으로는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1895-1971) 박사를 내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한은 1904년 9세 때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으로 헤스팅스 고등학교와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제너럴 일렉트릭사(General Electric Co.)에 회계사로 입사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에 참석한 후, 제너럴 일렉트릭사를 그만두고 대학시절의 미국인 친구와 합작으로 1922년에 숙주나물 식품회사를 창립하여 성공하였다.
그 후 사업을 목적으로 귀국한 유일한은 일제치하에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많은데 치료약이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1936년 우리 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고, 1962년 주식공개를 통해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또 가족관계가 아닌 회사간부사원에게 사장직을 물려줌으로써 전문경영인 시대를 여는 선구자의 역할을 했고, '유한 교육 신탁관리위원회'와 같은 공익재단을 설립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켜 교육장학사업 및 사회사업을 실시했다. 유한 중고등학교와 전문대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정치인이라면 정치흐름을 읽을 수 있는 안목과 정치윤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율곡이다.
이율곡은 난세에 국난을 예견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관직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능한 왕 선조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다가 7년간 임진왜란(1592-98)을 겪었다.
최근에 발생한 노동법 국회처리 과정이나 한보사건을 볼 때,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긴 안목과 윤리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아쉬운 때인 것 같다.
이번 주제는 '영성'이다. 앞에서 소개한 기업가나 정치가의 긴 안목이나 윤리의식이 '영성'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기독교 영성과 다른 점은 기독교 영성이 깊은 종교성을 요구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기독교 영성에 관해서 사람들은 제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영성을 열성적인 신앙생활과 동일시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영성을 방언과 같은 신령한 은사와 동일시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영성을 의식화와 동일시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신앙적 영성은 발달해 있는데 비해서 의식화되지 못한 면이 많고, 의식화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와 명상과 같은 신앙적 영성이 부족한 것 같다.
앞에서 빌 게이츠와 유일한 박사와 같은 기업인이나 율곡 이이와 같은 학자의 긴 안목과 윤리를 살펴보았지만,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 사람들을 일컬어 '영성이 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성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또는 신앙적인 관계에서 설명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남보다 일찍이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을 깨우쳤고, 평화시장의 봉재공장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 채 밤낮없이 혹사만 당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어 가는 어린 소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의식화된 청년이라 할지라도 그를 일컬어 '영성이 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반대로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기도와 방언을 말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 할지라도, 유한일 박사나 전태일 청년이나 장기려 박사와 같은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이 없다면, 그를 일컬어 결코 '영성이 깊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성이 깊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서 이사야서 58-59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영성이 깊은 사람은 하나님과 빈번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다. 인간은 예배행위 즉 기도와 찬양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육체와 영혼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감성과 의지와 사회성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헤아릴 수 있고,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그런데 교제는 상대적이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우정이나 사랑은 쌍방간에 이루어지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예배는 받지 않고 있다. 이사야 58장 3-5절을 보면, "주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께서 알아 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불평을 말하자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받으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경우 아무리 많은 기도와 방언을 말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을 일컬어 '영성이 깊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영성이 깊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한 가지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운 일 당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사야 58장 6-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셨고,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응답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뼈마디에 원기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셋째, 영성이 깊은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중사회의 영적 상태를 알고 회개하는 사람이다. 이사야 59장을 보면, 죄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멀어졌고,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으며, 죄 때문에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59장 9-15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면서 죄를 고백한다.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며, 밝음을 바라나,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 우리는 앞을 못 보는 사람처럼 담을 더듬고, 눈먼 사람처럼 더듬고 다닌다. 대낮에도 우리가 밤길을 걸을 때처럼 넘어지니, 몸이 건강하다고 하나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우리 모두가 곰처럼 부르짖고, 비둘기처럼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지만 공평이 없고, 구원을 바라지만 그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다."
"주님, 주께 지은 우리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발뺌할 수 없으며, 우리의 죄를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주님을 부정하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물러가서, 포학한 말과 거역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마음에 품었고, 또 실제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평이 뒤로 물러나고 공의가 멀어졌으며, 성실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정직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성실이 사라지니, 악에서 떠난 자가 오히려 약탈을 당합니다."
넷째, 영성이 깊은 사람은 인간의 역사 속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구원의 은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영성이 깊었던 이사야, 에스겔, 또는 계시록의 저자는 절대절명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이사야는 잘린 후에 죽어버린 그루터기에서 싹이 돋는 환상을 보았으며, 에스겔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해골과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보았다. 계시록의 저자는 대로마제국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자가 없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행하는 사람이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중사회의 영적 상태를 알고 회개하는 사람이며,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