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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0 14:57
헌신과 예배[로마서 12장 1-2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031  
본 장에서는 '신앙과 헌신'이라는 제목 하에 '헌신과 예배,' '헌신과 신앙,' '헌신과 봉사,' '헌신과 사랑'이란 주제들을 가지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헌신과 예배'라는 주제부터 살펴보겠다.
첫째, 헌신에 대한 문자적인 뜻부터 살펴보겠다. 헌신(獻身)이란 말은 '바칠 헌'자에 '몸 신'자로 문자 그대로 '몸을 바친다'는 뜻이다. 이 말의 뜻을 국어사전은 '자기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전력을 다함'이라고 적고 있다. 영어 사전에서는 헌신에 해당되는 '컴밋먼트'(commitment)라는 단어의 뜻을 '서약이나 약속의 행위' 혹은 '서약이나 약속이 된 상태' 또는 '금전적인 책임과 의무'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국영문 사전에서 풀이하는 헌신의 뜻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목숨을 바쳐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경우이다.
경상도 하동군 옥종면에 삼장(三壯)골이란 마을이 있다. 삼장골이란 이곳 출신인 연산군의 스승 조지서(趙之瑞)가 세 번 장원 급제한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또 세 번 장원해서 장하고, 죽어 가면서 스승의 도리를 지켜내 장하고, 죽여 한강에 버린 남편의 피를 치마로 거두어 고향에 묻고 수절한 그의 아내가 장하다 하여 삼장이라는 설도 있다.
연산군은 세자 때부터 공부는커녕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궁중에서 산책하던 중 사슴이 와서 옷을 핥았다 해서 쏴 죽였을 만큼 살상을 즉흥적으로 했다. 포악하고 유희만을 즐기는 세자, 이 세자의 스승들은 보복이 두려워서 방관하거나 추종하기에 급급한데, 유일하게 보덕(輔德) 벼슬에 있던 조지서만은 연산군을 책망하고 붙들어 앉히고 책을 던져 꾸짖기도 하면서 수난을 각오하고 스승의 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예견했던 대로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맨 먼저 조지서를 잡아 '점진살해'라는 가혹한 수법으로 복수를 하고 만다. 피범벅이 되도록 만들어 놓고 자신에게 가르친 도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스승의 길을 걸었다. 조지서는 스승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목숨을 바쳐 지켰던 것이다. 조지서의 삶은 헌신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좋은 예라 하겠다.
자기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전력을 다한 경우이다. 포항제철 창업 멤버로서 수석 부사장을 지낸 여상환 국제경영연구원장께서 한성신학대학 채플에 오셔서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1975년 당시 세브란스병원장이자 연세대 부총장이었던 민광식 박사와 카톨릭 의대 학장이었던 김학현 박사가 포항제철을 방문했다. 견학을 마친 이들은 그날 밤 포항제철 귀빈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민광식 박사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는 포항제철 공장을 둘러보고 나서 무한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학도의 입장에서 한마디하겠습니다. 우선 큰 병원과 상의해서 사장 이하 고급간부들에게 건강진단을 받게 하십시오." 이에 포항제철 간부가 "중역은 물론 전직원들이 정기적으로 인근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의례적인 신체검사 말고 정밀 종합건강진단을 받게 하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장을 비롯해서 모든 사원의 눈빛이 광기를 뿜고 있습니다. 의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미친 사람들의 눈입니다. 이런 상태로 간다면 얼마 못 가서 탈진하고 맙니다. 1-2년 내에 중역들이 하나 둘씩 쓰러질 터이니 서둘어 대비하십시오." 그후 한 달이 못 가서 부사장이 목디스크로 쓰러졌고, 제철소 소장이 디스크로, 관리담당 이사가 척추통증으로 입원하는 등 여기 저기서 건강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포항제철이 세계 3위의 철강회사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일에 미친 창업멤버들의 헌신에 있었던 것이다. 이해타산을 떠나서 전력을 다한 창업멤버들의 일에 미친 행위가 바로 헌신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자기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전력을 다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경우이다.
1982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던 영화 불수레(Chariot of Fire)는 에릭 리델(Eric Liddell)의 전기인 {날으는 영국인}(The Flying Scotsman)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에릭은 단거리 육상 분야에서 세계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1924년 올림픽 경기 때에 결승전을 포기한 일이 있었다. 일등이나 다름없는 경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 이유는 결승전 경기가 주일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건한 청교도였기 때문에 주일 성수를 위해서 경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예배를 위해서 올림픽 금메달을 포기한 것이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엄청난 희생이라고 생각된다. 에릭은 그후에 중국인을 위한 선교사가 되었다. 에릭은 분명 예배에 미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를 다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헌신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9절에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고 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하나님의 형상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말한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게 하며, 하나님을 닮게 하는 어떤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또 자연과의 관계에서 우리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게 하는 인간본성의 질이라고 생각된다. 이 인간본성의 질은 인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인성에는 지성(혹은 이성), 감성, 의지, 그리고 관계성이 있는데 신과 인간만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이다. 물론 다른 동물에게도 다소의 지능과 감정과 의지와 관계성이 있지만, 인간처럼 그 지성으로 학문을 창출할 수 없고, 그 감성을 문화 예술로 승화시킬 수 없으며, 본능 말고는 의지적 결단을 기대할 수 없다. 관계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도 사회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인간들처럼 복잡한 형태의 사회구조나 관계형성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인성의 요소는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요소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에게는 예배자로서, 자연에게는 청지기로서, 하나님에게는 예배와 찬양으로, 자연에게는 관리와 보전으로 올바른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다. 이 관계형성의 능력이 바로 인간본성의 질이며, 인성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자로서 만드셨다. 따라서 예배는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이다. 그리고 예배자로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성과 감성적 활동보다는 결단과 관계성이다. 이 결단과 관계성이 또한 예배자의 헌신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헌신은 결단의 문제이다. 헌신은 에릭 리델과 같은 믿음의 결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 믿음의 결단에서 출발된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예배와 신뢰의 관계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와 섬김의 의무를 가진다. 이 의무에 대한 믿음의 결단에서 헌신이 비롯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책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연결고리이다. 대인관계나 자연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배와 신뢰의 관계라면, 대인관계는 사랑과 섬김의 관계이다. 자연과의 관계는 관리와 보전의 관계이다. 그리고 신뢰와 책임이 이 모든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연결고리이다. 만일에 우리 인간이 스스로 책임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예배와 섬김과 관리의 책임을 신뢰를 바탕으로 헌신적으로 수행해 간다면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헌신은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헌신은 결단의 문제이다. '정기적인 예배 출석을 열심히 하겠다.' '예배 때의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을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말하며, '헌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마음과 정성을 바쳐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헌신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행위를 말한다. 본문 말씀 로마서 12장 1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산 제사는 영적 예배다'라는 말이 된다. '산 제사'에서 '산'에 해당되는 말 즉 '살아 있는'이란 말을 '영적'이란 말로 대신했다. 영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은 영적인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제사와 예배를 동일한 것으로 설명했다. 예배가 제사이고 제사가 예배라는 것이다.
제사는 몸을 신에게 바치는 예배 행위를 말한다. 구약성서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제단을 만들었다가 하나님의 만류로 중단된 일이 있었고, 사사 가운데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후에 자기의 외동딸을 하나님께 바친 사실이 있다(삿 11:39). 그러나 몸을 바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동물로 대신하거나 음식물로 대신한다. 구약 시대에 성행했던 희생제사가 바로 예배자를 대신해서 동물을 하나님 앞에 바쳤던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제물을 바칠 때에 제물에 안수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예배자의 죄를 전가시키는 의식이었다. 이 때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은 선물의 성격을 지닌다. 받는 자의 마음을 흡족하고 즐겁게 하여 그로부터 자비와 사랑과 용서와 축복을 되돌려 받는다.
헌신이란 말은 몸을 바친다는 뜻이기 때문에 순교나 제사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을 바쳐 신에게 드리는 제사 행위가 현실적으로 어렵고, 시대 변천에 따라 동물로 대신하던 제사도 바뀌어 이제는 성만찬과 말씀이 선포되는 영적인 예배로 바뀌었다. 성전의 희생제사가 성만찬 예배로, 회당의 성경연구가 말씀 예배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몸을 바치는 헌신이다. 구약시대에는 자신의 몸 대신에 동물을 사서 바치곤 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헌금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몸값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와 찬양 또한 온몸으로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기에 이것 역시 헌신이다. 예배 때에 신령과 진정을 바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바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누린 지혜와 부귀영화가 하나님께 바친 일천번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헌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위해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몸을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바치셨다. 화목제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인간이 마련한 화목제물이 있고, 하나님이 마련한 화목제물이 있다. 인간이 마련한 화목제물은 범죄한 인간들이 진노한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쳐 신의 진노를 풀게 함으로서 닥쳐올 재앙이나 형벌을 피해 보자는 선물 또는 뇌물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련하신 화목제물은 인간의 범죄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사랑하심으로 죄범한 인간들을 위해서 친히 또는 내리 사랑으로 예수를 화목제물로 봉헌하심으로 또는 선물로 주심으로 인간에게 하나님과 화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신 참 헌신의 의미는 인간의 의지로 마련한 희생제물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신 흠없는 화목제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로써 헌신하고자 함은 선물이나 선물의 성격을 지닌 세속적인 예배 즉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이미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해서 우리의 적은 정성을 모아 드리고자 함이다. 따라서 개신교의 성만찬 예배는 천주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로 드리지 아니하고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이미 바쳐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교제하고 또한 성령과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기원하는 예배로 드리는 것이다.
흠없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저주와 형벌을 받게 하신 것이 인간에게는 값없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외아들의 죽음이란 엄청난 대가를 치른 고통스런 희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