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2-09-10 15:00
헌신과 사랑(2)[데살로니가전서 1장 1-4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211  
최초의 유럽교회인 빌립보에 이어서 두 번째로 교회가 세워진 곳은 그리스 북쪽 마게도니아 지역에 위치한 고대 도시 데살로니가였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박해를 받아 가면서 이곳에 교회를 세운 것은 주후 50년경이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너무 심해 3주 이상을 견디지 못하고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후에는 바울이 두 개의 편지를 쓸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work)'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언급하였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에 따른 기적을 말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행동하는 믿음,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 헌신하는 믿음을 말한다. '사랑의 수고(labor)'란 노력하는 사랑, 조율하는 사랑, 십자가를 지는 사랑, 땀흘리는 사랑을 말한다. '소망의 인내(steadfastness)'란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소망, 포기하지 않는 소망, 좌절하지 않는 소망을 말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땀과 노동과 헌신으로 열매를 맺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칭찬하였다. 이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서 '사랑의 수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 하셨다.
'사랑의 수고'에서 '수고'는 '노동'을 의미한다. 노동은 육체적 또는 정신적 수고를 말한다. 땀흘려 하는 일을 노동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랑의 수고'는 노동이 수반되는 헌신적인 사랑을 말한다.
노동이 따른 헌신적인 사랑의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이다. 십자가는 가장 극악한 방법의 사형틀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은 가장 고통스럽게 가장 서서히 죽어간다. 하나님은 이 고통을 아무 죄 없이 전적으로 인간들을 위한, 인간들 때문에 당한 것이며,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큰 것은 그분의 노동이 컸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출산의 고통을 겪는다. 모든 어머니들은 커다란 고통과 진한 노동 속에서 생명을 얻는다. 큰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얻으면 뿌듯한 희열을 느낀다. 젖을 물리고 헌신적인 사랑을 아끼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노동과 사랑이 정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이 크면 사랑도 커진다. 노동이 크면 열매도 많아진다. 애써 번 돈은 귀한 법이다. 쉽게 번 돈은 쉽게 낭비된다. 마찬가지로 어렵게 일군 사랑은 오래 지속된다. 그러나 쉽게 일군 사랑은 쉽게 식어버린다. 고통과 노동 속에서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 기쁨과 행복의 열매는 산고의 노동이 있은 후에 열린다.
남부 칠레의 늪지에는 리노데르마르라는 작은 개구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산란기가 되면 이 작은 개구리의 암컷은 젤리에 쌓인 알을 낳는다. 그 순간 곁에 있던 수컷은 이 알들을 모두 삼켜버린다. 물론 그것을 먹이처럼 완전히 삼키는 것이 아니다. 수컷은 식도 부근에 있는 자신의 소리주머니 속에 그 알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알들이 소리주머니에서 성숙할 때까지 자신을 희생한다. 자신의 존재 이유며 중요한 쾌락인 우는 것까지도 포기한다. 소리주머니 속에 있는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서 먹는 것까지 포기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알들이 완전히 성숙하기까지 입을 벌리지 않는다. 알들이 완전히 성장했다고 판단되면 비로소 리노데르마르는 자신의 입을 벌려 마치 긴 하품을 하듯 새끼 개구리를 입에서 내 보낸다.
이렇게 무엇인가 살아있는 것, 생명 있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 또는 수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랑은 죽어있는 것들에 속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살아있는 것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매도 노동과 수고에 의해서 결실 한다. 노동이 크면 사랑도 커진다.
'헌신과 사랑(1)'에서 하나님께서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헌신적인 사랑을 겸손한 마음, 순종의 마음, 참여와 협동의 마음에서 또 포기와 동일시에서 찾아보았다. '헌신과 사랑(1)'에 이어서 관심과 기도와 책임과 이해와 존중과 주는 것 등에서 헌신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헌신적인 사랑은 관심과 배려에서 찾을 수 있다. 관심과 배려에는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관심과 배려가 없는 사랑은 가짜이다.
개화기 때, 6조(六曹)에서의 점심식사는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판서나 참판과 같은 당상관(堂上官)이 맨 처음 먹고 나면 그 상을 물려 정랑(正郞)이나 좌랑(佐郞)과 같은 당하관(堂下官)이 먹고, 다시 그 상이 물려져 아전이 먹고, 아전이 물려 종들이 먹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그토록 길었다. 이를 '네 물림 상'이라 불렀는데, 윗사람들은 상물림을 배려해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얼굴이 메말라 수척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를 '양상수척'(讓床瘦瘠)이라고 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 관심과 배려가 있다.
둘째, 헌신적인 사랑은 기도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랑하면 기도하게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간절한 사랑이 헌신적인 사랑이다.
오래 전 미국 어느 도시 시립병원 정문 앞에 생후 6개월 된 아기가 버려져 있었다. 그 아기는 소경에다 뇌성소아마비를 앓았고, 정신까지 박약한 아이였다. 우유를 빨아 마실 반사본능마저 없는 아기였다. 이 아기를 발견한 병원 당국은 당황해하다가 마침 은퇴한 간호원 메이 렘케와 이 딱한 사정을 의논하게 되었다. 당시 52세로 신앙심이 깊었던 렘케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그 아기를 맡아서 키우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데려 왔다. 아기의 이름은 레슬리였다. 그때부터 렘케는 아기의 뺨을 자기의 얼굴로 비벼주고, 팔, 다리, 손가락을 마사지해 주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도록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레슬리는 단 한번의 움직임이나 한마디의 말은 물론 웃음이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렘케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제가 스스로 레슬리를 찾아 나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이 아이를 키우도록 선택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이유를 언제쯤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기도라기 보다는 항변에 가까운 호소를 하면서 레슬리에게 걸음마를 시켜 보기도하고 특수 요법으로 치료를 받도록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렘케는 여전히 레슬리를 위해서 기도했다. "사랑의 하나님! 성경의 기적을 믿습니다. 이 아이에게도 기적을 허락해 주십시오. 정신적 감옥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기적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렘케는 레슬리가 엄지손가락으로 기타를 퉁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18년만에 처음 보여준 이 작은 기적 앞에서 렘케는 음악을 생각해 냈다. 음악이야말로 레슬리를 치료할 수 있는 마지막 도구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일이 있고나자, 렘케는 집안을 온통 음악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레슬리의 손가락을 집어주며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그러나 레슬리는 한번의 기적으로 만족하라는 듯 더 이상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1971년 겨울 새벽에 기적이 일어났다. 곤한 잠에 빠진 가족들은 누군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치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순간 렘케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레슬리의 방으로 달려갔다. 레슬리가 미소를 머금은 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렘케는 소리쳤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레슬리를 잊지 않으셨군요." 레슬리의 눈에서도 21년만에 진주 같은 이슬이 맺혔다.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성량이 풍부했다. 이후 그는 뉴욕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더듬대며 "음악은 사랑입니다."라고 말했다. 매스컴은 이 신화를 메이 렘케 부인의 "사랑과 기도의 기적"이라고 보도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간절한 기도가 있다.
셋째, 헌신적인 사랑은 책임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적 존재로 지음 받았고,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여기서 사랑은 책임이 수반되는 사랑, 약속이 지켜지는 사랑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고 책임을 이행하는 사랑이 헌신적인 사랑이다.
사랑과 책임은 정비례한다. 사랑이 있으면 책임도 있고, 사랑이 없으면 책임도 없다. 아담은 이브에게 책임을 느끼지 못했다. 하나님과 맺은 약속파기의 책임을 이브에게 떠넘겼다. 사랑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가인은 아벨에게 책임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불행을 아벨의 탓으로 돌려 동생을 죽였다. 사랑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요나는 니느웨의 백성에게 책임을 느끼지 못했다. 요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에게 책임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책임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불쌍한 민중에게 가중한 율법의 멍에를 메도록 했다. 이 모든 이들이 책임을 느끼지 못한 것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임지지 않는 사랑은 가짜란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책임이 있다.
넷째, 헌신적인 사랑은 이해와 존중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것은 가짜이다. 이해란 말을 영어로 '언더스댄드'(understand)라고 한다. '언더스댄드'란 아래에 선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알기 위해서 상대방 밑에 선다는 뜻이다. 자신을 낮추면 상대방이 커 보인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해하면 존중하게 된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 헌신적인 사랑이다. 사랑은 이해를 심화시키고 이해는 사랑을 심화시킨다. 깊이 이해하면 깊이 사랑하게 되고, 깊이 사랑하면 깊이 이해하게 된다.
빌립보서 2장 2-4절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하였고, 로마서 12장 9-10절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이해와 존중이 있다.
다섯째, 헌신적인 사랑은 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사랑하면, 시간, 돈, 정성, 재능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주려고 한다.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다. 무엇을 주느냐를 보고 얼마만큼 사랑하는 가를 알 수 있다. 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주어서 기쁜 것이 사랑의 생리이다. 주어서 풍성해지는 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깝다는 생각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랑하면 아깝다는 생각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일지 않는다.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가장 소중한 것조차 아낌없이 주려고 한다.
사랑은 한 자루의 초와 같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을 산화시키는 것과 같다. 사랑은 많은 열매를 맺히려고 땅 속에 묻힌 한 알의 밀알과 같다. 헌신적인 사랑은 관심과 배려와 기도와 책임과 이해와 존중과 주는데서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서 하신 말씀이다.
헌신적인 사랑이 참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헌신적으로 사랑하셨다. 이 헌신적인 사랑을 성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독점적인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살기를 원하고 계신다. 신앙은 삶의 방식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야 한다. 사랑과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