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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13
구원의 목적[에베소서 2장 8절-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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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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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우리는 '구원의 근원,' '구원의 수단,' 그리고 '구원의 시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구원의 목적'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첫째, 죽은 나무에는 봄이 찾아오지 않는다. 겨울이 되면 나무마다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어 모든 나무가 죽은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겨울 동안에는 죽은 나무와 살아있는 나무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봄이 되면 살아 있는 나무와 죽어 있는 나무가 구별이 된다. 살아있는 나무는 봄에 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여름에는 풍성한 가지와 잎으로 열매를 만든다. 가을에는 싱싱하고 풍성한 열매를 제공한다. 그러나 죽어 있는 나무는 계절에 관계없이 싹을 내지 않고 열매를 만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나무의 상태를 보고 그 나무가 산 나무인지 죽은 나무인지를 판가름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피로 인하여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사람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어 있기 때문에 선행의 싹이 없고 꽃이 없고 열매가 없다. 그러나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선행의 싹이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람의 신앙 상태를 보고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인지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인지를 판가름한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활동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잠자는 사람이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는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지만"(롬 10:9),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확신으로 믿음을 키워 가야한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는가? 우리가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는가? 청산유수 같은 기도솜씨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뽐낼 수 있는가? 많은 액수의 헌금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뽐낼 수 있는가? 잦은 금식과 기도회의 참석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뽐낼 수 있는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비유에서 예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책망하고 있다(눅 18:10-14). 바리새인들은 예복을 즐겨 입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즐기며,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세리나 죄인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0:45-47).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금식'은 하면서도 옳은 행실이 없는 신앙인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책망하고 계신다.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받으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1-7).
이와 같이 하나님은 행함이 없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믿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통해서 드리는 산 예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의 믿음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신앙인의 삶 속에서 묻어나는 믿음이 나쁘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다. 이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야고보서 2장 14-26절의 말씀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 .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둘째, 봄이 나무에게 필요한 모든 계절은 아니다. 봄은 나무에게 필요한 출발점이고, 여름은 가을을 준비하는 성숙기이며, 가을은 열매를 맺는 결실기이다. 따라서 나무에게 필요한 것은 봄의 생동과 여름의 풍성함과 가을의 열매이다. 열매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닐지라도 봄과 여름은 가을에 맺히는 열매를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마가복음 4장 28절에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말씀하셨다.
봄에 피는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와 벚꽃, 매화와 라일락 등의 꽃은 아름답다. 신자에게 있어서 중생 또는 거듭남의 체험은 얼었던 대지와 두껍고 딱딱한 외피를 뚫고 나오는 새싹과 더불어 죽은 것 같았던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와 벚나무, 매화와 라일락에서 눈부시게 피는 꽃의 감동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봄 한철에 불과하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서 봄의 감동은 식어져 버리고 잊혀져 버린다. 봄에 느꼈던 감동이 여름에 찾아오는 신록의 풍성함에 압도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록의 풍성함도 여름 한철에 불과하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여름의 감동은 식어져 버리고 잊혀져 버린다. 한 나무의 진가는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무마다 다가올 찬 겨울을 맞기 위해서 몸의 수분을 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풍성했던 잎을 떨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잎이 떨어질수록 열매가 많은 나무는 사랑을 받게 되고 열매가 없는 나무는 초라한 모습으로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예수께서도 열매 없는 나무를 싫어하셨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길가에서 잎이 풍성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에 관심을 보이셨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라고 저주하셨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마 21:19).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도 열매 없는 나무를 책망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어 놓고,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 13:6-7).
셋째, 나무는 결국 그 열매를 보고 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6-20절에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로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갈라디아서 5장 16-25절의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나쁜 열매와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한다. 나쁜 열매는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와 또 이와 비슷한 것들"이며,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 한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 .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의 말씀에서도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라는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한 농사짓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매우 악한 여자였다. 그런데 그 여자는 생전에 선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한 것이 없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악마는 그 여자를 잡아서 지옥의 불바다 속에 집어 던져 넣어 버렸다. 그러나 그 여자를 보호하는 천사는 서서 그 여자가 한 일 중에서 무언가 하나님께 말씀드릴 선한 것이 없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천사는 그 악한 여인이 언젠가 그녀의 농터에서 파를 한대 뽑아서 그것을 어떤 거지 여자에게 준 것이 생각이 나서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 드렸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천사더러 말씀하셨다. "그러면 저기 있는 저 파 한대를 가져다 불바다 속에 있는 저 악녀에게 내밀어주고 그것을 붙잡게 하고 그녀를 끌어 당겨서 구출해 보아라. 그리고 만일 네가 그 팟대로 그 악녀를 불바다로부터 끌어내는데 성공한다면 그녀를 천당에 가게해도 좋다. 그러나 그 팟대가 부러진다면 그녀는 지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천사는 얼른 달려가서 그 팟대를 불바다 속에서 신음하는 그악한 여자에게 내밀면서 "이봐요, 이 팟대를 꼭 잡아요, 내가 끌어당길 터이니 말이요."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 천사는 조심스럽게 악녀가 매달린 팟대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천사가 바로 팟대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그 순간에 그 불바다 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그것을 보고 자기네들도 살려고 그 악녀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고약하고 악한 여자인지라 그 악녀는 다른 죄인들이 함께 매달리지 못하게 발길로 차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구원의 팟대이지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야. 이것은 내 팟대이지 너희들 것이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그 팟대는 그만 부러지고 말았다. 그 악녀는 불바다 속에 다시 떨어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다운 아름다운 삶을 위한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인다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말하기를, 불신자들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그리스도인들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롬 6:16) 고 했다. 이뿐 아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충고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의에게 종' 또는 '하나님께 종'이란 말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와 성결의 생활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노력과 선행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주시고 있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계신다. 구원과 함께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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