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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0 15:06
하나님과 싸워 이긴 야곱[창 32:21-32]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233  
야곱은 147년의 "험악한 세월"을 살면서 '발꿈치를 잡은 자,' '사기꾼,' 또는 '거짓말쟁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이 되었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란 뜻의 '이스라엘'이란 이름도 얻었다.
야곱의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야곱이 어떻게 역경을 이기고 크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인간으로써 어떻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이 물음에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적절한 해답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야곱의 성격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야곱의 이기심과 교활함과 몰염치는 야곱을 운명의 개척자와 집념의 승부사로 만들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란 책에서 "역사는 단순히 발생하는 것, 되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도 이루어 서는 것, 건설되는 것, 만들어내는 것이다."고 했는데 야곱이야말로 역사를 만들어간 투지 있는 신앙인 이었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라도 야곱의 이기심과 교활함과 몰염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야곱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그의 이기적이고 교활하고 몰염치한 성격이 야훼신앙 때문에 다듬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함석헌 선생은 말하기를, "이기심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기심이 강한 민족일수록 크게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더불어 켕겨 일직선을 이룰 필요가 있다. 이기심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뿐이다."고 했다. 이는 마치 기둥에 매인 개가 끈이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듯이 야곱의 이기심과 교활함과 몰염치도 야훼신앙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기심의 투지와 야훼신앙의 견제가 야곱을 운명의 개척자와 집념의 승부사로 만드는 힘이었다.
두 번째로 야곱의 영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중국의 여숙간은 "옳음을 밝히는 것은 부패한 선비도 가능하지만, 때를 밝히는 것은 뚫린 선비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때를 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대세를 아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여숙간의 말처럼 야곱은 옳고 그름의 차원을 넘어서 때를 알고, 대세를 파악한 사람이었다. 야곱은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 냈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의 물줄기에 자신의 온몸을 던진 운명의 개척자요, 집념의 승부사요, 믿음의 사람이었다. 야곱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후, 이를 숨겨 두고 기쁨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이었다. 야곱은 마치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난 후,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 사람이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이 아버지 이삭을 거쳐 이제 자기 대에 이른 것을 알았고, 그 축복이 신앙 없는 에서를 피해 자기에게로 향해 오는 대세를 파악한 사람이었다.
한편, 에서는 옳고 그름을 알고 활달하고 용맹스런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경박하여 무슨 일에든지 심사숙고하지 아니하며, 가치 있고 무가치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시기와 대세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것도 바로 때와 기운을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세 번째로 야곱의 삶과 생활환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야곱은 자신의 147년 생애를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했다. 아버지를 속이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했어야 했고, 20년 세월의 남의집살이를 했고, 물과 풀을 찾아 정처없이 살아온 떠돌이 나그네의 삶이었다. 그러나 야곱에게 있어서 "험악한 세월"은 내성적이고 모성적이며 온화한 성격의 야곱이 무사안일에 안주하여 낙천적이고 온화하며 심각성이 없이 살아가게 내버려두지 아니하였고, 이기적이고 교활하고 몰염치한 성격을 걸러내게 하였으며, 고난이 주는 의미를 깊이 해석하며 하나님을 붙들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말하자면 쓰디쓴 고난이 야곱에게 성공을 위한 약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야곱의 고난의 세월은 단순히 야곱 자신만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였으며, 우리 자신의 생애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정학적 위치나 고난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지정학적 위치나 고난의 역사와 매우 닮아있다.
이스라엘은 서쪽의 지중해와 동쪽의 아라비아 사막을 끼고 있고, 남북 대륙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놓여 있어서 남진이나 북진 또는 서진을 시도하는 제국들의 잦은 침략과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차지하고 있는 땅의 대부분이 농사가 어려운 불모지요, 하늘에서 뿌려주는 비에 의존하는 데다 그나마 한여름의 기온은 높고 비가 오지 않으며, 11월에 시작해서 3월까지 내리는 강우량이라야 겨우 500㎜ 안팎에 지나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어서 힘을 키워 세계로 뻗어 나갈만한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험악한 세월"을 보낸 고난의 역사였다. 성경이 고난을 주제로 쓰여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나라도 아시아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 끼여 있어서 지나다니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의 중국과 북쪽의 만주와 동쪽의 일본사이에 끼여 있어서 동진이나 남진 또는 서진을 시도하는 나라들의 잦은 침략과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차지하고 있는 땅의 8할 정도가 산악지역이어서 농사할 땅이 많지 않았고, 기후가 온화하여 그 기질이 온순하고 착했던 터라 힘을 키워 세계로 뻗어나갈 여력이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들이 모두 방어전이었지 침략전이 아니었던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함석헌 선생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 한국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다."고 했던 것이다.
에서와 야곱을 놓고 볼 때도 이스라엘과 한국은 많이 닮아 있다. 에서는 성격이 활달하고 용맹한 사냥꾼이어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북풍한설을 쐬며 씩씩한 기상을 길러온 북쪽의 부성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성에 비교될 수 있겠고, 야곱은 성격이 내성적이며 모성적이고 신앙적이어서 온화한 기후를 가진 남쪽의 평화로운 민족성에 비교될 수가 있다. 이 두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고, 야훼신앙의 열성적인 면에서도 닮아 있고,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민족이란 점에서도 닮아 있다. 야곱의 민족과 우리 민족은 가시 없는 장미가 없듯이 아픔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간 민족이며, 환경에 굴복되지 아니하고, 살아남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살았노라 는 의식을 가진 민족이다.
에서가 남자답고 용맹스럽고 호탕한 장군의 기질을 갖고서도 모성적이고 나약하고 내성적인 야곱을 이기지 못한 것은 그에게 진지함이 없었고, 철학이 없었고, 신학이 없었고, 이상이 없었고,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서가 모든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긴 것은 그에게 가치 있는 것은 물질세계뿐이었고, 정신세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고구려의 후예답게 용맹을 떨치던 북쪽사람들이 모든 축복을 남쪽의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이유도 그들이 참가치를 유물사상인 물질에 두었기 때문이요, 정신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편 야곱이 이기적이고 교활하고 몰염치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던 것은 운명을 바꾸겠다는 정신과 신앙 때문이었다. 야곱은 참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다 두었고, 민족과 나라를 세우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품었으며, 물질보다 정신을 우위에 두는 사상가요 철학자요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기상이 죽고, 계획이 원대하지 못하고, 이상이 크지 못한 개인이나 민족은 복을 받을 수 없다.
창세기 32장 21절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얼마나 끈질긴 인물이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짓밟아도 되살아나는 민들레처럼, 꺾어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 무궁화처럼, 야곱은 삶의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다.
아프리카 서남단에 위치한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에는 밤이슬과 안개 속에서 소량의 수분을 섭취하면서도 무려 2,000년을 사는 선인장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1,500년 된 1m쯤 크기의 웰위치아 미라빌리스(Welwitschia Mirabilis)라는 선인장이 사막인데도 철조망 안에 보호받고 있다고 한다. 이 식물은 축 쳐진 채 죽은 듯 시들어 있다가 아침이면 조금 살아나고, 비가 오면 물 만난 고기처럼 싱싱하게 살아난다고 한다. 몇 년씩 비 한 방울 안 와도 잎에 맺히는 이슬과 아침나절 안개 속에서 수분을 섭취하며, 땅 속의 영양분을 빨아먹으며, 근근히 목숨을 이어간다고 한다. 그 애절한 사연도 모르고 거친 사막바람이 몰아쳐 잎을 부서뜨리고 시들게 만들지만 뱀가죽처럼 잎 끝을 돌돌 말아 표면적을 줄인 채 환난을 이겨낸다고 한다. 이 선인장과 같은 민족이 있다면 바로 야곱의 민족이요, 우리 민족일 것이다.
야곱이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속여 형의 받을 축복을 가로챈이후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 집에서 20여 년의 남의집살이를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야곱이 아내를 넷이나 얻고 아들을 열 한 명이나 두며, 수많은 가축을 이끄는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 없이" 열심히 일한 결과와 비상한 재주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야곱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야곱은 자신이 쌓은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돌렸다. 그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으나 두 떼의 짐승을 이루게 하신 분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재산증식의 과정에서 라반의 의심을 받았던 야곱이 오욕과 야망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새출발을 위해서 라반의 집을 떠나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향할 때에 에서라는 또 다른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여기서도 야곱은 인간적인 꾀를 동원하였다. 야곱은 우선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신에게 사용하는 최대 경칭어인 '주'라는 칭호로 형을 부르고 자신은 '종'이라고 비하시켜 최대의 경의를 표하면서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창 32:5)라는 전갈을 띄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작전을 바꾸어 선물 공세를 펼치는 한편, 짐승을 두 떼로 나누어 거리를 두고 행하게 하여 최대한의 피해를 줄이고자 안전장치를 강구하였다. 그는 또 여종과 그 자녀들, 그 다음에 레아와 그 자녀들, 그리고 라헬과 요셉을 그 다음에 두어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가까이 두는 전략까지 만들어 놓았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자기 몫의 재산을 불릴 때에 비상한 꾀를 부렸듯이 모은 재산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간사한 꾀를 부렸다.
그런 다음 그는 강가에 혼자 남았다. 생사의 문제를 결단하는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20여 년이나 피하던 형을 이제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처지가 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어머니나 아내의 도움을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예전 아버지와의 대결에서는 어머니가 도와주었고, 외삼촌과의 대결에서는 아내가 도와주었지만, 이제 얍복강 가에서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는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만 큼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아끼는 재물이나 사랑하는 가족들도 그를 도와 줄 수 없게 되었다.
성경은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했다고 적고 있다. 야곱은 자기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와 밤새껏 겨룬 것이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라는 야곱의 집념은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꾀가 많은 야곱은 에서나 라반을 능가해 왔으나 이제는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야 했다. 이때에 그는 질문을 받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야곱은 자기가 '속이는 자'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얍복강 가에서 만난 적수가 야곱에게 이름을 물어온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20여 년 전 이삭이 야곱에게 "나의 아들아,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에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입니다."라고 거짓 대답을 했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그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속이는 자 야곱입니다"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누명을 벗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초인적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지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인간이 감히 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신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 남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다리를 절었다는 것은 신과 겨룬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난 야곱은 이제 막 떠오른 해를 가득히 받으며 에서의 장벽을 두려움 없이 맞부딪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자연인 야곱의 이름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다. 여기서 또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야곱의 자긍을 막기 위해서 환도뼈를 꺾어 발을 절게 했다는 점이다. 이는 바울의 신앙고백처럼, 인간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고후 12:9). 이스라엘 민족과 우리 민족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처럼 이스라엘 민족과 우리 민족은 고난의 민족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민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