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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1 01:26
인간의 자유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마 13:47-50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859  
'판관 포청천'이란 인기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 중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전국적으로 '포청천'이란 말이 유행하게 되었고, '포청천'하면 강직하고 정의롭고 준엄한 관리를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 47-50절의 그물비유에서는 포청천의 서슬 퍼런 판결보다도 더 무섭고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최후심판 때에 하나님이 악인들을 용광로에 던져 넣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심판입니다. 무섭고 엄격했던 포청천도 죄인을 불 속에 넣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촌에 가보면 부두에서 어부들이 잡은 고기를 고르고 분류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여보내고 악인은 용광로에 잡아넣겠다는 것이 그물비유의 교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라지비유와 염소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라지비유는 추수 때에 농부가 가라지를 모아 불살라버리듯이 마지막 때에 악인을 용광로에 던지겠다는 말씀이고, 염소비유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마지막 때에 착한 사람들로부터 악한 사람들을 분리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찬란했던 로마 교황청의 영광을 자랑하는 화려한 건물 중의 하나가 바티칸에 있는 시스틴(Sistine) 채플입니다. 이 채플은 1473년에 교황 식스투스(Sixtus/1471-84) 4세를 위해서 건립된 성당인데, 천재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벽화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최후의 심판"은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세상 끝 날에 예수께서 지상에 재림하여 사람은 물론 천사까지도 심판하시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예언을 믿는 사람들이고, 최후의 심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만을 신뢰하고 하나님이나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의 법칙에서는 살아있던 것이 죽어가고, 가득 찼던 것이 비어가고, 새 것이 헌것이 되고, 약자가 강자에게 쫓기고 때로는 잡혀 먹힙니다. 그런데 강자는 대개 먹을 수 없는 짐승 가운데 많습니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공격적인 짐승이나 독수리나 매 같은 조류는 거의 먹지 않습니다. 물고기도 사납고 공격적인 것은 잘 먹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강자는 대체적으로 악질이 많고, 약자는 대체적으로 선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물도 먹을 수 있는 좋은 식물보다는 먹지 못하는 독초나 잡초가 강하고, 사람도 마피아나 조직폭력배처럼 선량한 사람보다는 악한 사람이 더 강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자연의 법칙은 아담의 타락이후의 법칙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선량한 양심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착한 사람이 잘되고 상 받기를 바라고, 나쁜 사람이 벌받고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을 보아도 자연의 법칙은 정상적인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타락이후의 법칙인 자연의 법칙대로 움직여갑니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탄압하고 괴롭힙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굽니다. 이런 상황에서 심판이 없다면 얼마나 불공하겠습니까?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 꼴이 어떻게되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과연 심판이 필요 없을 만큼 공정한 세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포청천처럼 뇌물을 받지 않고 정의롭게 시비를 가리는 옳은 재판관을 원합니다. 한 때 우리 나라에 포청천이 유행했던 이유도 다 이런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심판이 있기를 바랍니다. 옳은 심판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인간의 바람은 곧 사람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의 그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당장에 그물에 걸리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심판에 관해서 몇 가지로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의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아니 하시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이성과 자유를 가진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대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이 자유를 가지고 행복을 만들 수도 있고, 불행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유를 어떻게 누렸느냐에 따라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준 대신에 반드시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묻습니다. 하나님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부족이나 사회나 국가로부터도 자유로운 행동에 대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를 범하고도 심판 받지 아니하고 피해 가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안 먹을 자유는 아담과 이브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하지 말라'하면 해보고싶고, '먹지 말라'하면 먹어보고 싶고, '보지 말라'하면 보고싶어지는가 봅니다. 아담과 이브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하신 나무의 열매가 보고 싶었고, 만져보고 싶었고,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호기심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동산에 자라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된다고 하시면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만큼 머리가 좋아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쾌락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찰라 같은 짧은 쾌락의 끝은 길고도 험난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신이 결혼선물로 준 금단의 상자를 열고 열지 않을 자유는 인류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었던 판도라에게 있었습니다. 남편 에피메테우스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속할 자유도 판도라에게 있었고, 망가뜨릴 자유도 금단의 상자를 손에 쥔 판도라에게 있었습니다. 판도라 역시 상자를 열어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했고, 결국은 인류에게 크나큰 시련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망가뜨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이성은 자유를 옳은 곳에 쓰고, 죄를 억제하는데 쓰라고 주신 브레이크였습니다. 그런데 브레이크를 밟아야할 시기에 가속페달을 밟아버리는 어리석은 인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지신호를 무시하면 벌을 받습니다. 무서운 재난을 초래합니다. 해야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할 일만 골라서 하게되면 심판을 받습니다. 이런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인간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구약시대에 사사기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범죄', '호소', '구원', '축복'의 반복으로 보았습니다. 이 역사가를 학자들은 신명기 역사가라고 부릅니다. 이 역사가의 사관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바알 신을 섬기며 죄를 범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힘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돌보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강한 주변국들로부터 침략을 받게되고 엄청난 고통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런 큰 고통을 당해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잘 나갈 때에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불행에 빠지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비가 많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라,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들은 복을 받고 평화와 번영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것이 신명기 역사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면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신명기 역사가의 경고입니다. 역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이 역사의 심판을 그가 쓴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들의 '발생', '성장', '쇠퇴', '해체'란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토인비는 제2편 '문명의 발생'에서 어떻게 원시문화로부터 몇 개의 고대문명이 꽃피울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고대문명이란 이집트, 수메르, 미노스, 인도, 고대 중국, 안데스 및 마야문명들을 말합니다. 이들 고대문명이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성공을 이뤘던 이유가 인종의 우수성 즉 좋은 씨 때문이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기 좋은 자연환경 즉 좋은 밭 때문이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문명을 성취한 것은 우월한 생물학적 자질이나 지리적 환경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씨가 좋아서도 아니었고, 밭이 좋아서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느냐? 자연환경으로부터 오는 강한 도전에 적절하게 잘 응전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집트와 수메르 문명은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이란 자연의 도전을 받아 발생했고, 미노스 문명은 지중해의 도전을 받아 발생하였고, 인도와 마야문명은 빠르게 성장하는 열대성 수림의 도전을 받아 발생하였고, 안데스 문명은 해안의 건조한 고원사막의 도전을 받아 발생하였고, 황하 유역의 고대 중국문명은 늪과 홍수의 도전을 받아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도전을 받는다고 다 응전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명의 발생은 분명 좋은 씨와 좋은 밭처럼 좋은 생활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기 힘든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좋은 씨라든지 좋은 밭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성과 노력여하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집트 문명과 수메르 문명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은 사하라 사막과 아라비아 사막으로 변해버린 아프라시아 지역은 본래 물이 넉넉한 초원지대였으므로 중앙 아프리카의 사람들처럼 원시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 가뭄이 들어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삶의 장소를 옮기던가, 생활양식을 바꾸던가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멸망하였습니다. 삶의 터는 옮기지 않고 생활양식만 고친 자들은 아프라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이 되었고, 생활양식은 고치지 않고 생활장소만 옮긴 자들 가운데 북쪽으로 옮긴 자들은 겨울에 추위라는 무서운 도전을 받아야 했고, 열대성 기후변화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 자들은 열대 아프리카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활의 터전과 생활양식을 모두 다 바꾼 자들은 나일강 유역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찬란한 농경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이와 같이 도전에 직면해서 성공하고 못하는 것은 씨나 밭의 좋고 나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이한 생활환경은 응전을 일으킬만한 도전을 인간에게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전이 너무 가혹할 경우에는 흙이 얕은 자갈밭이나 잡초가 무성한 가시밭에서처럼 문명이 잉태되더라도 질식사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질식사의 원인도 반드시 외부적인 조건 즉 길가라든가 흙이 얕다든가 혹은 잡초가 무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적 즉 교만이나 자기만족 또는 자기도취나 우상화에 있다는 것입니다.
타고난 자질이나 환경을 핑계삼아 역사의 도전 앞에 응전을 게을리 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씨앗의 자질이나 환경의 좋고 나쁨에 있지 않고, 겨자씨나 길가나 돌밭 또는 가시밭과 같은 악조건을 어떻게 옥토로 만들었으며, 어떻게 30배, 60배, 또는 100배의 성장을 가져왔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응전을 불사하는 민족에게는 성장과 번영으로 축복하시고, 악조건에 굴복하는 민족에게는 쇠퇴와 해체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도종환 선생의 글 가운데 '담쟁이'이란 시가 있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어쩔 수 없는 절망의 벽,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을 오르는 담쟁이 같은 인간과 민족만이 역사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르기를 희망하는 자만이 오를 수 있고, 이기기를 희망하는 자만이 이길 수 있고, 성공을 희망하는 자만이 악조건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하나님의 심판의 그물을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과 자유를 주셨고, 특별히 우리 성도들에게는 악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창조신앙까지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곡식 창고에 들어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그물에 걸린 좋은 고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때에 양으로 판정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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